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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25. 2024

독자 노선을 선언하다 - 2

 12월 15일 (토)


 그때 휴대폰을 가지고 온 퀵에게서 전화가 왔다. 현우는 5번 출구에 오토바이를 탄 검은 헬멧의 퀵을 단번에 알아봤다. 작은 박스를 열어 휴대폰과 메모지를 확인하고는 돈을 건넸다. 메모지에는 휴대폰 번호와 명의자의 이름, 주민번호가 적혀 있었다. 주문하면서 명의자의 인적 사항이 없으면 물건값을 못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었다. 

 지역 정보지 담당자에게 방금 받은 선불폰 번호를 알려 주었다. 이 번호는 명의대여자 광고에 실릴 것이다. 이어 이동통신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거나 전원이 꺼져도 수신 번호가 자동으로 저장되는 부가서비스를 받고 싶은데요?”

콜센터 상담원은 명의자 본인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 번호와 이름, 주민번호를 물었다. 이 신청을 하려고 판매업자에게 인적사항을 요구한 것이다. 상담원은 부가서비스 요금은 다음 달에 가산되어 나올 거라며 상냥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명의대여자 광고로 오는 전화는 이 폰에 입력된다.

 현우는 이렇게 오늘 할 일을 완벽하게 끝냈다. 마치 전장에서 고지의 8부 능선까지 점령한 군인이 된 듯했다.

 ‘이쯤 되면 어느 정도 밥상은 차려진 건가?’

 그는 자문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세상은 누가 누굴 키워 주는 법은 없어. 스스로 크는 거지.”     

 배가 출출했다. 시간은 오후 4시를 넘기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기가 귀찮아 도시락을 시켰다. 찰기 잃은 밥알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 밥알을 주우려는데 캘린더 메모지에 최수혜란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수화기를 들었다.

 “최수혜 씨죠? 어제 대출 문제로 저희 사무실에 전화하셨지요? 통화한 박 실장입니다. 마침 오늘 제가 근무하여 연락을 드린 겁니다. 평일에는 시간 내기가 힘들다는 말씀을 하신 것 같아서요.”

 현우의 말투에는 상대방을 배려해 일부러 연락했으니 그 고마움을 알아 달라는 뉘앙스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사무실 위치를 물어보더니 곧 출발하겠다고 했다. 


 얼마 후 구두 소리가 복도의 적막을 깼다.

 ‘똑똑똑!’

 일정한 간격으로 적당한 크기의 노크 소리였다. 어깨 밑으로 내려온 생머리에 흰색 반코트를 걸친 그녀가 들어왔다. 현우는 얼른 커피를 타서 내놓았다. 엷은 쌍꺼풀에 촉촉한 눈망울의 아가씨로 청순가련형의 분위기가 났다. 가느다란 눈썹이 초생달을 닮았다. 살짝 파인 보조개가 예뻤다. 순간 그는 심쿵하여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오뚝한 자세로 현우를 바라보는 모습이 꽤나 진지해 보였다.

 “담배를 좀 피워도 되겠습니까?”

 긴장을 푸는 데는 담배만 한 것이 없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편안히 태우세요.”

 “서류는 준비했나요?”

 “등본은 전에 발급한 게 있어서 갖고 왔는데 인감증명서는 주민센터가 휴무라 떼지를 못했어요. 어쩌죠? 화요일 내로 드리면 안 될까요?”

 등본에는 모친과 초등학생 정도의 남자아이가 등재돼 있었다.

 “원하시는 대출액이 얼마예요?”

 “3천만 원을 받고 싶어요.”

 “거래하는 은행에 알아보니 두세 곳에서 가능할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작고 얇은 입술이 가냘프게 떨렸다.

 “대출을 받은 후에 어떻게 갚으실 계획이세요? 소개하는 저희도 책임이 있어서….”

 어느새 동수의 멘트를 따라하고 있었다. 이 의도적인 물음은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다.

 “저는 피아노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요. 근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온종일 렛슨이 힘들어요. 그러다 마침 제가 바라던 피아노 교습소가 나왔는데 돈이 부족해 대출을 받으려고요. 다행히 동네 학부모님들을 많이 알아서 원생 모집에는 어려움이 없을 거 같아요.”

 “실례지만 한 가지 여쭤도 될까요?”

 “뭔데요?”

 불안감이 그녀의 표정에 나타났다.

 “개인적인 사정이란 걸 알 수 있을까요?”

 “꼭 말을 해야 하나요? 대출과 관계있는 건가요?”

 “아, 아니에요. 말씀하기 곤란하면 괜찮아요.”

 현우는 손사래를 치며 머쓱해졌다. 아차 싶었으나 이미 늦었다. 역시나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은 오버였다.

 지금까지 해 오던 방식대로 설명에 들어갔다. 그녀는 보통 손님들과 다르게 대출 이자, 상환 방법 등을 꼼꼼히 물었다. 현우는 급히 둘러대느라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세 곳의 은행을 말했을 때 갑자기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중 한 곳은 힘들 거예요. 전에 그 은행에 대출 보증을 선 적이 있었는데 다 갚지를 못했거든요.”

 “그러면 다른 은행으로 알아볼게요.”

 이제는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식사하셨어요?”

 “네?”

 현우는 말을 뱉고야 자기가 엉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은연중에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식사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까지 그녀와 함께 있고픈 감정을.

 “커피 잘 마셨습니다.”

 “수혜 씨! 다음 주에 뵙는 것으로 알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녀가 떠나니 라일락 향기도 사라졌다. 오직 탁자에 놓인 분홍색 립스틱 자국 종이컵만이 그녀의 흔적을 보여 주었다. 현우는 여분의 선불폰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자신의 선견지명에 스스로 감격했다. 그녀의 등본을 가방에 넣었다. 이로써 최수혜는 이 사무실을 방문도 상담한 적도 없다. 오로지 현우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내던졌다. 몸이 욕조 바닥으로 미끄러지며 얼굴이 수면 아래로 잠겼다.

 “수혜! 그녀는 나의 영원한 아군이 될 거야.”

 이때만도 그녀와의 인연이 운명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현우였다.

 

12월 16일 (일)

 

“희현 씨, 그동안 잘 지냈어요? 아직 가게 나가려면 시간이 좀 있지요? 오늘 식사를 대접하려고요.”

이어 그는 다른 선불폰을 손에 쥐었다.

 “시영 씨, 나 수현 오빠. 컨디션은 괜찮아요? 어제 인사도 못하고 나와서 미안해요. 조만간에 밥 살게요. 앞으로 이 번호로 연락해요.”

 현우는 이제부터 아군이 필요했다. 이 작업은 혼자서 불가능하다. 희현과 시영, 수혜는 확고한 협력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작업이 끝나서도 자신이 공범이었다는 것을 결코 알아서는 안 된다. 수혜와 통화 내역은 사무실 유선전화에 딱 두 번이 남아 있다.

 하루 평균 30여 건의 상담 전화가 온다. 그러면 디데이까지 500여 통의 전화번호가 쌓인다. 

 수사기관에서 통화 내역 전부를 조사할 수 있다. 그들에게 이건 식은 죽 먹기다.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수천 대 차량과 수만 명의 지문을 조회하는 것이 이들의 일이며 사명이다. 물론 나름대로 수사 노하우가 있어 일반인이 생각하는 만큼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는 않는다. 

 또 500여 건 중 여러 번 통화한 사람을 의심하여 그 번호를 선별하여 단서를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런데 두 번을 통화한 번호는 단순 상담 전화로 간주하여 넘어갈 수 있다. 왜냐면 손님이 처음 건 전화와 현우가 예상 대출 금액을 알려주겠다며 연락을 했기에 두 번의 통화 기록은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혜가 포함된다. 

 만약 경찰이 수혜를 조사한다 해도 사실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녀도 현우의 신상에 대해 모를 뿐더러 선불폰으로 통화해서다. 

 또한 작업이 끝나면 어차피 그녀들과 연락이 끊긴다. 단지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이왕이면 그녀들에게 첫 이미지 그대로 남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다. 그런데 이때까지만도 작업에 이용하려는 그녀들 중 수혜가 빠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는 동인과 싸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수가 고수를, 초짜가 달인을, 아마추어가 프로를 뛰어넘어야 한다. 

 월요일부터 적과 동침하면서 전투를 해야 한다. 자신과 희현, 시영, 수혜. 상대는 동인, 동수, 사채 사무실 네 곳. 4대 6의 혈투가 시작된다. 아니, 4대 7이다. 하나는 수사기관이다. 그런데 그의 아군은 하나같이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어리며 연약한 여자들이다. 게다가 그녀들에게 직접 명령도 내릴 수 없는 처지이다. 그러므로 현우는 심사숙고하고 작전을 짜야 한다. 

 이제 디데이가 11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창가에 기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나는 너희에게 생명수가 아니라 독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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