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8일 (화)
사무실의 분위기는 아침부터 어수선했다. 사무실에서 수령해야 할 3개의 봉투와 개인적으로 보낸 3개의 봉투를 밖에서 가져와야 했기 때문이다. 동수는 봉투를 받기 위해 이미 허위 장소로 출발했다. 한 사무실에서 모든 봉투를 받으면 도착지가 같아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먼저 도착한 서울금융의 봉투를 열어보았다. 역시 비밀번호는 0248이며, 입금 은행은 C은행이었다.
다음은 대양의 봉투였다. 통장을 꺼내는 동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통장은 W은행으로 5억 원이 찍혀 있었고, 잔액은 0원이었다. W은행은 처음 보냈던 은행으로, 다섯 번째 시도 끝에 마침내 같은 은행이 다시 등장했다. 그러나 W은행이 주거래 은행이라고 아직 단정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동수가 가져올 통장을 보면 더 명확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려금융의 봉투가 도착했다. 아이디는 K560302, 비밀번호는 1217이었다. 문제는 아이디였다. 어제 의뢰한 김두영의 주민번호는 560302-1324530, 휴대폰 번호는 010-9808-3503이었다. 아이디는 주민번호의 앞자리를 순서대로 사용한 것이었다. 이로써 고려의 다섯 개 아이디는 모두 불규칙하게 나타났다. 이렇게 되면 디데이에 각기 다른 아이디로 다섯 번을 입력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도 단언할 수 없는 것이 여섯 번째 아이디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어서였다.
현우는 머리가 아팠고, 동인도 어이가 없는지 연신 담배를 피웠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현수 형, 고려 작업은 여기서 그만두는 게 어떨까요? 아무래도 수수료만 낭비하는 것 같아요.”
현우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동수가 봉투 3개를 들고 들어왔다. 동인은 급히 대양의 봉투를 뜯었다. 그들의 모든 신경은 입금 은행에 집중되었다. 통장은 W은행이었다.
“대양은 이제 확실해요. 주거래 은행이 W은행인 게 분명해요.”
동인은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고, 설명을 덧붙였다.
“개인이 의뢰한 경우는 업자보다 더 안전하다고 판단해, 작은 잔고증명이라도 주거래 은행에 입금한 것이죠. 업자의 것은 고액일 때만 그 은행에 실적을 쌓아준 거예요. 대양은 자체적으로 규칙을 정해 은행을 돌린 거죠. 결국 현수 형의 논리가 들어맞았어요.”
그는 현우에게 윙크를 보냈다.
서울금융의 봉투를 열었다. 통장은 C은행이고 비밀번호는 0248이었다. 순간 서로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다음으로 고려의 봉투에서 통장을 꺼낸 동인의 손에는 힘이 없었다. 아이디는 P601210, 비밀번호는 1217으로, P는 성이 PARK인 사람의 P와 주민번호 앞자리 숫자였다. 사무실에서 보낸 것과 같은 구조로 아이디를 만들었다. 이로써 동일한 규칙은 전혀 없었다.
동인은 속내를 숨기려 했지만,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현우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들어간 수수료가 얼마이며, 무엇보다도 10억이라는 거금이 눈앞에서 사라져서였다. 한동안 냉기가 감돌았다.
현우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고려에 한 번만 더 보내면 안 될까요? 사무실과 개인으로 각각 하나씩.”
“형, 가능할까요?”
“장담은 못 하지만 내일 오는 아이디를 보고 진행 여부를 판단하면 좋겠어.”
“음… 그럼, 그렇게 하죠.”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던 동인이 순순히 나왔다. 그만큼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현우가 이렇게 제안한 데는 나름의 추론이 있었다. 고려가 비밀번호를 날짜에 맞춘 것처럼 아이디도 일주일 간격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아이디는 다섯 번 바뀌었다. 그러면 내일은 일주일 전에 사용한 주민번호 앞자리를 거꾸로 나열한 아이디가 다시 내려올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해야 그들도 기억나지 않거나 헷갈릴 때를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확신이 섰지만, 말을 삼켰다.
처음에는 경험이 많은 동인에게 선의의 경쟁심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에게서 감정의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대양 작업은 하루 이틀 후, 고액의 잔고증명을 의뢰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서울금융도 재확인을 위해 하나의 서류만 보내기로 했다. 비록 대양, 고려, 서울의 정보를 완벽히 파악했더라도, 디데이를 앞당길 수는 없었다. 수일금융 작업에 필요한 바지를 아직 구하지 못해서였다.
오후 상담 방문객은 회사 택시를 운전하는 중년 남성과 그의 친구였다. 남자는 특히 강한 악센트로 말해 기억에 남았다. 남자는 서류를 건네며 친구에게 빨리 꺼내라고 하며 옆구리를 툭툭 쳤다. 현우는 이 모습을 보고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대화의 흐름으로 보아 그들은 친구 같았지만, 주종관계처럼 보였다. 남자는 회사 사주의 갑질과 노사 문제를 언급하며, 빈부 격차를 해결하지 않으면 복지국가의 실현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현우는 그의 현실적인 시각과 비판에 마치 유명 강사의 강의를 듣는 듯했다.
“요즘은 사납금 채우기도 버거워요. 중·고등학생인 두 아이 뒷바라지에 등이 휠 정도죠.”
그는 자신의 수입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겨우 유지할 뿐, 아내가 아이들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 택시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요. 근데 다행히 개인택시를 인수할 기회가 생겼어요. 친척들에게 돈을 빌리고도 번호판값에서 4천만 원이 부족해, 대출을 받으러 왔습니다.”
남자는 가난의 대물림을 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고, 자신의 힘든 삶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다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친구도 비슷한 처지라 함께 대출을 받으러 왔다고 덧붙였다.
처음에 현우는 남자가 친구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여 불편하게 느꼈지만, 서로의 대화 방식이 다를 뿐 우정이 깊은 것 같았다.
“뭐 해? 빨리 은행에 가야지.”
남자가 벌떡 일어나 친구를 잡아끌며 문으로 향했다. 친구는 마치 사형장의 죄수처럼 끌려 나가더니, 곧 서로 어깨동무를 했다.
현우는 적과 동침하고 있는 자신과 두 사람을 비교하고는 부러움을 느꼈다.
“명의대여자 광고를 보고 전화하셨다고요?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이야기해요. 1번 출구 쪽에 커피숍이 있으니 거기서 뵙죠.”
동인은 몇 가지 서류를 가방에 넣고 부리나케 나갔다.
현우는 명의대여자 광고에 대한 전화가 많이 와서 내심 당황스러웠다. 오히려 동인이 그들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데 고민할 정도였다. 그래서 현우는 모집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옷걸이에 걸린 어깨걸이 가방을 바라보았다. 그 안의 휴대폰에는 자신의 광고를 본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쌓이고 있을 것이다. 궁금증이 폭발할 듯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현장이 들켜서는 절대 안 된다. 한순간의 감정이 억제되지 않으면 지금까지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 아니, 자신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돌아온 동인은 돈을 인출할 여자가 믿음이 가지 않는다며 투덜거렸다.
현우는 그의 불만을 들으며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더구나 그는 명의대여자와 직접 대면하거나 대화한 적이 없다. 잘못하면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침착하고 빈틈없이 준비해야 한다. 다행히 상대방이 여자라는 점과 자신의 명의를 빌려줄 만큼 생활이 궁핍한 약자라는 점이 위안이 되었다.
퇴근 후, 현우는 그들이 길 건너편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의 잠금장치를 누르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인터넷 바둑 게임 사이트에 접속해 한 대국 장면에 고정했다. 만약 그들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문이 잠긴 상태에서 현우가 있다면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사무실에는 작업에 필요한 모든 서류와 정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작은 실수가 나중에 큰 후폭풍을 불러올 수 있다. 그 후폭풍이란 작업을 한 사람이 바로 자신임이 발각된다는 것이다.
"너희와 헤어지자마자 친구에게 연락이 왔어. 이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남아서 바둑을 관전하며 기다리고 있어."
이렇게 둘러대면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다섯 개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 첫 번째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의대여자 광고 보고 전화하신 분이세요?”
“네, 그런데 명의대여자가 뭐예요?”
“저희 회사가 사정이 있어 전화하신 분의 명의로 통장을 잠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광고에 고수익 보장이라고 적혀 있는데, 얼마나 주는 건가요?”
순간 현우는 금액에 대해 고민했다. 만일 상대방이 경찰의 함정 수사라면 제시하는 액수가 지나치게 높으면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일반인이라도 너무 큰 금액은 불법이나 위험한 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적으면 흥미를 잃을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말해야 했다.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하루에 50만 원 정도입니다. 물론 수고비는 당일 현금으로 지급됩니다. 그리고 일은 꾸준히 있습니다.”
사실 그는 최고 100만 원과 최저 30만 원 사이에서 갈등했다. 100만 원은 고액이고 30만 원은 다소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50만 원을 적정가로 판단하고 일이 계속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
상대방은 며칠만 일해도 몇백만 원은 거뜬히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찰 것이다. 역시나 예상대로 그녀는 진짜냐고 거듭 물으며 관심을 보였다.
“제가 낮에는 바빠서 시간을 내기 힘든데, 저녁이나 주말은 괜찮을까요?”
“저는 언제든지 괜찮아요. 꼭 연락을 주세요.”
현우는 의도적으로 돈 인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여자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적어 지갑에 넣었다. 휴대폰에도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만, 분실에 대비한 이중 장치였다.
두 번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다가 소리샘의 멘트가 나왔다.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사람은 왠지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 번호는 삭제했다. 나머지 여자들은 현우가 제시한 조건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로써 그는 4명의 명의 대여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최종 선택은 미팅 후에 결정할 예정이다.
현우는 명함을 인쇄하기 위해 서둘러 을지로로 향했다. 명함을 만드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신뢰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작업이 끝난 후 이 여자들은 경찰 조사를 받게 된다. 그때 이들에게 준 명함이 경찰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상담했던 손님들과는 다른 이름과 휴대폰 번호가 적힌 두 장의 명함이 발견된다. 게다가 두 곳에서의 용의자 인상착의가 전혀 다른 인물로 나타난다. 이 계획은 이미 세워 났다. 경찰은 혼란에 빠지고, 이 과정에는 동인과 동수도 포함된다. 모두는 제3의 범인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