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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Aug 30. 2024

바지의 등장 - 1

 12월 20일 (목)


 “명의대여자 광고를 보고 전화했다고요? 1번 출구로 나오면 커피숍이 있어요. 1시간 후에 거기서 만나지요.”

 “바지야?”

 동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몇 명의 남자를 면접 봤지만 나이, 인상, 믿음 등의 이유로 퇴짜를 놓곤 했다. 그런데 방금 통화한 사람은 마음에 든 모양이다.

 “동인아, 여자 네 명으로 40억 찾기가 벅차지 않을까?”

 동수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처음에 현우도 이 문제가 걱정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등을 돌린 마당에 스스로 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 해결책을 준비해 놓았다.

 가끔 매스컴에서 뇌물 사건을 보도하며 사과 박스에 만 원권 지폐로 2억 정도를 담을 수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현우는 지금껏 2억의 현금을 보거나 만진 적이 없기에 그 부피나 무게를 상상만 할 뿐이다. 과연 동인에게 어떤 대답이 나올까를 기대하며 잠자코 있었다. 그의 계획을 들음으로 자신의 생각과 비교하여 허점을 발견하려는 의도였다.

 “먼저 은행들이 밀집한 장소를 선택해야겠지. 이동 거리를 최소화해야 시간을 줄일 수 있으니까. 이 장소는 강남에 있고 각기 다른 은행 8개가 포진해 있어.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벌써 답사도 다녀왔지. 40억이니까 한 은행에서 5억씩 인출해 오전에 끝내는 거야. 혹시 현금 부족을 대비해 전날 각 은행에다 내일 5억을 찾을 예정이라고 하면 인출에는 문제가 없지. 다음에 2억 5천만 원씩을 이체 통장으로 입금하고 4개 은행을 돌라고 하는 거야. 한 번에 5억을 찾으면 의심받을 수 있거든.”

 “돈을 찾은 후에 운반은 어떻게 할 건데?”

 현우가 묻고 싶었던 것을 동수가 대신했다.

 “8개 은행 중간 지점에서 돈을 받아 차에 실으면 돼. 우리 인원으로는 16번이나 은행 출입할 여자들을 따라다니며 돈을 옮긴다는 건 불가능해.”

 ‘짝짝짝!’

 “인천상륙작전만큼 완벽한 전략이야. 맥아더 장군 나셨네!”

 “아주 그림이 좋아. 작품이 되겠어.”

 동수가 박수를 치며 그를 향해 엄지 척을 날렸다. 현우도 따라 추켜세웠다.

 “만일 여자들이 돈을 갖고 튀면 어떡하지?”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나한테 맡겨.”

 그의 단호한 말에 동수의 입이 쑥 들어갔다.

 현우는 그의 작전에서 몇 가지 오류를 발견했다. 첫째는, 한 은행에서 돈을 인출해 차까지 도착하는 시간을 동인은 40분 정도로 잡았다. 12월 말은 대부분 회사나 가정의 결산이 집중되어 은행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또 현금으로 2천만 원 이상을 찾으면 그 용도를 기재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그 시간을 더해야 한다.

 두 번째는, 현금 2억 5천만 원의 무게를 감안해야 한다. 만 원짜리 지폐는 약 1g이다. 2억 5천만 원이면 25kg이다. 여자가 들기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이다. 차까지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몇 번은 쉬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동인이 배분한 40분은 부족하다. 시간이 촉박하다 보면 서두르게 되고 무리수가 따른다. 이 무리수가 치명적인 실수를 일으킬 수 있다. 이 실수의 결과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세 번째는, 신규 통장으로 2억 5천만 원의 거액을 한 번에 현찰로 찾는다는 것은 은행의 의심을 받을 소지가 크다. 이런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것도 잔액을 0원으로 남기고. 

 동인의 방식대로라면 보이스 피싱으로 간주되어 은행에서 신고할 수 있다. 요즘 은행 직원의 세심한 대처로 이와 유사한 사건의 피해를 예방했다는 뉴스가 종종 나오지 않는가! 그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래서 현우는 명의대여자들에게 기존 통장을 요구한 것이다.

 

 사무실 밖에서 몇 번의 기침 소리가 났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과 한쪽 다리를 저는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동인이 머리를 흔들면서 나갔다. 이 사인은 작업 손님으로 받지 말라는 신호이다. 노인은 후줄근한 양복 차림이지만 인상이 인자했다.

 “원하시는 대출금이 얼마에요?”

 “재봉틀을 사고 작업장을 공사하려면 3천만 원 정도는 필요해요.”

 “재봉틀을 사다니요?”

 생소한 용어에 현우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우리는 파랑새 집에 있어요.”

 남자는 말할 때마다 얼굴의 근육이 일그러졌다.

 “이 친구가 말하는 파랑새 집은 장애로 인한 차별로 자립하지 못하는 이들의 직장이자 보금자리입니다. 모두 한두 가지 장애를 갖고 있지요. 손을 쓰지 못하는 사람도 말을 못 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아픔만은 공통적으로 갖고 있죠.”

 “파랑새 집은 어떤 곳인데요?”

 “이곳은 20여 명이 성직자의 의류와 병원의 환자복을 만들고 있지요. 언뜻 보면 단순한 수작업 생산품이지만 물품 하나하나에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이들의 의지와 눈물이 배어 있어요.”

 “우리가 몸이 불편해 작업이 늦어도 재촉하지 않고 배려해 주시는 다니엘 시설장님께 늘 감사드려요.”

 남자의 말로 미루어 시설장은 직책이고 다니엘은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인 것 같았다.

 “저희 작업장은 낡은 상가주택 지하에 있지요. 장애인 보호법상의 혜택을 받으려면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는 시설을 갖춰야 하는데 공사할 여력이 없어요. 남들은 ‘얼마나 어려운 시설이 많은데 그래도 여기는 자립장이고 돈도 벌지 않느냐’고 말하지요. 그래서 기부 지원을 받기가 쉽지 않아요.”

 노인은 신부나 수도사가 아닌 평신도로서 시설을 맡다 보니 일부 신자들은 그가 돈을 벌기 위해 운영하는 거라며 오해한다는 것이다. 

 “파랑새 집은 한때 문을 닫기도 했지만 제가 다시 열었지요. 그나마 인맥을 활용하여 성당과 몇 개의 병원에 고정적으로 납품하는 길이 생겼어요. 저희는 장애인들이라 1시간에 서너 개밖에 만들 수 없어요. 근데 노후화된 재봉틀을 바꾸고 작업장 공사를 하면 지금보다 많이 생산할 수 있지요. 이 물품은 단가가 낮아 큰 수익이 없지만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노동의 즐거움과 장애를 이겨 낼 수 있다는 자심감을 심어 주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봐요.”

 인생의 황혼기에 장애인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하는 노인의 마음에 현우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남자는 절뚝거리면서도 오히려 노인을 부축해 나갔다.

 “이곳마저 문을 닫는다면 이 친구들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습니다.” 

 귓가에 내린 서리와 쭈굴한 주름의 노인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 

 순간 현우는 그에게서 키다리 아저씨와 큰 바위 얼굴이 연상되어 위대해 보였다.  


<정의의 슈킹 2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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