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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의 등장 - 1

by 이인철

12월 20일 (목)


"명의대여자 광고를 보고 전화하셨나요? 1번 출구로 나오면 커피숍이 있으니 1시간 후에,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바지야?”

동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러 남자들을 면접했지만, 나이, 인상, 신뢰성 등의 이유로 퇴짜를 놓았다. 그러나 이번에 통화한 상대방은 느낌이 좋았다.

“동인아, 여자 네 명이 40억을 찾는 게 힘들지 않을까?”

동수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에는 현우도 이 문제에 대해 걱정했었지만, 이젠 그들과의 관계가 틀어졌으니 직접 해결책을 모색해야 했다. 따라서 자신만의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가끔 뉴스에서 뇌물 사건을 보도하며 사과 상자에 만 원권 지폐로 2억 원 정도를 담을 수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현우는 지금까지 2억 원의 현금을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어서 그 부피나 무게를 상상만 할 뿐이었다. 동인이 어떤 대답을 할지 기대하며 잠자코 있었다. 그의 구상을 듣고 자기의 생각과 비교해 허점을 찾으려는 의도였다.

“먼저 은행들이 밀집한 장소를 선택해야겠지. 이동 거리를 최소화해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니까. 이 장소는 강남에 있고, 서로 다른 8개의 은행이 있어.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이미 답사도 다녀왔어. 40억이니까 한 은행에서 5억씩 인출해서 오전에 끝내는 거야. 혹시 현금이 부족할 경우를 대비해 전날 각 은행에 내일 5억을 찾을 예정이라고 미리 말하면 인출에는 문제가 없겠지. 그다음에 2억 5천만 원씩 이체 통장으로 입금하고 4개 은행을 돌게 하는 거야. 한 번에 5억을 찾으면 의심받을 수 있으니까.”

“돈을 찾은 후에는 어떻게 운반할 건데?”

현우가 묻고 싶었던 것을 동수가 대신 물었다.

“8개 은행의 중간 지점에서 돈을 받아서 차에 실으면 돼. 우리 인원으로는 16번이나 은행에 출입할 여자들을 따라다니며 돈을 옮기는 건 불가능해.”

‘짝짝짝!’

“인천상륙작전만큼 완벽한 전략이야. 맥아더 장군이 나셨네!”

“아주 멋진 그림이야. 작품이 될 것 같아.”

동수가 박수를 보내며 그를 향해 엄지척을 날렸다. 현우도 따라 추켜세웠다.

“만일 여자들이 돈을 갖고 튀면 어떡하지?”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나에게 맡겨.”

그의 단호한 말에 동수의 입이 쑥 들어갔다.

현우는 그의 계획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동인이 한 은행에서 돈을 인출해 차에 도착하는 시간을 40분으로 예상한 점이다. 12월 말은 대부분 회사와 가정이 결산하느라 은행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또한, 현금으로 2천만 원 이상을 찾을 경우 그 용도를 기재해야 하므로 추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2억 5천만 원의 현금 무게를 고려해야 한다. 만 원짜리 지폐는 약 1g이므로, 2억 5천만 원은 25kg에 해당한다. 여자가 이 정도의 무게를 들고 이동하기에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차까지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중간에 몇 번은 쉬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동인이 설정한 40분은 부족하다. 시간이 촉박해지면 서두르게 되고, 그로 인해 실수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실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세 번째는, 신규 통장에서 2억 5천만 원을 한 번에 현금으로 인출하는 것은 은행의 의심을 받을 소지가 크다. 이런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게다가 잔액을 0원으로 남기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동인의 방식대로 진행된다면, 이는 보이스 피싱으로 간주하여 은행에서 신고할 수 있다. 최근 은행 직원의 세심한 대처로 이와 유사한 사건의 피해를 예방했다는 뉴스가 종종 나온다. 그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래서 현우는 명의 대여자들에게 기존 통장을 요구했다.


사무실 밖에서 몇 차례 기침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과 한쪽 다리를 저는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동인은 머리를 흔들며 나갔고, 이는 작업 손님으로 받지 말라는 신호였다. 노인은 다소 헐렁한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인상은 온화했다.

“원하시는 대출금이 얼마인가요?”

“재봉틀을 구입하고 작업장을 수리하려면 약 3천만 원이 필요해요.”

“재봉틀을 사신다고요?”

생소한 단어에 현우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우리는 파랑새 집에서 일하고 있어요.”

남자는 말을 할 때마다 얼굴의 근육이 일그러졌다.

“이 친구가 말하는 파랑새 집은 장애로 인해 차별받는 이들의 직장과 보금자리입니다. 모두 한두 가지 장애를 가지고 있죠.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각자의 사연은 다르지만,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아픔은 공통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파랑새 집은 어떤 곳인가요?”

“이곳에서는 20여 명이 성직자의 의류와 병원 환자복을 제작하고 있죠. 단순한 수작업 제품처럼 보이지만, 각 물품에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이들의 의지와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몸이 불편해 작업이 늦어도 재촉하지 않고 배려해 주시는 다니엘 시설장님께 늘 감사드려요."

남자의 말로 미루어 보아, 시설장은 직책이고 다니엘은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인 것 같았다.

“저희 작업장은 오래된 상가주택의 지하에 위치해 있습니다. 장애인 보호법의 혜택을 받으려면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는 시설을 갖춰야 하지만, 공사할 여력이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어려운 곳이 많은데, 그래도 여기는 자립장이고 돈도 벌지 않느냐’고 말하곤 해요. 그래서 기부 지원을 받기가 쉽지 않죠.”

노인은 신부나 수도사가 아닌 평신도로서 시설을 운영하다 보니 일부 신자들은 그가 사욕을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오해한다고 말했다.

“파랑새 집은 한때 문을 닫았지만, 제가 다시 열었습니다. 힘들게 인맥을 활용해 성당과 몇몇 병원에 정기적으로 납품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요. 저희는 장애인이라 한 시간에 서너 개밖에 만들 수 없지만, 노후된 재봉틀을 교체하고 작업장 환경을 개선하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물품은 단가가 낮아 큰 수익은 없지만,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노동의 기쁨과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장애인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노인의 마음에 현우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남자는 절뚝거리면서도 오히려 노인을 부축해 나갔다.

“이곳마저 문을 닫는다면 이 친구들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노인의 귓가에 내려앉은 서리와 주름진 얼굴이 남긴 마지막 한 마디였다.

순간, 현우는 키다리 아저씨와 큰 바위 얼굴이 떠오르며 노인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정의의 슈킹 2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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