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 (금요일)
오후에 상담 예약을 한 손님이 방문했다. 한 중년 남자와 사내가 들어왔다. 남자는 온화한 인상을 주었지만, 사내는 다소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어제 전화한 조석기입니다. 이 친구는 저와 함께 일할 사람이고요.”
“김두성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내는 외모와는 달리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의 손등에는 파란 십자가 문신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현우는 사내의 몸에 새겨진 다양한 짐승 문신을 떠올리며 움찔했다.
“3천만 원이 필요한데, 저 혼자서 힘들면 이 친구도 대출을 받았으면 해서 같이 왔습니다."
현우는 대출 방법을 설명했다. 두 사람은 연신 “예”라고 대답하며 활기차게 사무실을 나갔다.
“이 친구의 통장까지 만드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그런데 대출을 받아서 무엇을 하실 건데요?”
동수가 경계의 눈빛으로 물었다. 아마도 사내의 문신을 보고 유흥비나 도박 자금 등의 용도로 짐작해서 물은 것 같았다. 아니면 동지애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실 동수도 어깨에 하트 모양의 문신이 있다. 쭈뼛거리던 조석기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얼마 전 8.15 특사로 가석방된 전과자입니다. 저는 10년 넘게 그곳에 있었고, 이 친구도 비슷한 시간을 보냈지요.”
그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괴로워하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인테리어 사업을 했었는데, 큰 부도를 맞았습니다. 돈을 받지 못한 인부들이 집으로 몰려와 행패를 부렸고, 가정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을 죽이는 죄를 저질러 12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교도소에서 자살을 시도하며 죽고 싶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두어 번 실패한 후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못난 아빠를 기다리는 딸들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잡았습니다.”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끈 그의 눈가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이후 그는 성실하게 수감 생활을 하며 건축 관련 자격증을 8개나 취득했다고 말했다.
“결국 모범수로 인정받아 가석방 혜택을 받게 되었어요. 이 친구도 같은 상황이에요. 그런데 돈이 하나도 없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더군요.”
그래서 출소 전에 취업 전담반에서 소개받은 일자리 센터를 찾아갔고, 그곳에서는 인테리어 사무실을 준비하면 센터에 등록된 기업의 일감을 제공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출을 받아 사무실과 인테리어 작업에 필요한 컴퓨터와 장비를 마련하려고 해요. 이 문제만 해결되면 센터의 일거리로 자립할 수 있을 거예요. 저와 이 친구는 경비를 아끼기 위해 사무실에서 숙식하며 생활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다 보면 분명 희망이 생길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앞으로 일할 생각을 하니 암울한 길을 돌아 긴 꿈에서 깬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일으켜 세운 가장 큰 힘은 이제 훌쩍 자란 큰딸과 중학생인 작은딸의 응원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곧 함께 살자고 굳게 손가락을 걸었다고 했다.
“어릴 때 헤어진 막내가 ‘사실 나는 아빠가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이제는 정말 좋아’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무너졌어요. 지금은 딸들을 만나는 주말이 기다려지고, '힘내 아빠!'라는 전화 한 통에 용기가 솟습니다.”
그는 붉은 눈시울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술을 활용해 집 고치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숙자 아저씨는 아동시설이나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재생 자전거를 나눠주는 재활용 활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집 고치기 봉사를 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있다. 고통받았던 이들만의 동병상련일까?
그때 현우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그가 받은 전화는 거의 명함에 적힌 대포폰이었다. 대포폰은 보통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주머니에는 실명폰이 있었다. 현우는 지인과의 통화는 사무실에서 나와 복도나 옥상에서 했다.
전화한 사람은 누나였다. 이 부근을 지나다 연락했다며 잠깐 밖에서 볼 수 있냐고 했다. 그는 누나가 일부러 온 것을 안다. 며칠 전부터 밑반찬을 만들어 놓았다며 몇 번이나 가져가라고 했지만, 그는 계속 미루고 있었다. 사무실 위치를 숨기기 위해 거리가 좀 있는 곳으로 정했는데,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동수야, 누나가 이 근처에 왔다고 하네. 잠시 다녀올 테니 상담 전화 좀 부탁해.”
동인이는 볼일이 있다며 한참 전에 사무실을 나갔다.
현우는 반가운 마음에 누나가 기다리는 커피숍으로 서둘러 갔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다니니?”
누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반찬통이 가득 담긴 쇼핑백을 건넸다. 현우는 수척해진 누나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이건 밑반찬이야. 냉장고에 넣고 먹어. 떨어지면 빨리 말해.”
“누나가 반찬 가게를 하고 싶다고 했지?”
“갑자기 왜 반찬 가게 얘기를 해?”
누나의 요리 솜씨는 일품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맛이다.
“반찬 가게를 열면 누나의 손맛으로 대박 날 거야. 100% 장담해!”
“그런 말이라도 기분은 좋네.”
“가게를 차리려면 얼마나 필요해?”
“가게 얻고 쇼케이스 등을 설치하려면 몇천만 원은 들걸? 근데 왜?”
“내가 하나 차려주려고.”
“너한테 돈이 어디 있어?”
“엊그제 꿈에서 로또에 당첨될 계시를 받았어.”
“정말? 당첨되면 좋겠다. 그 돈으로 우리 현우도 빨리 결혼해야지.”
그는 어려운 자신보다 동생을 먼저 걱정하는 누나의 마음에 울컥했다.
“회사 일은 괜찮아? 힘들지는 않니?”
“아니, 적성에도 맞고 동료들도 좋아서 만족하고 있어.”
얼마 전 현우는 중소기업 관리직에 취직했다고 둘러댔었다.
엄마의 마트가 복 사장에게 빼앗기면서 생계가 어려워졌다. 누나는 가장의 책임감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아픈 엄마를 돌보며 현우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런 누나의 헌신에 그는 보답하지 못했다.
초·중학교 시절에는 성적이 우수했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고 서클 활동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의 학업 성적에 기대어 명문대 진학을 꿈꿨지만,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는 아들로서 기울어진 가세에 도움을 주고자 취업을 시도했으나, 누나의 반대로 재수를 결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지만, 어느 날 친구의 유혹으로 간 당구장에서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매력적인 당구의 세계는 공부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고, 그는 그곳에 푹 빠져들었다. 잠들 때면 사각의 천장이 당구대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는 서툰 실력으로 쓰리 쿠션 내기 당구를 치기도 했고, 용돈이 떨어지자, 누나에게 온갓 핑계를 대며 돈을 받아냈다. 누나는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수능 총점에서 당구 점수를 제외한 성적이 나왔다.다행히도 수학의 삼각함수 문제는 모두 맞혔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는 겨우 수도권 대학에 입학했지만, 졸업 후에도 제대로 된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다. 누나는 그에게 잔소리나 원망을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더욱 미안함을 느꼈다.
‘그 중요한 시기에 왜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까!’
누나는 혼수품도 거의 없이 결혼했다. 착한 매형은 누나의 사정을 이해해 주었고, 누나는 맞벌이하며 능력이 부족한 현우를 대신해 어머니를 돌보았다.
그러던 중 매형에게 황달 증세와 체중 감소가 나타났고, 어느 날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의사는 췌장암 말기라는 충격적인 진단을 내렸다. 전셋집을 빼고 여러 차례 대수술을 받았지만, 매형은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현재 누나는 단칸방에서 남매를 키우며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고 있다. 오늘 현우는 엄마에 대한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누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이 기회에 그동안의 실망과 죄책감을 만회하려고 마음먹었다.
“시간 나면 집에 들러. 애들이 삼촌을 보고 싶다고 난리야.”
“며칠 후에 선물 잔뜩 사서 갈게.”
“선물은 무슨….”
“아니야. 이제부터 삼촌 역할을 제대로 할 거야. 두고 봐!”
그의 허풍에 누나는 미소를 지었다.
현우는 멀어지는 누나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이 맺혔다.
‘불쌍한 우리 누나….’
복받치는 아픔을 간신히 삼켰다.
“누나, 열흘만 기다려. 곧 내가 엄마를 모시고 누나에게 반찬 가게도, 집도 사 줄게. 앞으로는 장밋빛 꽃길만 펼쳐질 거야.”
그는 수십 번, 수백 번 외치고 또 외쳤다.
사무실로 들어가려던 현우는 화장실에 들르기 위해 문을 지나쳤다. 그때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귀를 문에 바짝 붙여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동인아, 이번 작업이 끝나면 현수에게 얼마나 줄 생각이야? 만약 계획대로 40억을 손에 쥐게 된다면 10억 정도는 줘야겠지?”
현우의 모든 신경이 동인의 대답에 집중되었다.
그렇고 보니 이 작업에 합류한 이후로 배당에 대해 논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현우는 슈킹 금액이 얼마인지도 몰랐고, 먼저 묻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무척 궁금했지만, 지금까지 참아왔다.
“현수 형이 고생한 만큼 평생 직장생활을 안 해도 될 정도로 충분히 보상할게요.”
동인은 이렇게 약속했었다.
“작업이 끝나고 바지 수당과 경비를 제하고 셋이서 나누었는데….”
동수가 전해준 말이었다. 이를 통해 당연히 상식선에서 배당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물론 이 상식선이란 것이 주관적이라 애매모호하지만.
“형,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동인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저번에 영민이 놈이 하는 거 못 봤어? 작업 후 배당받고 바로 잠수 탔잖아. 남은 잘해 줘 봐야 다 소용없다고! 우리도 현수 형이 필요해서 쓴 거고 그 형도 돈이 탐나서 동참한 거니까 일한 만큼만 주면 돼.”
“그럼 얼마 줄 거야?”
“40억이면 4억. 반이면 2억.”
차가운 두 마디가 떨어졌다.
“너무 적지 않아?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무슨 소리야? 이 일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비를 내가 다 부담하고 있어. 또 모든 설계와 작전을 누가 짜는데? 바로 나야. 현수 형에게는 그 돈도 엄청난 거야. 월급쟁이로는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금액이니까. 솔직히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해. 글구 가만 안 있으면 어떡할 건데? 어차피 한배를 탔는데 나발 불어서 자기 무덤을 팔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야? 배당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형은 입을 조심해. 알겠어?”
끄덕이는 동수의 머리가 문틈으로 반쯤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