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네와 R네 부부는 우리 가족과 오랜 기간 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이다. Q아빠, R아빠, 그리고 아내는 회사 동기들이다. 모두 약 10년 전에 현재의 배우자들과 결혼했고, 그 이후에 셋의 다른 동기들의 연이은 결혼식에서 지속적으로 마주쳤다. 식사, 기념 촬영, 결혼식 이후의 간단한 커피 자리 등에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됐다. 결국 세 쌍의 부부들은 돌아가면서 집들이를 하기로 했다. 세 차례의 집들이가 출발점이 되더니 결국 주말에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수시로 편하게 만나는 사이가 됐다. 약 10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이사, 이직, 출산 등 삶의 변화를 함께했고, 각 집의 일상까지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6명 모두 엄마와 아빠가 되면서 각자가 겪는 부모로서의 성장통도 위로받았고, 부부 생활 중에 억울하거나 답답한 일들을 털어놓고 공감해 주며 서로에게 힘이 됐다. 아내가 M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됐을 때부터 그들은 끊임없이 아내와 우리 가족의 안부를 물으며 내가 심적인 안정을 도모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나의 답답한 감정들을 대나무 숲처럼 마음 편히 토로할 곳이 있다는 것은 보험에 가입한 것처럼 든든한 일이었다. 가족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사실이나 답답함을 온전히 받아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에 참으로 감사했다.
R네는 올해 여름에 둘째를 출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전원 가능한 병원을 수소문하면서 우리 6명의 단체 카톡방에 아내의 상태를 처음 공유했던 날, R네도 산부인과에서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었다. 함께 미래를 그려나가던 뱃속의 아이가 하늘의 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아내가 아픈 상황을 급박하게 말해서 이들이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 같은 시기에 이들도 못지않은 아픔을 견뎌야 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심지어, 그날 R아빠는 우리에게 본인들도 심란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나중에 공유해 주겠다고 했는데, 아내의 전원을 알아보기에 급급해 어찌할 바를 몰라 정신이 없던 내게 그런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전원이 가능한 병원이 있는지 수소문해 주기까지 했지만, 나는 사실 그들의 슬픔에 공감해 주지 못하고 형식적인 위로만 전했을 뿐, 진심으로 위로해 주지 못하고 있었다.
R엄마와 아내는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 친구다. 아내가 G병원에 입원한 날, R엄마도 새로운 아기와 영원한 인사를 하는 수술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리고 나서 생각해 봤더니, 두 친구에게 같은 날에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게 참 묘했다. 아내가 무사히 전원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에게 전화한 R아빠는 이 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올해가 ‘삼재’라고 전해줬다.
나는 사주팔자나 기운이라는 것을 크게 믿지 않았다. 흔히 점쟁이라 일컬어지는 역술인들이 얘기하는 ‘사주팔자’ 또는 ‘신점’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쌓인 정보를 기반으로 그들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혹할 만한 이야기들을 해주고, 손님들의 환심을 사서 다시 오게끔 만드는 상술일 뿐이라고 믿었다. 우리가 역술인들을 찾아가는 것은 미래를 점치고 싶기보다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방향성을 조금이라도 제시받기 위함이다. 역술인들이 어떠한 당부를 하더라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기억나는 것들만 마음에 새길 뿐, 들은 모든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잘 살고 있다거나 잘 살 수 있다는 희망과 보증을 얻고 싶어서 시간을 내서 찾아가는 것이다.
나는 삼재나 아홉수 같은 것들은 그저 미신 정도로만 여겼다. 조선시대부터 나이의 끝수가 9인 해에는 결혼, 이사, 심지어 죽음까지 피하라는 의미로 아홉수라는 단어가 흔히 쓰였다. 언어란 사람들이 의미를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아홉수도 결국 사람들이 살다 보니 어떤 이유에서든 만들어진 개념이었을 것이다. 감히 추측해 보자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이유를 찾다가 본인에게서 찾느니 많은 사람들이 외부 요인에 귀인하다 보니, 이런 일반적인 개념이 생긴 게 아닐까. 그러다 보니 아홉수나 삼재라는 개념에 위로를 받은 사람들이 계속 쓰다 보니 통용되는 단어가 되었을 거라고 무모하게 추정해 본다. 여전히 삼재나 아홉수와 같은 전 국민 동일 연령의 위기는 믿지 않지만, 팔자나 기운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는 나의 굳은 믿음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아내가 아프기 직전에 꿈속에서 고양이가 참수당하는 것도 그렇고, 친구들에게도 똑같은 시기에 안 좋은 일들이 겹쳐서 생기는 것을 경험하면서 처음으로 이런 기운이라는 것의 존재를 인정하게 됐다. 수능 날 전국에 긴장한 수험생과 수험생 가족들로 인해서 추워진다고 하는 우스갯소리가 신빙성이 있다는 것일까. 세상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딸과 나는 Q네와 R네를 만나기 위해 병원을 나섰다. 아내가 아프기 전에 Q네 집 앞의 백화점에서 진행하는 영어 요리 문화 센터를 예약했었다. 그들은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달라고 했는데, 사실 나는 그들을 만날 자신이 없었다. 나 자신이 너무도 이기적으로 느껴져서 그들 앞에 나설 용기를 찾기 힘들었다. 아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고, 나를 가엾게 여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조건 위로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만나면 아이들끼리 놀 수 있으니 내 하루가 조금은 편해질 테지만, 당연히 아내와 R네에게 일어난 비극에 해 얘기해야 할 테고, 결국에는 슬픔 배틀을 펼칠 게 뻔했다. 그런 대결을 펼친다면 패배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만남을 갖고 싶지 않았다. 오롯이 위로받고 싶었다. 문화센터 수업에 참여하는 것도 한참 고민하다가, 아내가 일반 병실로 옮겼기에 그나마 편해진 마음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함께하기로 했다.
딸이 한숨 자는 동안 운전해서 Q네로 갔다. 주말에 이동하다 보니 도착 시간이 조금 늦어져서 R과 R엄마는 먼저 백화점으로 떠나고 딸과 나는 Q네랑 만나서 함께 백화점으로 가기로 했다. 낮잠에서 깬 딸은 졸린 눈을 비비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는데, 차에서 내릴 때부터 계속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내가 지각하는 바람에 딸의 기분을 등한시했는데, 이게 Q이네 집에 들어가서 문제가 되고 말았다. 현관에 들어선 딸은 조용히 신발을 벗더니 Q엄마, Q, R아빠랑 간단한 인사만 하고는 Q방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서는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친구의 줄넘기 실력을 보고 충격받았을 때와 유사한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나와 딸의 심리 상태를 알 수 없어 눈치를 보고 있던 어른 둘은 조심스러워하며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늦어버려서 마음이 불편했던 나는 딸에게 얼른 가자며 채근하러 방에 들어갔다. 내가 방에 진입하자 딸은 나의 핀잔이 예상되고 걱정됐는지 몸을 책장 쪽으로 획 돌리면서 내게 등을 보였다. 딸을 덩치로 압도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무릎을 꿇고 어서 출발하자고 애원하다시피 부탁했다. 둘만 있었으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딸의 마음을 읽어주려고 노력했겠지만, 남들이 문 앞에서 말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과 문화센터 시작 시간이 임박해 오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졸였던 나는 딸을 상대로 회유하기 시작했다.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얼른 가자.”
“...”
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때아닌 침묵에 이 상황이 쉬이 끝나지 않겠다는 것을 직감한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에게 눈을 내리깔면서 양해를 구했다. 사실 먼저들 가 있으라고 해도 됐을 텐데, 심란한 면회를 마치고 온 내게 그런 심적 여유 따위는 없었다. 문을 닫으며 딸과의 신경전을 준비해야 했다.
“왜 그래? 시간 다 됐는데, 얼른 가자. 오늘 가면 애플파이 만든대.”
“...”
묵묵부답이었다. 어릴 때 엄마한테 혼날 때 아무 말 없이 잔소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나와 똑 닮은 침묵이었다. 소름 돋는 싱크로율에 감탄할 틈도 없었다. 내가 다시 한번 보채듯 부탁했더니 딸은 바로 앞에 책을 가리키며 구실을 만들면서 복장 터지는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책 읽고 싶어.”
“그럼, 책 한 권만 읽고 가자.”
문밖에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 순간만큼은 이기적으로 우리 가족만을 위하기로 했다. 서두른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읽을 수 있는 속도와 톤 중에 가장 빠르게 설정해서 책 읽기를 해치웠다. 그래도, 이대로 후다닥 책만 읽고 나가면 안 될 것 같아서 한 마디만 더 하기로 했다.
“왜 그랬어?”
“아빠가 Q네 집으로 온다고 안 했잖아. 바로 백화점으로 가는 줄 알았어.”
퍼뜩 납득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과 얼른 백화점으로 이동해야 했으므로 딸의 의도를 해석할 시간 따위 없었다. 이미 문화센터 시간에 늦고도 남았기에 모두가 서둘러서 움직여야 했다. 우리는 최대한 늦지 않기 위해 R아빠가 운전해서 백화점 앞에 Q엄마, Q, 딸 그리고 나를 내려주면, R과 R엄마가 자리 잡은 문화센터 교실에 뛰어가는 작전을 짰다. 하지만, 토요일 늦은 오후의 백화점 앞 도로는 예상보다 막혔고, 점점 지체되는 시간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나는 약속 시간을 매우 중시하는데, 나로 인해 모두가 늦었다고 생각하니 몰려오는 민망함과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찌저찌 가까운 곳에 내려서 남은 거리를 Q엄마와 내가 각자 아이의 손을 잡고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래도 다행히 많이 늦지 않아서 아이 셋은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 사이, Q엄마, R엄마와 차를 한잔하면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딸의 행동에 대해서 논의했다. 과연 문자 그대로 우리가 움직일 동선을 미리 알려주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본인 평생토록 가족과 함께 참여했던 이 모임에 본인만 엄마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서 시무룩해졌는데 그 사실을 숨기려고 괜한 트집을 잡은 것일까.
40분가량의 시간밖에 없었던 우리 셋은 오랜만에 아이들 없이 우리끼리 얘기할 수 있었다. 여전히 숲속의 자욱한 안개처럼 무거운 분위기였지만, 아내가 이제는 일반 병실로 옮겼기에 지난 2주간 단체 채팅방의 무게보다는 그나마 가벼운 분위기였다.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서로 정녕 궁금하고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은 빠뜨린 채로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일부러 피하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최대한 가볍게 언급했다. 기껏 물어보는 질문들은 실제로 벌어진 일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우리는 다 함께 견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