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병원은 준공된 지 몇 년 되지 않아 병실들이 매우 깨끗했다. 1인실과 4인실로만 구성되어 있고 흔히 대학 병원 병실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바글바글한 인구 밀도와는 거리가 먼 구조였다. 특히 1인실에는 환자와 보호자만 쓸 수 있는 화장실, 세면대, 싱크대와 더불어 당연하지만, 개인 TV도 있고 넓은 창문도 있어서 채광도 우수하고 시야도 탁 트여 있었다. 넓은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빛은 고대했던 우리 가족의 재회를 함께 반겨주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엄마를 만나 내리쬐는 밝은 빛만큼이나 해맑을 것으로 생각했던 딸은, 막상 병실에 들어가 보니 그 싱그러움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어색해하며 인사 정도만 나누고 있었다. 오히려 영상 통화로 얘기할 때가 훨씬 활기찼었다.
딸이 오랜만에 만난 아내는 구급차에 타고 사라지기 전의 모습과는 현격히 달랐다. 중심도 못 잡고 비틀대던 엄마가 구급차를 타고 가더니 보름 후에 거의 다른 사람이 되었다. 헤어질 때 평상복 차림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환자복을 입은 채로 콧줄을 달고 부자연스러운 얼굴 근육 움직임으로 딸을 겨우 맞이하고 있었다. 심지어 두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 물체가 두 개로 보이는 복시까지 와서 한쪽 눈에 안대까지 끼고 있었다. 아내는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침상에 기대 누워서 혼자 힘으로 허리를 적당히 곧추세우는 것조차 힘들어서 도움이 필요했다. 눈물의 모녀 상봉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감격의 재회를 기대했는데,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내에게 와락 안길 줄 알았던 딸은 병상 옆에 서서 서먹서먹하게 아내를 바라보며 서로 가벼운 안부 정도만 묻고 있었다. 이런 아내의 모습이 무척 낯설었던 모양이다.
역시 세상과 자식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어렵게 만남의 기회를 얻어냈고 어떻게든 아내와 딸이 적극적으로 그간의 회포를 풀기 바랐는데, 각자의 이유로 쉽사리 진행되지 않았다. 아내는 장모님과 함께 일반 병실로 옮긴 이후에 몰라볼 정도로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사흘 전만 해도 단어 하나 발음하는 데도 큰 노력이 필요했는데, 오늘은 짧은 문장 정도는 어눌하게라도 구사할 수 있게 됐다. 대부분 단어 위주의 대화였고 여전히 알아들으려면 집중해야 했지만, 이제는 회복에 대한 희망을 품어도 되는 수준까지 도달한 듯했다.
반면 딸은 처음 보는 사람이 병상에 누워 있는 것처럼 아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먹는 것에 관심도 없었을 텐데, 오늘은 무려 먼저 점심때 먹기로 한 빵을 먹자며 먼저 점심 식사를 제안하면서 아내와 거리를 둘 핑계를 만드는 듯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저 가장 편해 보이는 자리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딸은 장모님에게서 받은 빵을 들고 아내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자리 잡았다. 그런 딸을 지켜보는 것은 안타깝기보다는 답답한 감정이 훨씬 컸다. 아빠라는 사람이 딸의 입장을 생각하기보다는 오직 자기 생각만 하기에 급급했다. 최근 며칠간 아내와 딸의 면회 가능성에 대해서만 고민하다 보니, 병실에서 어렵게 가진 자리가 성스럽고 아름다운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혼자 상상하고 다짐했다. 둘이 만나기만 하면 딸이 남몰래 가지고 있을 그리움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그것은 나만의 이기적인 교만이었다. 어지럽혀진 방바닥을 청소기로 밀면서 자신 있게 정리를 끝내려고 했는데, 누군가 더욱더 호기로운 표정을 지으며 전기선을 뽑아놓고 나를 보며 교활하게 웃고 있었다. 역시 뜻대로 되는 것은 많지 않았다.
스콘 하나로 조촐한 식사를 끝낸 딸은 아내와 특별한 상호 작용을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모님이나 내가 부추겨야 겨우 아내 곁으로 가서 어색하게 몇 마디 건네는 정도였다. 30분 정도나 있었을까, 장모님이 숨겨뒀던 요플레를 다 먹은 딸은 병원 구경을 가고 싶다고 하면서 혼자서 꼭대기 층 투어를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아내에게 매달려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말할 거라는 나의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졌다. 딸이 기다리고 있던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손녀딸이 혼자서 병원 탐방을 하는 게 걱정됐던 것인지, 아니면 우리 부부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려고 한 건지, 장모님은 딸과 함께 놀다 오겠다며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병상과 나란히 자리 잡고 있던 창문 앞의 보호자 벤치에 등을 대고 누워서 오랜만에 아내와 대화를 시작했다.
“기억나?”
고생했다는 당부의 말이나 일반 병실 생활이 괜찮냐는 안부보다도 지난 2주가 기억나는지를 가장 먼저 물어봤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으니 차라리 중환자실에서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아서 아팠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면 좋겠다는 헛된 욕심이 생겼다.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부담스러운 기억이 생채기처럼 남는 것보다 차라리 아예 기억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 더듬더듬 대화해 보니 안타깝게도 내가 직접 아내에게서 변화와 회복을 기대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기억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짐작건대 의식이 혼탁하거나, 진정제를 맞았을 때의 기억만 사라지고 나머지 시간은 조금씩 기억나는 것 같았다. 평생의 흉터로 남을지 걱정됐지만 이 또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서로 각자의 자리에 등을 기대고 누워서 그간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지막이 나눴다. 사실상 대부분의 발화는 나로부터 이루어졌다. 원래라면 내가 그동안 고생했다고 괜히 생색을 냈겠지만, 아내가 나보다 훨씬 두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그런 이야기들은 진폐증 걸린 사람의 폐에 쌓인 먼지처럼 내 안에 고이 머물렀다. 아내는 자기가 누워 있는 동안, 우리 가족에게 있었던 일들이 궁금한 듯한 말들을 어렵사리 했지만, 나는 말을 아끼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비밀스럽게 함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의 동요 없이 이야기할 자신도 없었고, 자칫 잘못해서 댐이 터지며 봇물 터지는 일이 생기면 갓 회복이 시작된 환자 앞에서 괜한 죄책감과 불안감을 심어줄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각자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최대한 피하는 것 같았다. 서로 힘들었는지 여부보다는 그동안 딸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한 업데이트라든지, 아내 몸 상태 등과 같은 피상적인 이야기들만 이어 나갔다. ‘중증 장애’의 두려움은 지난주보다 옅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종식되지 않고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아내의 상태를 여기저기 확인해 보니 아직 불편한 곳들 투성이었지만, 그래도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신체 부분은 없는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재활만 무사히 마치면 되는 것일까.
아내의 이빨 빠진 기억을 나의 브리핑을 통해서 조금씩 채워 넣고 있을 때쯤, 딸이 편의점에서나 살 수 있는 조잡한 장난감과 간식거리를 사서 돌아왔다. 오랜만에 손녀딸을 만난 장모님은 딸이 원하는 것들을 아낌없이 사줬다. 의기양양하게 비닐봉지에 장난감을 담아 온 딸은 여전히 아내와 거리를 유지하며 내가 다리를 치워주며 자리를 비워준 보호자 벤치 겸 침대의 가장 끝에 자리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내에게 데면데면 구는 게 안타까운 동시에 어렵게 쟁취한 면회를 낭비하는 게 괘씸하기도 해서 억지로 아내의 병상 위로 올라가 보라고 권유했다. 딸은 이내 겸연쩍어하는 표정을 짓더니 나와 비슷한 감정이었던 장모님도 함께 제안하니 못 이기는 척 신발을 벗고 슬그머니 올라갔다. 꼭 우리 집 고양이가 내가 누워 있을 때 모른척하면서 은근슬쩍 내 배 위에 올라오는 형상이랑 진배없었다.
딸이 침대에 올라가니 아내는 온몸의 힘을 다해서 딸이 그나마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몸을 일으켜 세워보면서 있는 힘껏 또박또박 어떤 장난감을 사 왔는지 물어봤다. 평소라면 묻기도 전에 알아서 술술 이야기를 풀어냈을 친구인데, 딸의 답변은 짧고 명료하기 그지없었다. 딸은 아내가 반갑기는커녕, 이 상황이 불편해 보이기만 했다. 딸은 아내의 침상에 올라가서도 끄트머리에 앉아서 묻는 말 정도에만 겨우 대답했다. 장모님이나 내가 아내 쪽으로 조금만 다가가 보라고 해야 억지로 무게 중심은 뒤로 쭉 뺀 채로 엉덩이만 겨우 질질 끌고 다가가는 정도였다. 어쩌면 당시의 딸은 아직도 본인이 평생 보고 기억했던 엄마는 아직 만나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장모님과 이번 주에 했던 재활이나 병원 생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아내와 딸은 침대에 누워서 소개팅하는 사람들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가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탓에 침대 위를 핫도그의 케첩처럼 점령하다 보니 딸은 자연스럽게 침대의 가장자리 쪽으로 몰려서 불편하게 누워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에 할 말이 많지 않았는지, 아니면 각자 정녕 하고 싶은 말들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는 것인지, 조심스러운 시간들만 계속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지겨운 티를 팍팍 내던 딸은 기어코 백기를 들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제한된 탓도 있었겠지만, 아직 완전한 회복까지 갈 길이 멀었던 아내의 존재가 어색하기만 했다. 딸에게 특별한 추억을 심어주길 바랐던 나의 시도는 아쉽게도 아내의 생존 신고 정도에만 그쳤다.
이제 아내와 장모님도 쉴 겸, 딸과 나도 얼른 짐을 챙겨서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짐을 챙겼다. 딸은 할 일을 해치웠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원하게 인사를 건네며 어렵게 진입한 병실을 나섰다. 병원을 나설 때만 해도 딸의 태도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속으로는 딸도 나름대로 안심했던 모양이다. 이날 이후로 딸은 입에 ‘엄마 보고 싶어~’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 주문처럼 외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워낙 많이 해서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전에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리움을 피력하지 않았는데,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까 아내와의 만남이 투정 부리면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는 인식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딸에게 이러한 희망을 안겨준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나는 아내를 중환자실에 입원시키면서 아내의 휴대폰을 챙겨뒀다. 연락해야 할 사람들도 많고, 어차피 아내는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려서 아내와 함께 휴대폰이 있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딸이 그랬듯 나 또한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최악의 상황에는 아내가 휴대폰을 다시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마저 있었다. 그래도 오늘 확인한 아내의 상태는 아직 손가락을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너무도 먼일이라 여겨질 정도로 태초의 몸으로 돌아가 버려서 시기상조인 것은 분명했지만, 재활만 무사히 잘 한다면 원하는 대로 자기 몸을 놀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품에 고이 모셔뒀던 아내의 휴대폰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