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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Nov 11. 2024

17-4. 이기심

참 묘한 광경이었다. 평소 같으면 엄마들만 있거나, 아빠들만 있었을 텐데 오늘은 엄마 2명과 아빠 1명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의 아이는 모두 요리 수업이 어땠는지 조잘조잘 얘기하는데 우리 딸만 시무룩해 보였다. 평소라면 다른 엄마들과 함께 있었을 아내에게 후기를 읊었을 텐데, 오늘은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아빠랑 얘기해야 하는 딸이 괜스레 풀 죽은 것으로 보였다. 빵빵한 백팩에 딸이 수업에 사용한 앞치마와 토시를 욱여넣고 애플파이까지 넣을 자리가 없어 손에 들고 가야 하는 내 자신이 안타까워서 딸까지 애처로워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우리 딸의 엄마이자 아빠가 되어야 했다.


백화점에서 나온 우리는 날씨도 좋고, 차 한 대에 우겨서 타기에 인원이 많기도 해서 Q네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백화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Q네 집에 금방 도달하였다. 집에 올라가니 Q아빠와 R아빠가 Q동생과 놀고 있었다. 그들의 완전체 가족을 보니 가족원의 빈자리가 뜬금없이 크게 느껴졌다. 원래라면 내가 여기에 있고, 아내가 다른 엄마들과 백화점을 다녀왔을 거라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섭섭하기까지 했다. 낮에 부쩍 좋아진 아내를 확인하고 왔기에, 우리 가족이 언젠가 다시 하나가 될 거라 굳게 믿었지만, 그날이 너무 늦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 한숨 돌리니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저녁은 아이들도 좋아하지만, 특히나 입맛 까다로운 딸이 선호하는 메뉴를 고려하여 아웃백을 먹기로 했다. 한 달에 얼마씩 모으는 계비로 결제하니 메뉴 선정은 시원시원했고, 넉넉한 양의 음식이 집 앞까지 신속하게 배달되었다. 아이 네 명과 함께 먹는 식사는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딸이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이기까지 해주는 다른 엄마를 보고 아내를 떠올리는 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딸의 곁을 철저하게 지켰다는 것이다.


식사 후에 무수히 나온 재활용 쓰레기를 처리하러 나갈 겸, 나와 다른 아빠들이 잠시 산책을 다녀오기로 했다. 아직 봄이 찾아오려면 시간이 남았는지 해가 져버린 밤공기는 여전히 서늘했다. Q이네 집은 한강 근처라 조금만 걸어 나가도 서울에 있는 다수의 한강 공원 중 한 군데에 손쉽게 닿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없으니 비교적 편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아내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미래가 걱정되고 불안했다면, 일반 병실로 옮긴 지금은 딸이 가장 측은했다. Y네 집에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안타까웠던 딸의 눈빛을 전달해 줬더니, 그들도 나와 같은 아빠들이었기에 깊이 공감해 줬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뾰족한 대안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그 어떠한 존재도 아내의 빈자리를 메워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고맙게도 엄마 없이 아이들과 아빠들만의 시간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만 하라고 했다.


하지만, 한없이 감사한 그들의 제안에 나는 끝끝내 답신하지 못할 것 같았다. Q, R와 딸의 유치원 친구들에게는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우리 모임은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엄마 셋, 아빠 셋이 자연스러운 형태였는데, 갑자기 아내가 사라져 버렸다. 습관과 루틴이 중요한 딸이라면 엄마가 빠진 이 모임의 묘한 어긋남쯤은 충분히 알아챌 것이고, 그 불편함은 얼마든지 딸의 슬픔을 자아낼 것 같았다. 딸이 괜히 우울해질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들을 만나는 것은 아빠로서 내리기 힘든 결정이 될 것만 같았다. 얼른 완전체로 돌아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염없이 한강 공원의 산책로를 걸으며 R아빠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그가 얼마나 둘째를 원했는지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 상실감의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연신 어쩔 수 없고 금방 괜찮아질 거라는 말만 되뇔 뿐이었다. 적절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나는 그저 힘내라는 형식적인 말밖에 전하지 못했다. 나는 아내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희망이라도 있지, R네는 이미 영원한 이별이 끝난 후였다. 서로 만신창이면서 누가 누굴 위로하는 것인가. 제 앞가림이나 잘 하자.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빠른 귀가를 요청하는 전화가 쏟아지기 시작했기에 간단한 산책을 마친 우리는 다시 엄마들과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들어갔더니 엄마들이 나를 붙잡고 딸이 나의 귀가 여부와 시점을 지속적으로 확인했다고 알려줬다. 평소라면 친구들과 잘 놀고 있었을 짧은 시간인데 아내가 사라진 딸에게는 이제 내가 세상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딸이 나로 인해 추가적인 불안감을 얻게 되는 것을 가장 피하고 싶었다다. 한동안 딸이 나의 껌딱지가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딸의 껌딱지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딸이 불안한 만큼 나 또한 두려웠다.


나와 아내는 딸이 영상을 보는 것에 대해서 다른 부모들보다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언젠가부터 많은 부모들에게 아이들이 TV나 기타 영상 매체를 오래 보는 것이 민감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찬반 여론이 생긴다는 것만 감안하더라도 아이들의 영상 시청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딸에게 평일에는 유치원 등원 전과 저녁 먹기 전, 주말에도 비교적 자유롭게 영상을 보여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고 있다. 나와 아내는 딸이 기본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통제력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딸도 문제가 될 정도로 영상 시청에 집착한 적이 없다. 물론, 휴대폰이나 패드를 이용한 외부에서의 영상 시청은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식사 자리에서도 당연히 영상 시청은 물론, 휴대폰 사용도 최대한 제한된다. 어른이고 아이고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칙이다. 가족이 함께 오손도손 식사 자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어른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식사하고 싶은 마음에 아이의 눈앞에 영상을 켜놓고 아이의 입에 음식을 밀어 넣고 있는 장면을 보면 괜스레 불편하고 안타깝다.


Q엄마, 아빠는 나와 아내보다도 강력한 영상 시청 규제 정책을 펼치는 집이다. 어디까지나 그들과 우리의 생각이 다를 뿐이다. 그런 그들이 작은 방에 아이들이 영상을 볼 수 있도록 세팅을 해줬다. 돌이 갓 지난 갓난아기조차도 함께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엄청난 배려였다. 나와 R네를 위한 배려였겠지만, 나는 나를 위한 배려라고 여기고 싶었다.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격동의 3월에 대한 후기들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R네의 이야기를 먼저 들었다. 사실 내가 정신없는 사이에 R네와 Q네는 그 모든 과정을 공유했던 것 같았다. 내가 아내를 중환자실에 입원시키는 동안, 그들도 많은 일들을 겪었었다. 특별할 것 없었던 정기 검진에서 불길한 징조가 보이더니, 이상을 알아차린 의료진이 뱃속의 아기와 이별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때가 되면 당연히 만날 거라 여겼던 보석 같은 아이를 뜻하지 않게 너무 이르게 만나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동시에 믿기지 않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우리에게 하소연할 기회는 내가 아내의 투병 소식을 전하면서 선수 치는 바람에 뺏겨버렸다. 심지어 수술 중에 사고까지 겹쳐서 재수술까지 했다. 이 일련의 일들이 며칠 동안 펼쳐지는 바람에 슬픔과 절망이 휘몰아쳤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Q네에게는 새로운 소식이 아니었기에 거의 내가 R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그동안 단체 채팅방에 Q엄마가 거의 매일 같이 나의 안부를 챙기고 물어봤기에 우리 가족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그들에게 미지의 영역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모든 말이 조심스러웠는지, 채팅방에서 혹시 새로 발견된 사실이나 아내의 회복이 있었는지 물어보는 정도의 질문이 전부였다. 웃음을 잃은 나는 마른오징어처럼 건조해져 버려 딱딱해진 답변들만 늘어놓기 일쑤였고, 그들도 추가적인 질문은 최대한 아꼈다. 불안한 감정들까지 채팅 내용에 굳이 담고 싶지 않았다. 그들도 딸과 나의 안부가 걱정되어 만나서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그들을 만나면 내가 더욱 슬퍼할 것 같다고 섣부른 접근은 시도하지 않았다고 했다. 배려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보이는데, 나를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 그들이 택한 존중이었다. 아내가 일반 병실로 옮긴 뒤가 되어서야 그들 앞에 얼굴을 들이밀 일말의 용기가 생겼기에 오늘이 되어서야 출몰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나는 그동안 메신저 너머로는 차마 건넬 수 없었던 감정들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내가 더 괴로워하지 않도록 나의 안부를 챙겨 물었던 그들에게 궁금할 만한 것들을 묻기 전에 소상히 대답해 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급격하게 진전되는 아내의 병세를 보고 있는 당혹감, 이런저런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난감함, 엄마를 잃은 딸아이를 보고 있는 참혹함. 아내를 G병원에 입원시키고 온 그날 밤, 한 치 앞도 모르고 있을 딸을 보고 있던 나의 끔찍한 절망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혼자가 아닌 곳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아내가 일반 병실로 옮겨서 이제는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들의 감정적 동요는 크지 않았다. 아니면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못내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여전히 비운의 주인공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아프기는 아내가 아픈데, 대접은 내가 받고 싶었다.


일전에 아내의 집안 식구들과 모여 김장을 한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절인 배추를 옮기고, 김칫소를 버무리고, 통에 담는 단순노동 작업이 계속되다 보니, 둘러앉은 식구들 간에 별의별 이야기들이 오갔다. 우리 부부의 결혼 생활부터 세상의 갖갖은 이슈들까지 다양한 주제들이 거론되었는데 수많은 화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기심에 대한 대화였다. 사람은 과연 이기적인 존재인인가. 딴에는 똑똑한 사위로 보이고 싶었던 나는 하찮은 대답으로 의견 피력을 회피했다.


“이기심은 시대가 정의하는 것 같습니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정말 한 끗 차이다. 집단주의 사상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개인주의는 비사회적인 인간들의 행동 양식이고 지양되어야 하는 소양으로 치부되곤 했다. 지금은 개인주의적인 행동이라고 여겨질 행동을 하는 사람이 예전에는 이기적이라는 핀잔을 듣기 딱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개인 영역이 확장되면서 각자에 대한 존중이 대두되고, 예전에 주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건넸을 충고들이 오히려 오지랖의 영역에 분류되기 시작했다.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고통을 아름답게 울리는 탄식으로 견뎌내십시오. 당신과 가까운 존재가 멀게만 느껴진다고 했는데, 이는 당신의 주변이 점차 넓어진다는 뜻입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강민경 역, 이음문고, 2020, 50~51쪽


대학생 때 읽었던 문구다. 당시에 읽었을 때는 해당 내용이 인상적이기만 했지, 피부로 직접 와닿은 적은 없었지만, 이제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사람은 한없이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다. 그리고 그만큼 이기적이다. 나이가 들면서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호불호라는 것이 생기고, 중요하게 지켜야 할 것들이 확고해진다. 가치관이 공고해지는 만큼 나의 영역이 깊게 뿌리 내린다. 예전에 개인의 생각들을 무시하고 억제하길 강요받았다면, 혼자서 누릴 수 있는 생활 양식들이 다양해지고 그 범위가 보장받기 시작하면서 개인의 영역은 점차 넓어지고 있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에게서 당연히 보일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아내가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고 미래가 불투명했을 때, 우리 가족의 상황을 들은 사람들로부터 갖은 연락이 왔다. 연락을 준 그들에게 나는 우리 가족의 절박함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같은 이해 선상에 있다고 믿었다. 섣불리 그들도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절박할 거라 생각했지만, 믿음이 클수록 실망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한 번씩 접속했던 인스타그램에서 묵직한 답답함만 안고 황급히 도망 나오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안타까움의 카톡을 하며 나와 같은 마음을 공유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에 본인의 찬란한 행복을 불특정 다수와 나누고 있었다.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을 자랑하고, 점심으로는 무엇을 먹었는지 보여주고,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으로 놀러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내 휴대폰 화면을 채웠고, 불과 10분 전까지 나와 우리 가족의 슬픔을 나누던 사람인가 싶을 정도의 의구심이 들었다. 편협한 사고의 틀에 갇힌 나는 심지어 잠시나마 그들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수시로 아내의 상태가 어떤지 묻기도 했다. 진짜로 아내를 걱정해서 묻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질문들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 내 마음속에 상당히 큰 파동을 일으키곤 했다. 애정 어린 질문들이 보고를 바라는 상관의 명령처럼 들려왔다. 가끔 나는 아내의 상태에 대한 소소한 그들의 불안감을 환자의 배우자인 나를 통해서 해소하고자 한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이기적인 악인으로 보였던 적도 있다. 다른 이들에 대한 타협의 폭이 협소해지니 내가 남들에게 기대하는 모습도 그만큼 세밀해졌고, 결국 그 기대는 혼자만의 실망의 단초를 제공할 뿐, 나의 하루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다. 서서히 지인들과의 연락과 인스타그램 접속도 줄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분명 연락을 주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았었는데, 오히려 사람들과의 연락을 줄이니 내 자신에 집중할 수 있고, 색안경을 통해서 봤을 때 거슬릴 정도로 어긋나 보이는 남들의 언행에 상처받는 일도 줄었다.


아마 J형 이외에 육성으로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사람들은 Q네와 R네 가족이 유일할 것이다. 그리고, 공유의 깊이는 결국 회사 사람인 J형과 나눈 그것보다도 훨씬 깊었다. 아주 오랜만에 대면의 상호작용을 했더니 그동안 원망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보던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든 필요하면 시간을 내주겠다고 제안하던 아빠들이나, 나를 배려하여 나와 함께 가슴으로 울어주던 엄마들도 그들만의 방법으로 우리 가족을 응원해 주고 있었다.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요구한 적도 없는 방법으로 나를 위로해 주지 않는다고 남들을 원망하는 것만큼 불합리한 행태가 또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그 순간의 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이기심의 극치란, 남들이 이기적이지 않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무언가를 당연히 받을 자격이 부여된 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얻지 못한다고 성낼 권리조차 없었는데, 오히려 서운해하고 화를 내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사람들 간의 감정의 깊이와 위로하는 방식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어야만 수많은 부정적인 에너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간만에 모여서 수다를 떨었더니 한동안 억눌려 있던 다양한 감정의 해소를 만끽할 수 있었다. 폭죽놀이와는 현저하게 다른 밝기와 온도의 온정이었다. 손발이 얼도록 추운 한겨울밤에 아랫목이 뜨끈하게 데워진 방의 이불 안에 들어가서 몸을 녹이듯, 잔뜩 얼어있는 몸을 천천히 녹일 수 있는 온화함이었다. 당장은 타오르는 모닥불의 뜨거움보다는 시시해 보일 수 있지만, 이런 따스함이 해가 뜨기 전까지 내 몸의 온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추위에 떨며 얼어 있었던 나를 전자레인지에 잠시나마 해동하듯 약간의 따스함을 전해준 친구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했다. 없는 것들을 원망하지 않고 가진 것들에 감사할 수 있는 밤이 되길 바라며, 오늘 밤도 딸과 단둘이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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