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G병원에 입원한 날, 대학 동창인 Z의 부친상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당연히 갈 수 없었던 나는 E를 통해 조의금을 전달하면서 마음을 전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루 만에 이렇게 많은 일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잔인했다. 많은 사람들이 겪는 사건들이 그날만 유독 내 주위 사람들에게 몰려서 일어난 것일까. 스테로이드 투약 이후에 아내가 회복의 기미를 처음 보였을 때였다. 장례식 이후에 주변 정리가 끝난 Z에게서 감사의 말을 전하는 카카오톡이 왔다. 먼저 Z의 연락을 받고 나니, 내가 먼저 위로의 말을 전해야 했는데, 별도의 인사도 전하지 않았던 나 자신을 반성했다. 물론, 내 나름의 충분한 사정이 있었지만, 기본적인 사람 구실을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다. 아내가 아프다는 말은 차마 먼저 하지 못하고 그저 ‘곤란한 상황’이 있다는 정도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놨더니, Z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물었다.
항상 위로에 목말라 있던 나는 별일 아니라는 이야기를 건네는 대신, Z의 가벼운 질문에 비해 훨씬 무거운 이야기를 던졌다. 대뜸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 중환자실에 있고, 자가면역뇌염이 의심되는 중한 희귀병에 걸렸다는 것까지 알려줬다. Z의 입장에서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려다가 비보의 쓰나미에 휩쓸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식의 답례를 건넨 것은 어쩔 수 없이 슬픔을 공유하고 위로를 해줘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만드는 매우 이기적인 행태였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Z는 이미 내 상황을 너무도 잘 이해하는 상황의 사람이었다. 갑작스레 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Z는 전화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글자의 나열만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자가면역뇌염이 뇌신경 손상에 의한 질환이라는 것을 알게 된 Z는 급격한 동질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Z 아버님은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두어 달가량 투병 생활을 하다가 유명을 달리했다고 했다. 어쩌면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지인 중에서 서로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난 이후에 여유를 되찾은 Z에게 점심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오랜만에 만난 탓에 어색할 법도 했는데, 잔인한 공통점이 생긴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예의상 각자의 회사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본격적으로 서로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일화들을 얘기해 주는데, 처음으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과 육성으로 대화하니 기묘한 반가움을 맞이했다. Z의 아버지는 발병 이후에 서울 외곽에 있는 병원에 있었는데, Z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점심시간에 직장에서 병원까지 왕복으로 운전해서 오가는 생활을 했었다. 훨씬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도 한동안 그런 생활을 했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육체적인 수고스러움도 분명 크지만, 타인들의 시선도 떨칠 수 없는 부담이었다. 주먹으로 맞는 일방적인 폭력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모기에 뜯기는 따끔함 정도의 불편함은 항상 존재했다. 처음에는 우리 가족과 나를 안타까워하던 사람들도 아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게 당연한 사실로 여겼고, 내가 그 환자의 보호자인 것도 점점 일상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의 고통 지수는 여전히 비슷한 수준이었음에도 타인들의 공감 지수는 발병 소식에 정점을 찍고 점차 내려오고 있었다. 나에게는 특별했던 사건이지만 남들에게는 그저 또 다른 하루일 뿐이었다. Z도 이런 감정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비록 일과시간을 조금은 갉아먹어야 하더라도 당연히 아버지에게 다녀오라고 하던 사람들이 따로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투병 기간이 길어지면서 충분히 눈치가 보이는 상황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환자의 상태가 변한 게 없는데도, 보호자들의 입지는 지속적으로 좁아지고 부담만 늘어갔다. 잔인하게도 주위 사람들의 일상은 바뀐 게 거의 없기에, 우리에게 계속 배려를 제공해 주기 어렵다는 것은 알았으나, 한 번씩 진정한 공감이 필요할 때도 형식적인 위로만 해주는 것이 못내 아쉬울 때가 많았다.
그 와중에 환자까지 신경 써야 하는 보호자의 상황을 전적으로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난 우리 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간의 고충을 늘어놨다. 때때로 드는 가족과 지인들에 대한 서운함, 환자가 좋아졌으면 하는 간절함은 그 자리에 놓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자평했다. 단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나는 회복을 원하는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지만 Z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감의 힘이란 생각보다 컸다.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던 때, 동일한 처지에 놓여본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 되었다. 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귀하다는 것을 오랜만에 통감했다. 우리가 동호회나 동아리에 가입하는 심리랑 비슷한 것 같다. 나의 관심사를 친구들과 함께 즐길 수 있으면 너무도 좋겠지만, 관심 없는 친구의 선호를 바꾸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이 유사한 친구를 사귀는 게 훨씬 유용할 테니까 말이다.
아내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네이버의 뇌질환 환우 모임 카페에 가입했다. 처음 들어보는 병이 생소했기에 조금의 정보라도 얻고자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찾아갔다. 이 카페는 25만 명 이상의 회원 수를 보유하고 있어서 믿음이 갔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입 인사 글을 게시하고 등업 절차를 밟았다. 으레 올리는 다른 가입 인사 글을 작성하기 위해 다양한 글들을 참고삼아 읽어봤더니, 대부분 작성자나 작성자의 가족이 걸린 질병을 소개하는 분위기였다. 안타깝게도 뇌질환의 특성상 보호자들이 작성한 글이 훨씬 많았다. 나도 분위기에 맞춰서 아내의 진단명과 함께 소개 글을 남겼다.
‘아내가 자가면역뇌염 진단을 받고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업 요건을 맞추기 위한 다른 회원들의 형식적인 답변들과 함께 진심 어린 위로도 몇 개 달렸다. 면역 글로불린을 맞으면 호전된다거나, 본인의 가족원도 몇 주째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있으니 함께 힘내자는 등의 내용이었다. 대부분 힘내라는 내용이 많았다. 갓 가입한 회원의 의미 없는 게시글에 이렇게 정성 어린 관심을 가지는 게 신기했다. 일반적인 카페의 인사 글에는 형식적인 인사들만 오가기 마련인데, 비록 2~3줄의 짤막한 글이긴 하지만 내 글을 정독하고 반응해 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묘했다. 동병상련의 사람끼리 가질 수 있는 결속력에서 오는 위로였다.
카페의 글들을 보면 몸에 이상을 느끼고 제 발로 병원에 찾아가서 자가면역뇌염 판정을 받고 진료를 받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아내가 중환자실에 있었던 기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혼수상태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처음 가입하고 나서 후자의 경우에 대한 후기를 읽다가 부정적인 생각만 하게 되는 바람에 아내가 일반 병실로 옮기기 전까지 한동안 접속할 수 없었다. 희망을 얻기보다는 경과가 좋지 않은 환자들 이야기를 접하다 보니 점점 몸과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아 자연스레 피하게 됐다.
아내가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나서 다시 한번 카페의 후기들을 살펴보게 됐다. 절박한 마음에 안 좋은 상황의 사람들이 글을 올린 경우가 더 많겠지만, 적어도 글을 올린 사람들 중에서 많은 경우에 아내보다 오랜 기간 중환자실에서 고생한 것 같았다. 아내 병의 경과를 봤을 때, 그 깊이는 꽤 깊었을지 모르나 카페에 공유된 여러 케이스와 비교하여 기간은 짧은 편이었다. 완전한 재활이 가능한지, 가능하다고 하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으나, 다른 환자들보다 고생한 기간이 짧았다고 생각하니 비겁하게도 감사함 마저 들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생각보다 쉽게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겪게 되니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감사함이 커졌다. 아내는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당연하게 할 수 있었던 일들을 지금은 전혀 할 수 없게 되었다. 화장실을 가는 것, 몸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심지어 목을 가누는 것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때가 게 추억이 되었으며,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도 어려워서 안대를 끼고 있어야 그나마 덜 어지럽고, 귀로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도 불편한 지경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재활을 통해서 원상복구가 될 기회가 생긴 것에 감사해야 했다. 모르는 곳에서 우리가 어렵게 얻은 이 기회만이라도 주어지길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들을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
직접 겪기 전까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예전에 몸의 한쪽이 불편해서 남들보다 걸음이 느린 사람들을 보면 별생각 없이 옆으로 빠르게 지나쳐 갔는데, 아내가 재활을 시작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들도 기나긴 재활을 거쳐서 겨우 이 정도의 상태까지 왔을 거라는 지레짐작을 할 수 있게 된다. 전혀 보이지 않았을 것들이 이제는 형광펜으로 칠해 놓은 것처럼 잘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도 자칫하면 그들과 비슷한 처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여전히 불안했지만, 빠른 반등에 감사하며 좋은 점만 생각하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