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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학교 가자 20화

#20. 마지막 이야기

by Elia

연이는 더 이상 학교 가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가끔 학교 가는 게 싫은 때도 있었지만....

집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겨졌던 자신이 어느 날부터인가 남동생이 태어나고부터 그게 아니었다.

유치원에 들어가는 시기부터 연이는 집 아닌 바깥이 무서웠다.

시끄러운 아이들, 내 옷과 머리, 가방을 만지는 애들이 싫다며 울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그 장소가 싫어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엄마가 사라진 것이다.

연이에게는 그게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다.


분리불안장애는 12세 미만 아동에게 흔히 발생하는 불안장애로, 부모나 애착 대상과 떨어지는 것에 대한 과도한 불안이 특징이다.

이 장애는 주로 7~8세에 많이 나타나고, 전체 아동의 약 4%가 겪는다고 한다.

원인으로는 부모의 과잉보호, 불안정한 애착, 가족 내 불안 장애 등이 있으며, 치료로는 인지 행동 치료, 놀이 치료, 심한 경우 약물치료가 필요할 수 다고 전문가는 말한다.

특히 부모의 양육 태도와 아이의 기질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엄마가 불안을 지혜롭게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는 엄마를 모델 삼아 자신의 불안을 조금 더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다.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한다.


연이의 학교 이야기는 저자가 겪은 유년기 경험이다. 그때 느꼈던 두려움은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저자의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당시에는 전문적인 아동심리치료사나 소아정신건강의학과, 정신건강의학과 등이 전문화, 세분화되어 있지 않았다.

다행히도 어린아이의 마음도 아픈 곳도 잘 돌봐주시던 소아과 선생님을 만난 게 연이의 가족에게도 연이에게도 큰 행운일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긴장이 극에 달했을때 응급처치법, 가족들이 해야 할 행동, 문제 해결을 위해 순차적으로 처리해야 할 대안을 알려주셨다.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는 처음에는 어른들이 잡아 주었다. 그 횟수를 점차 줄이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내가 탄 자전거에 보조바퀴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런데도 넘어질까 무섭고 힘들었다.

힘들 때는 힘이 되는 대상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것이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항상 지켜 봐 주는 천사를 보내 주었다는 이야기도 해 주기도 했다.

자신감을 갖는데 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언젠가 본인 스스로 연습할 수 있도록 어른이 손을 서서히 놓아주어야 한다. 끝까지 손을 놓치 않는 과잉보호는 아이를 막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어른들은 보조바퀴를 떼어버린다. 스스로 균형 잡기까지 개인차는 있다.

보통의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의 보호 아래 몇 번 연습하다 자기 힘으로 달리다가 속도를 내며 스피드를 즐긴다.

하지만 분리 불안의 아이에게는 그 보조바퀴 달려있고 다리를 뻗으면 발이 땅에 닿을 수 있는 아동용 자전거인데도 마치 대용량 모터가 달린 오토바이처럼 느껴진다. 넘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타고 있는 것이 무섭다.

아이는 보호해 주는 대상을 찾기 마련이다.

새로운 환경에 조금씩 노출됨으로 자신이 나아가고 있음을 아주 아주 서서히 느끼게 된다.

자기 다리로 달려 나가야 앞으로 나갈 수 있음을 스스로 알게 해야 한다.

의지할 대상은 자기 자신임을 연습을 해야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빠르고 상상을 초월할 수 없는 속도로 변화한다. 이 속도에 맞춰 살아가기란 그야말로 적자생존이다.

인간이기 이전에 아이는 한'사람'이다.

모두가 다 같이 생산되어 나온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물건이 아니다.


내 아이가 늦다고 제대로 쫓아가지 못한다고 안달하고 급한 건 대부분 부모일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믿고 아이가 부모를 믿을 수 있는 연대 관계가 없이는 분리불안의 아이는 등원, 등교를 거부할 것이다.

저자의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항상 저자에게 어릴 적부터 한 말이 있다.

" 엄마는 항상 네 편이야. 네 친구야. 힘들고 어려운 일 일이 있으면 엄마한테 말해."

결론은 특별히 없다. 엄마가 이래라저래라 문제의 해결책을 지시 내린 기억이 거의 없다.

그저 곁에서 조용히 들어주고 안아주고 했을 뿐이다. 엄마는 치료사도 의사도 전문가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내 엄마다.


학교는 배우기 위한 곳이다.

공부만을 가르치는 장소가 아니다.

사람이 되기 위한 장소 모인 아이들이 모두 하나같 수 없다.

학교가 무섭고 아이들이 싫었던 연이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캠퍼스를 사랑하게 되었고, 친구들과 배움을 같이하였고, 좀 더 나은 배움을 찾고자 세상 밖으로 나갔고, 어른이 되어 나이가 들어도 모든 일상이 배움이라 느낀다.

대부분의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좋은 대학을 나와 안정된 직업을 얻어 노후까지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제는 병든 이를 도와주는 의료계 학과마저 미달이 나온다고 들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사람, 경제적 이득이 높은 고소득층의 직업을 위한 훈련소가 되어 가는 교육현장에서 다름은 결코 사회가 요구하는 요소가 아니다.


어느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아들은 산수를 못했어요. 나눗셈하면 맨날 다 틀려와요.

그런데 같은 학년 애들 중엔 벌써 미분, 적분을 척척해내요. 그 애들은 이미 대학을 준비하고 있는 거죠.

그럼 우리 애도 안 되는 산수 붙잡고 학원 보냈어야 할까요?

아직 몸도 안 푼, 준비 운동 시작인 아이를 올림픽에 내보낼 생각들 마세요. 남이 한다고 해야 하는 그걸 해서 그 경쟁에 이길 확률은 거의 희박해요.

보세요. 올림픽에 나간 그 수많은 세계에서 온 대표 선수들이 다 메달 따고 자기 나라 가는 거 아니잖아요.

정말 타고난 실력과 노력으로 매진한 단 한 사람 만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겁니다.

아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부모님이 잘 관찰하세요.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뭘 좋아하는지 찾아보세요. "


어릴 때 경험이 어른이 되어도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뜨거운 주전자는 만지면 손을 덴다는 것을 말 한마디로 주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기심에 만져봐 화상을 입은 후에야 알아차리는 사람, 주의가 부족해 혹은 우연한 사고로 위험성을 인지하는 경우도 있다.

작은 우주가 성장해 커다란 우주를 이루듯 한 사람의 가진 능력이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그 지식과 지혜가 내부에서 팽창할 것인가 정체될 것인가 소멸될 것인가가 결정된다고 본다.


연이 같은 아이가 조금씩 점차 자기 힘으로 학교에 갈 수 있도록 주위 환경에서 조금만 도움을 준다면 대상에 두려움은 점차 사라지고 즐거움으로 바뀐다.

어느 순간, 세상의 또 다른 연이들은 자신에게 마법을 거는 말을 할 것이다.

" 연아, 학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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