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티(Lemon Tea)
학부 졸업 학기를 앞두고 방송, 공연 무대 음악에 참가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국악기와 컴퓨터 음악, 서양악기를 함께 이용하는 작업은 여느 협업이 그렇듯 악기 연주자들의 구성이 중요했다.
악기의 음색뿐 아니라 각 파트 연주자의 성향이 전체적인 조화가 맞지 않으면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결이 맞는 이들이 주요 멤버였다.
작품을 의도에 맞게 작업한 후에도 문제였다.
계약시 정한 날짜, 금액이 약속대로 되지 않는 일이 예술계에는 허다하다.
부탁받은 입장에서 열심히 했어도 패이(작업료)에 대한 언급을 하면 감사의 인사는 커녕 돈에 영혼을 팔았다는 악성 루머까지 무대 뒤에서 돌았다.
말을 고급지게 포장해서 그렇지, 어린 것들이 돈 맛을 알아버렸다 라는 뜻이다.
한국의 모 유명 방송국 드라마 녹음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소위 잘나가는 작곡 프로듀서의 녹음을 일부 하게 되었다. 맡은 분량의 녹음이 끝났지만 작업료 수급 문제가 몇달 째 지연되 작곡가에게 전화 드렸다.
오랜만이라며 넌지시 차기 작업을 언급하길래, 통화 용건을 조심스레 꺼내니, 불쾌하다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잠시 후 그 작곡자의 보조 작업하는 친구가 사실과 왜곡된 말들을 전화로 내게 늘어 놓았다.
너희 같은 애들은 이 바닥에서 더이상 필요 없다는 식의 말과 다음 작업은 절대 없을 거라 했다고.
말의 폭력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때 우리 연주 팀은 대학로의 '학전'소극장에서 다른 연극 연출가 작품의 음악 파트에 참가중이었다.
최종 리허설을 마치고 관중석을 바라 보고 앉아 있는데, 극장 오기 전 그 통화가 머릿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억울한 감정 조절이 안됐다.
팀은 사실을 모르는 채 공연 준비에 분주한데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30여분 후면 무대가 시작한다.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고 억울함에 목이 메었다.
' 우왓, 여기서 이러면 안 돼.'
머릿속이 하얗게 된 것 같았다.
서둘러 분장실 계단 뒤로 뛰어가 혼자 울었다.
시간도 잊었다.
누가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내 손에 따뜻한 온기가 조용히 느껴졌다.
" 마셔봐요."
적당한 온도.
손에 쥐어준 컵에서 레몬 향이 은은히 퍼져 나왔다. 한 모금을 머금자마자 달콤함과 상큼함이 뒤섞여 마음 한구석을 녹이는 듯했다.
창피해서 그 사람이 누군지 얼굴도 안 보고, 눈감고 벌컥벌컥 마셨다.
'괜찮아질 거야'
속삭이는 작은 위로였다.
레몬티를 다 마시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사방이 온통 검은색인 소극장...
" 공연 시작 10분 전입니다!"
스테프가 시작 준비를 알렸다.
무대는 실수 없이 마칠 수 있었다.
연극 보러온 후배에게 그 사실을 건너서 들은 팀원들은 펄쩍뛰며 화를 냈다.
다시는 그 사람(놈) 작업 같이 안 한다고, 고생했다며 위로해줬다.
" 앞으로 음악을 돈으로 아는 사람 건 하지 말자."
멤버 중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음악의 가치를 인정받은 그 친구는 아직도 한국에서 음악가의 길을 걷고 있다.
눈이 펑펑 쏟아지다 비로 변해, 굳은 땅덩이를 녹인다. 봄의 전주를 알린다.
건조한 봄의 기운은 겨울의 마름과는 다르게 생명의 습윤을 담고 있다.
노란 병아리 같은 봄.
티 보다 커피에 길들여진 입맛이지만 밖에서 집중력이 떨어지면 레몬티를 마셔본다.
음...이건 비타민이야...
가을이 끝날 무렵에는 레몬청을 만들어 냉장고에 쟁여두었다가 레몬티를 예쁜 잔에 만들어 보기도한다.
한 모금 마시면 가끔 떠오른다.
오래전 일이지만.
음료를 건네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 따뜻한 손길은 누구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