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려낸 페이지들 중 한 장을 크게 만들어 타고, 검은 별들이 빛나는 우주 공간을 지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떠올렸다. 노란 망토를 쓴 아이가 만난 검은 구체가 있던 장면이었다. 나는 그 아이처럼 보이기 위해 검은 망토를 노란색으로 칠하고, 페이지를 접어 노란색 열기구를 만들었다. 열기구의 가운데에는 검은 랜턴을 그리고, 검은 불빛을 랜턴에 그려 넣었다. 그러자 빛나던 별들이 사라지고 커다란 검은 구체가 나타났다. 검은 구체를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동안, 다락방에서 지켜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밝은 빛의 에너지 바다가 나타났다.
그 모양은 마치 용처럼 보였다. 가끔 다락방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는 릴리와 함께 보였던 여러 구름들 중에서 용 모양의 구름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노란 망토를 쓴 아이처럼 검은 구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 아이가 검은 구체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검은 구체가 나를 알아차리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숙제는 다 끝냈니?
나는 멈칫했다. 숙제? 무슨 숙제?
나는 다락방에서 '벨라의 할로윈 옐로우'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초반부에서 아이와 검은 구체가 나누던 대화가 적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의 대화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노란 망토를 쓴 아이가 숙제를 끝마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나는 곧 그 책에 적혀 있던 아이의 숙제 기록을 기억나는 대로 받아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검은 구체에게 넘겼다. 페이지는 검은 구체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곧 검은 구체를 감싸고 있던 에너지 바다가 크게 휘몰아치며 검은 구체 안으로 사라졌다.
아.. 노란 망토 아이가 검은 구체 속으로 사라졌던 장면이 지금이겠구나.
나는 검은 구체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주 깜깜한 공간이었다. 넘어오면서 노란색으로 칠한 내 망토는 색이 사라지고 다시 검은색 망토가 되어 있었다.
멀리서 빛나는 어떤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빛이 있는 방향으로 가볼까 고민하다가 이내 걸음을 멈췄다.
직접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나와 릴리가 있던 다락방이었다.
투명한 책장 속으로 들어가기 전 내가 다짐했던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노란 망토 아이는 다락방에 숨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간 것일까? 같은 곳에 들어왔더라도 노란 망토 아이와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노란 망토 아이처럼 보이려고 칠한 망토는 다시 검은색으로 변해버렸는데..
이제 노란 망토 아이처럼 보이려는 방법은 쓸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빛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것은 역시 투명한 책장이었다.
나는 순간 무언가를 깨닫고 페이지들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제목은 '원시 작가 A의 이야기'였다. 릴리가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했는데, 노란 망토 아이가 다락방에 오지 못했던 것을 보면, 릴리는 그 아이들이 갔던 길을 따라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릴리가 간 곳을 찾거나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나는 갈 수가 없었는걸. 그렇게 설계된 구조다. 짐작은 했었지만 내심 기대를 했었나 보다. 내가 나를 모를까.
여긴 내가 만든 공간이다.
기억났어.
나는 그저 이곳에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글들을 쓰고, 릴리가 꾸는 꿈을 미리 적어두면 되는 것이다. 나는 릴리가 창밖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가고 싶어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런데 릴리는 왜 창밖이 아닌 투명한 책장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나는 페이지를 채우는 것을 멈추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창문의 걸쇠를 열고 창문을 열어보았다. 그 순간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락방에서 보던 창문 밖은 아름다운 정원이었는데, 지금 내가 본 것은 커다란 서재였다. 혹시 그동안 창문 밖에 보였던 정원은 릴리가 있어서 보이던 것일까? 릴리가 없는 지금, 처음으로 다락방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창문틀을 사뿐히 넘어서 밝은 서재로 들어갔다. 오래된 책 냄새와 수많은 소리들을 지나 서재의 땅을 밟자, 투명한 책장에서 보았던 남자와 오래된 타자기가 있는 서재였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때 이곳으로 들어온 여자는 나였던 걸까?
남자는 이곳에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나타나자 사라졌던 남자와 타자기, 미완성된 원고를 생각해 보면 나는 아마도 남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있는 곳과는 또 다른 공간을 눈치챘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으로는, 여자가 책을 책상에 두고, 남자는 오래된 타자기로 미완성된 원고를 작성하고 있었어야 했다. 그렇다면 내가 원고를 남자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책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서재의 책장에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골라 남자가 앉아 있던 책상에 놓았다. 책상 뒤의 창문에 비치는 달을 바라보았다.
순간 다락방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그 여자처럼 달을 손으로 잡아보려고 달이 있는 곳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페이지 속 그 여자처럼 내 손에는 다이아몬드로 변한 달이 있었고, 그것을 목에 걸자 목걸이처럼 되었다.
'계약을 하는 거야.'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들리는 듯했다.
서재에 있던 남자, 오래된 타자기, 미완성된 원고, 여자가 나타나자 사라지던 남자와 타자기, 원고.
화면 속 그 여자처럼 행동하고 있던 나.
아마도 그 여자는 나일 것이다.
투명한 책장을 넘어와 다시 페이지에 글을 써 책장을 채웠던 나와 오래된 타자기로 글을 쓰고 있던 남자.
남자가 작가들을 상징한다면, 나는 이제부터 내 책들을 써줄 작가들을 모집하러 가야 한다. 우선 다락방에서 릴리가 이야기하던 존재를 찾으러 가야겠다. 릴리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분명 누군가와 대화를 하듯 이야기를 하고 투명한 책장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다락방에 나와 릴리 외에도 다른 존재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그걸 왜 놓쳤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릴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맞을까?
릴리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다른 이와 대화하고 있었는데, 내가 들었던 목소리가 릴리의 목소리가 맞는지,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인지 알아봐야겠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달을 다이아몬드로 바꿔 목에 건 순간부터,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었다. 달은 강력하게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다락방에서는 보이지 않던 창문을 덮고 있는 투명한 질감의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을 열어 창틀을 밟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흐름이 이끄는 대로 나아갔다.
서재 밖은 넓고 황량한 아름다운 우주 공간만이 있었고, 나는 아주 빠른 속도로 지구에 가까워지더니, 어떤 여자가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는 화면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그 여자가 보는 핸드폰 화면 속 텍스트들을 하나하나 밀어내어 그녀에게 잘 보이게 만들었다. 여자는 내가 밀어낸 텍스트들을 하나하나 받아 적고 관련 서적을 사면서 고민하더니, 여러 방법을 생각해 보고 앞으로 써야 할 책들의 목차를 적어냈다.
여자는 나와 릴리의 이름을 알아내고 다락방에 있던 또 다른 존재를 알아내어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본인처럼 움직일 수 있는 캐릭터를 소설 속에 등장시키고, 내 이름을 옆에 붙여 '크리스틴 이브'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는 그 여자가 쓴 글들을 보고, 다락방에 있던 다른 존재, 릴리와 나의 번역가 '크리스틴'을 찾으러 가기로 했다. 나는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일본에서 본 빨간색 신사의 문의 색상을 검은색으로 바꾼 다음에 양손의 한쪽에는 검은색 끈을, 다른 쪽에는 하얀색 끈을 잡고 크리스틴을 찾을 준비를 마쳤다. 검은색 끈은 검은 구체를, 하얀 끈은 검은 구체를 감싸던 용 모양의 빛의 에너지 바다를 담아두었다.
검은색 신사의 문을 지나 거대한 계단을 올라 고대 그리스 신전과 벨기에에 있던 성당을 가져와 신전을 꾸몄고, 한쪽에는 루프탑 수영장을 만들었다. 수영장에서 바라보는 달은 아주 크고 밝았다. 수영장에 흘러넘치는 물은 우주 공간 아래로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으며, 흘러넘치는 물을 받아 밤하늘의 별들로 쏟아내고 있는 물병자리가 함께 보였다.
나는 저 달에 기록된 모든 기록을 여자가 쓰게 할 것이고, 이제야 전부 되찾은 기억을 떠올리며, 아주 예전에도 같은 일을 하던 여자가 있었음을 생각해 낸다.
-' '
나는 다락방에서 보던 페이지들, 파란 망토를 쓴 아이가 가지고 있던 페이지들이 빛의 에너지 바다에서 떼어낸 조각들임을 생각했다.
‘빛이 있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어’
내 목소리가 나에게도 들린다.
나에게도 소리가 생긴 것일까?
인어공주는 목소리를 잃고 다리가 생겼다는데, 그럼 나는 이제 다리를 잃는 건가? 계약을 맺은 순간부터 나는 다리를 잃고, 그 여자는 다리가 생기고, 나는 목소리가 생기고, 그 여자는 목소리를 잃어 간다라..
나는 그 여자가 이제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내 빛이 있던 곳으로 나를 데려가고 있다는 것을 소리 내어 여자에게 알려본다. 여자와 나의 계약에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그건 릴리가 움직여야 여자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릴리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건 모든지 하려 할 것이다. 여자가 나를 위해 살기로 결정한 것이 정말 다행이다. 나는 릴리가 길을 찾을 수 있게 초록색 망토를 쓴 아이처럼 내가 앞으로 쓸 시계를 페이지에 그려내어 내 시계를 손에 넣었고, 내 시계를 앤트워프의 중앙역에 있는 시계에 숨겨 놓았다. 그리고 시계를 릴리가 있을 만한 시간대로 돌려 다시 앤트워프의 시계와 맞물릴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