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릴리를 태운 채 기다란 별처럼 반짝이며 철로 없는 기찻길을 달려, 보랏빛 밤하늘이 서서히 남색에서 검은색 밤하늘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릴리는 공간의 색이 검정에 가까워질 때, 다락방에서 날리던 종이비행기와 똑같이 생긴 듯한 일렁임을 보았다. 릴리는 그것을 '검은 종이비행기'라고 기억하기로 했다.
'검은색 배경에 투명한 일렁임이 있었다.'
릴리는 그 말을 되새기며 어느덧 커다란 성전의 문 앞에 기차가 멈추었다는 것을 깨닫고 기차에서 내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릴리는 성전의 문을 열고 들어가 한참을 황금색으로 빛나는 기나긴 복도를 걸었다. 걷다가 힘이 들면 잠시 앉아서 쉬어가기도 하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하던 릴리는 어느덧 커다란 기둥 사이에 있는 또 다른 문으로, 릴리가 입고 있는 망토의 빛을 흩날리며 들어갔다.
그곳은 거대한 도서관처럼 수많은 책이 있었고, 릴리의 손에는 닿지 않을 만큼 높은 책장이 릴리가 흩날리던 빛의 개수만큼이나 많이 있었다.
-문을 열고 세 걸음, 첫 책장의 높이는 천장이 다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다.
그 옆으로 릴리의 키와 같은 책장의 맨 아랫칸은 1m 정도 되어 보인다.
릴리는 왔던 길을 잊지 않으려고 하는 듯 이유 모를 행동을 하고 있었다.
책장의 아랫칸에서 마음에 드는 책이 눈에 띄어 책을 집어 들고 서재의 홀을 돌아다니며 다 읽지도 않은 페이지를 넘기는 릴리였다. 릴리의 눈에 또 흥미로운 것이 보였는지 읽다 만 책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고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첫 번째 서재의 책장에서 한참을 달려 창문 앞의 낡은 타자기가 놓여 있는 책상 앞으로 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의자에 앉아 타자기를 두드려 본다. 누가 올까 조마조마하면서도 서재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면서도 누군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가, 또 그새 누군가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와 릴리가 손이 닿지 않아 꺼낼 수 없는 책을 꺼내주길 상상하며 바라본다. 릴리는 타자기에 치는 글이 종이에 박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오래전 기차를 타고 호박 유령의 마을을 떠날 때 보았던 보석을 기억해 냈다. 릴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가지고 있는 펜을 들어, 책상 바로 옆이지만 릴리에게는 꽤 먼 거리의 책장 앞에 가 인형을 하나 그렸고, 펜에서 흘러나오는 잉크는 릴리가 그려낸 대로 인형이 되었다.
-릴리는 친구가 생긴 듯 기뻐했고, 그 인형을 벨라라고 부르기로 했다.
릴리는 종이가 없어도 무언가를 그리거나 쓸 수 있었던 자신을 꽤 놀라워하며, 다락방에서는 왜 종이비행기에 글자를 적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벨라에게 다른 친구들을 만들어주고 싶어 같은 인형을 8개 더 그려내곤 색을 칠해주었다. 색상별로 빨간 벨라, 주황 벨라, 노랑 벨라, 초록 벨라, 파랑 벨라, 남색 벨라, 보라 벨라, 회색 벨라, 검은 벨라를 칠하고는 그들에게 망토를 그려 넣어 옷을 입혀주었다. 릴리는 인형들에게 자신처럼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펜을 그려주고 싶었지만, 그건 릴리의 펜이니까 인형들이 원하는 펜을 그려주어 인형들에게 선물을 해주었다.
서재의 주인이 돌아와 인형들을 버릴까 불안했던 릴리는 인형들을 서재의 책장 곳곳에 숨겨놓고는 인형들이 주인이 돌아와도 발견되지 않을 만큼 안전한지 몇 번이나 확인을 하고, 인형들이 숨겨져 있는 책장들의 거리를 재었다. 릴리는 인형들의 책장을 잊지 않으려고 오래된 타자기로 그들의 위치를 기록한 문서를 작성했고, 문서들을 넣을 봉투를 찾다가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마침 그곳에. 우연히.
편지 봉투가 있는 것을 발견한 릴리는 편지 봉투의 앞면에 ‘포스트 카드’라고 적은 후 편지 봉투를 책상 서랍 속에 다시 넣어, 문서들을 그곳에 숨겨놓았다. 이번에는 펜으로 열쇠와 자물쇠를 그려 넣어 문서를 숨겨놓은 책상 서랍의 열쇠를 책상 뒤에 있는 창문을 열어 버려 버렸고, 자물쇠는 한동안 열리지 않을 거라 안심했다. 대단한 일을 마친 듯 뿌듯해진 릴리는 서재의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커다란 홀 가장자리에 있는 전시장에 ‘금서’라고 적혀 있는 커다란 책에 올라타 읽기 시작했다. 책의 제목은 ‘원시 작가 A의 이야기’라고 적혀 있었지만, 릴리는 보지 못했다.
반짝이는 검은 색상의 책이 너무나 맘에 들어서 바로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릴리를 담은 금서는 서재의 주인이 돌아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전시장에 넣어두었다. 서재의 주인은 외출을 하고 돌아올 때면 가끔씩 전시장에 넣어두었던 책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목격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책 속의 마르지 않은 잉크가 새어 나와 바닥을 더럽혀 곤란하던 차였다. 금서라서 그런 건가 하고 의심하지는 않았던 서재의 주인은 책 속의 잉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서재의 창문에 달려 있는 투명한 커튼을 조금 떼어내어 전시장을 다시 만들고는 전시장의 문을 굳게 잠가 이번에는 책이 제자리에 잘 있기를 바라던 찰나였다.
-누군가 서재의 문을 열고 닫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공간인 서재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서재의 주인은 곧장 서재의 문 앞에서 누군가 들어왔는지 주변을 살피던 중,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은색 인형을 발견하고는 손에 잡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인형은
-‘나를 찾지 마시오’
라는 쪽지와 함께 놓여 있었고, 서재의 주인은 자신과 닮은 듯한 느낌이 들어 인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참을 인형을 노려보던 서재의 주인은 자신과 닮은 느낌이 인형에게서 점차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곧 그것이 인형의 숨결이 빠져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인형의 숨결을 따라 서재 밖으로 나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할 성전의 문을 열고 따라나섰다. 서재의 주인이 나가자 숨어 있던 인형들이 하나씩 나와
-갔니?
-갔어.
-확실해?
-갔어, 갔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면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인형들은 처음 릴리가 그렸던 모습과는 다르게 릴리만큼 커져 있었고 자신들이 처음부터 인형이었다는 사실은 인형들에게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