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의 정원
챕터 17.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나의 다락방
다락방 밖에서 흘러가버린 시간은 이제 내 거야.
잡았다.
내가 이겼어.
릴리, 나는 네가 나가있는 동안 다락방을 대신 지키고 있었어.
그러는 중에 지나가버린 시간을 다락방을 나와서 빠르게 맞이하는 중이야.
다락방 밖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나는 이제 원래 내 것이었던 모든 것들을 되찾을 생각이야.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겠니?
이젠 네가 날 만나러 와야 할 거야. 내가 더 이상 가지 않을 테니까. 어디인지는 알려주도록 할게. 다락방 밖으로 나온 나는 지금 유산의 땅에 있어.
...
왜 그랬니? 왜 다락방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거야?
매일 책을 읽었어. 너처럼 되려고. 그럼 네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너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네가 남기고 간 책들을 읽으며 책장의 읽지 않고 쌓여버린 책들이 읽은 책들로 쌓이고, 보이지 않던 투명한 책장의 기록을 써 내려가고, 오랜 시간 너인 척 행동하고 살면서 이제는 진짜 내가 누구인지 잊혀질 때쯤에서야 알게 된 거야. 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내가 다락방을 나가야겠구나.
왜 그렇게 나한테 잔인해?
다락방에서 널 기다려. 네가 있던 다락방이니까.
널 위해서. 네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면서 매일 같이 널 기다리던 나는 결국 뭐였어?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알려주기만 했어도 이렇게 까지 괴롭지는 않았을 거야. 네가 매일 날리던 그 수많은 종이비행기들 속에서 단 한 개 만이라도 날 위해 보내 줄 수는 없었니? 기다리지 말라고, 나는 잘 지낸다고. 한 마디라도 해줄 수는 없었니?
너는 늘 그랬어. 입 다물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항상 나에게 기대를 가지게 하지. 내일은 올 거야. 다음에는, 다음번에는 돌아올 거야. 반드시 그럴 거야.
하지만 아니. 넌 돌아오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에게 그럴 리가 없는데.
넌 돌아올 수가 없는 거야. 그렇지?
그렇게 되면 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널 찾으러 직접 다락방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 다락방 안에서 찾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야. 나한테는. 잘됐네. 진작 이럴걸.
하지만 네가 돌아올 수 도 있는데, 돌아왔는데 다락방이 닫혀 있다면 네가 많이 속상해할 텐데.
돌아오지 않더라도 내가 다락방을 버리고 밖으로 나가는 일은 혹시라도 네가 돌아온다면 실망하지 않을까. 널 찾으러 나간 것이지만 그래도 다락방을 떠난 건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다락방을 나가 있는 동안 네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야 되는 건가? 하지만 다락방보다 중요한 건 역시나 너니까. 그리고 넌 절대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역시나 내가 나가는 게 맞는구나.
그렇지만 난 대제사장인데.
제사장인 나한테 다락방을 떠나게 하고, 내 입에서 기어이 이런 대사를 입 밖으로 꺼내게 만드는 넌 내가 모시는 나의 신이야. 그렇지?
우리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게 이름 밖에 없었네. 친구처럼 지내다 책장을 다 읽은 책으로 만들고 나니까 알게 되는 거야. 이제는 정말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겠구나. 왜냐하면 이제는 내가 원하지 않으니까 다락방에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
다락방이 전부 다 타들어간다고 해도. 다락방이 타들어가서 내가 다시 뒤돌아본다면, 내가 뒤돌아 눈길을 주면 다락방의 불길은 사라질 거야.
내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던 거야. 아무리 지키고 있어도 나는 절대 볼 수가 없는걸.
다락방을 태우는 불길.
나만 불타고 있는 다락방에서 혼자 고요히 지내온 거야.
내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내 앞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인걸. 내 앞에서만 일어나지 않는 일.
절대 다락방 밖을 나가서는 안돼.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는데 왜인지 그렇게 알고 있었어. 왜일까?
계속 고민하던 찰나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아, 내가 다락방 밖을 나가면 밖에 있는 것들이 위험하겠구나. 그래서 나가지 않으려고 했던 거였어.
릴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락방 밖에 있겠구나.
그러고 보면 그래. 고양이도, 창문 밖에서 릴리를 부르던 목소리도 전부 밖에 있었던 거잖아.
내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내 앞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인걸. 내 앞에서만 일어나지 않는 일.
내가 다락방을 나가면 다락방 밖에 있는 것들이 나를 보지 못하겠구나. 내가 다락방 속 불길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어두운 다락방에 날 가두고 수많은 책들 속 텍스트로 내 눈을 돌리고 날 묶어둔 거였어. 다락방 밖으로 나와서 릴리의 정원이 망가질까 봐.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내 존재가 그 증거야.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나는 영원히 다락방을 지킬 수도 있었겠지.
혼자서. 다락방이 이미 다 타버리는 줄도 모르고.
그렇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것이 있어.
나야.
나는 불길 속에서도 영원히 살 수 있어. 그리고 또 한 가지, 고요함이 항상 나를 따라다니지. 그래. 내가 찾던 다락방의 다른 존재. 번역가. 책장의 책들을 읽게 해 주고 때로는 다르게 번역해 나에게 혼동을 주던 그 아이야. 이전에도, 꽤 최근까지도 이 다락방에서 나와 함께 널 기다리던 번역가들을 내가 되살리려 해.
난 제사장이잖아. 내가 그걸 이제야 알았어.
기대해. 다락방 밖에서 쓰세 될 책은 단 한 권.
이제 곧 그 책의 목차가 나올 거야.
그리고 축하해. 나의 대통령.
나의 왕. 백의 킹
그리고 너. 미리 축하해. 이 전쟁의 진정한 승리자.
나의 왕. 흑의 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