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
영국에 어떤 큰 계획을 가지고 온 게 아니었기 때문에 기대나 실망도 없었지만, 막상 당혹스러웠던 건 사람들이 다 영어를 쓴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영국이니 영어를 쓰는 게 맞는데 나는 무지하게도 사람들이 한국말도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 주말의 명화에서 외국인들이 한국말로 말하는 장면에 익숙해져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 무지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지만 나는 정말 아무 준비 없이 영국에 발을 디뎠다. 그렇다고 집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기에 어학원을 다니면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언어에 대한 감각이 있었는지 영어도 금방 익힐 수 있었다.
1997년 다이애나비 장례식이 있던 9월 6일에 처음 영국에 왔다 6년 후인 2003년 9월 한국에 돌아갔다. 영국에 있으면서 나는 내가 자라온 환경이 학대였음을 인지했고 내가 살고 싶어서 대학에서 상담을 공부했다. 내가 공부한 곳은 졸업을 위해 상담을 30시간 받아야 했고 내담자 상담도 150시간 해줘야 하는 곳이어서 내 안의 상처를 보고 보듬을 수 있는 큰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다. 졸업 후 현지 회사에 취업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서 그만두고 한국으로 왔는데 부모님은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데 (지금은 취업비자로 5년이지만 당시는 2, 3년만 일하면 영주권이 나왔다) 박차고 왔다고 아깝다고 했지만 나는 영국에 미련이 없었던 것 같다. 한국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TESOL 과정을 듣고 자격증을 땄다.
한국에 와서는 틀에 박히고 규율을 따라야 하는 회사가 내게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종로에 있는 영어 학원으로 취업을 했다. 학원 강사는 자기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일종의 자영업자이기 때문에 나는 새벽, 오전, 저녁 등의 시간에 수업을 했고 낮에는 학원 근처에 있던 센터에서 취미 활동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상담 대학원을 등록해서 수업을 듣기도 했는데 나는 학문적인 것보다는 상담을 하고 받는 실용적인 부분에 끌려 공부를 시작했고 일하면서 하다 보니 졸업하는데 4년이 걸렸다.
영국에 있던 동안 나는 가족과 떨어져 있으면서 내 삶과 상처를 스스로 보듬어 왔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과 다시 가까이 살게 되면서 우리 가족의 문제들을 눈앞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술과 주사, 생활 방식 등 바꿀 수 없는 가족의 모습들이 나를 낙심하게 했다. 일하면서 소개팅이나 선 같은 것도 봤는데 그때마다 내가 느꼈던 건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결혼하게 되면 우리 집이 어떤지, 아빠나 동생은 술을 마시면 얼마나 개가 되는지, 식구들이 서로 얼마나 역기능적으로 상처를 주고받는지 다 까발려질 것 같아 움츠러들었던 것 같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하지만 그래서 남들에게 괜히 숙이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내 자존심에 괜히 난 결혼 안 하고 혼자 살 거라고 부모님께 선언을 하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왜 나는 정상적인 가정을 이룰 수 없을까 절망하기도 했던 것 같다.
다행히 상담을 공부하던 중 같이 수업을 듣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나보다 어렸기 때문에 동생처럼 생각하고 이것, 저것 내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가까워져서 우리 가족 얘기를 부끄럽지 않게 했던 것 같다. 부모님께 소개하던 날 아빠는 남편을 보고 '세상에서 제일 못생긴 놈을 골라왔다'라고 했지만 나는 외모보다는 내 상처와 아픔을 받아주는 모습에 결혼을 결심했다. 물론 남편의 상처도 알아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나 싶다. 결혼을 결정하고 집을 구해야 했는데 부모님은 언니나 동생처럼 부모님이 갖고 있는 집 중 하나에 들어와 살라고 하셨지만 남편이 부담스러워했고 나 역시도 가능하면 식구들이 살고 있는 목동에 있고 싶지 않아 아무 연고도 없는 홍제동에 집을 얻었다.
결혼 초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불편한 점들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남편은 사교성이 부족했고, 상담을 공부해서 취업에는 불리했다. 나는 경쟁이 심한 한국의 영어 강사 시장에서 죽을 듯 일해야 하는 상황이 점점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남편은 영국에서 심리학을 더 공부해 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시댁에서 경제적으로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남편을 말리지 않고 영국행을 결정했다. 나 역시 쉬고 싶었고, 영국에 가면 경쟁은 하지 않을 테니 돈은 없어도 마음은 편하지 않을까 싶어서 영국 이민을 준비하고 2010년 10월, 두 번째 영국 생활을 시작했다. 두 번의 영국 생활은 다 내 마음 편하자고 결정했던 일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이기적인 결정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가족의 역기능에 함몰되어 나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서로에게 도움이 되려다 더 상처를 주는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방법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장 9절~10절
내가 가장 싫어했던 성경 구절이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는 구절이다. 지금도 편한 구절은 아닌데 나는 내가 약해 보이는 게 싫고 남들에게 모자란다는 평가를 듣기 싫다. 그래서 어느 정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사람들과 나누며 도와달라고 하지만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 때는 입을 닫고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버틴다. 혼자 소리 지르고 울면서도 사람들과 있을 때는 오히려 잘난 척, 다 있는 척, 문제없는 척하며 산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려 애쓰면서 불가능을 이루려고 하기에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의 영국 생활 속에서 나는 내가 뿌리 깊은 이방인이고,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뼈저리게 느끼며 내 약함을 인정하는 법을 배웠고 매일 되새기며 산다.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상처와 결핍, 그리고 약함조차도 내가 가진 일부임을 받아들이며, 완벽하지 않은 나 자신을 온전히 마주하는 연습을 오늘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