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언니한테 들었어. 갑자기 무단으로 결근했다며."
"...그래서?"
"너 지금 나 믿고 이렇게 행동하는 거야?"
"..."
"나 믿고 그러는 거면 적당히 하든지, 아니면 제대로 갑질해서 너 편으로 만들든지 해야지. 지금 이도 저도 아니고 뭐 하는 거야. 내가 말했지. 똑똑하게 살라고."
이서희랑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뀐 전화번호를 굳이 뒤져서 걸어온 첫마디치고는 토악질이 날 만큼 역겨웠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그럼 와서 제대로 사과하고 다시 일 제대로 해."
누가 누구에게 사과를 하고, 내가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걸까.
그렇게 나는 무단결근을 한 사람이 아니라, 집안일 때문에 갑자기 연차를 쓴 인사팀 직원이 되어 있었다.
상무와 이서희는 그 뒤로 급격하게 친해졌고, 나는 더 이상 상무 방에 불려가는 일이 없어졌다.
그리고 직장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이상하게 설레는 순간, 인사평가 시즌이 다가왔다.
이서희는 그때부터 점심시간에도 우리와 함께하지 않았다.
임원들과, 다른 부서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바빠졌고
나는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한 존재가 되어, 부서 내에서 조용히 왕따가 되어 있었다.
"한 명씩 CFO 방으로 들어와서 면담하겠습니다."
CFO 역시 이서희의 보석함 안에 들어 있던, 그 ‘아저씨 보석’ 중 한 명이었다.
인사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아무 성과를 내지 않아도 그녀가 S를 받을 거라는 걸.
"우기는 온 지 얼마 안 돼서 평가 대상 아닌 거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잘 적응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일하면서 다른 힘든 일은 없어?"
"...힘든… 일이라면요?"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울컥, 울컥.
힘든 일요?
저를 오피스 와이프로 보는 아저씨가 회사에서 갑질을 해요.
저한테 이상한 카톡을 보내고, 돈을 보내고… 무서워 죽겠어요.
그렇게 싸고 도는 이서희는 사실 당신을 끔찍하게 싫어해요.
우린 인사팀에서 일을 배우는 게 아니라
서로 메일로 공격하고, 증거 모으고, 감사팀에 찌르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어요.
이게 팀이고, 부서고, 회사인지 모르겠어요.
"요즘 와이프랑 사이가 안 좋아서 말이야. 여자들은 그런 거 잘 알잖아. 왜 삐지고 화내는지. 우기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제가 술을 못 마셔서요… 서희님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아니, 서희한테는 내가 직접 말할 테니까 됐어. 나가봐."
한순간 뱀의 눈빛으로 변한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기가 없어서 이런 건가?
추천서를 들고 와서?
내가 일을 못해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을 더 잘해야 하지?
잘하고 싶었다.
빨리 부서에 녹아들고 싶었다.
술도 못 마시는데 소주를 몰래 버려가며 회식을 따라다니고
모르는 이야기에도 최선을 다해 끼어들었다.
임원들에게 연락이 오면 김혜민에게 바로 카톡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물어보는,
그런 자아도 주체도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상무님, 시간 되시면 언제든지 말씀 주세요. 와인 기대됩니다.]
주체 없는 나는 또 마음과는 달리 철없는 문자를 남겼다.
그리고 그 글들이 나중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