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의 희곡은 시나 소설에 비해 인지도가 다소 떨어지는 문학입니다. 본연의 읽는 재미와 개성이 분명하며 매력적인 명작들도 아주 많은 갈래임에도 좀처럼 주목을 받지 못하는 건 안타까운 사실이죠. 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갈래인 희곡을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전부터 해 왔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번 글을 시작으로 당분간 제가 인상 깊게 읽었던 다양한 희곡을 소개하고, 그 속의 가치를 나누는 글을 자주 올릴 예정입니다!
처음으로 다룰 희곡인 '보석과 여인'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극작가, 이강백 작가님의 작품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통해 '완전한 사랑'에 대한 의문을 남기는 수작이죠. 여러분들은 완전한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또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어떤 것까지 포기할 수 있나요?
'보석과 여인'의 이야기를 짧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이'의 방, 어느 날 아침, 밤새껏 보석을 다듬던 '그이'는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한다. 온몸이 잿더미로 변해 소멸해 버린다. 보석 하나를 남긴 채로. 방구석에서 '그이'의 죽음을 지켜보던 영적인 존재인 '남자'는 '그이'가 깎은 보석을 '그이'의 약혼녀였던 '그녀'에게 전해준다. '그이'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보석을 집어던지고 울면서 뛰쳐나간다...
보석 세공인인 '그이'는 백발이 되고 허리가 굽고 살갗이 흉측하게 찌그러질 때까지, 오직 어두운 방에 틀어박힌 채 완전한 모양의 보석을 만들어내는 데에 일생을 바쳤다. '그이'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을 깎아내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 보석을 선물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이'는 사랑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보석의 소유만으로 만족하려 했던 자신의 삶이 부질없었다고 느끼며 후회했다. '남자'는 그런 '그이'에게 다가가 특별한 계약을 제안했다. 바로 '그이'에게 젊음을 줄 테니 그 대가로 '그이'가 평생을 걸쳐 얻어낸 보석 세공술을 포기하고 다시는 완전한 모양의 보석을 깎지 말라는 것이었다. '남자'는 계약을 어길 시 '그이'가 재로 변해 소멸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그이'는 망설임 끝에 젊음을 선택했다.
젊은 청년의 모습이 된 '그이'는 드디어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갔다. '그이'는 숱한 노력 끝에 결국 운명의 여인, '그녀'를 만나서 인연을 맺고 약혼을 하게 되었다. '그이'는 '그녀'에게 결혼반지를 선물하기 위해 함께 보석상에 찾아갔지만, 거기에 있었던 것은 하나같이 전부 조잡한 엉터리 보석들과 보석상 주인 행세를 하며 '그이'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였다. '그이'는 보석의 질에 대해 '남자'에게 따지지만, '남자'는 직접 보석을 깎으라고 말한다. '그이'는 자신이 직접 보석을 깎을 시 계약을 위반하여 죽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렴요. 그 여인 역시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쩐지, 그렇습니다, 난 이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당신은 그녀를 완전히 사랑하고 있진 않습니다. 당신이 깎을 줄 아는, 그런 완전한 모양의 보석과도 같은 핵심을 드러내지 않고 그녀를 사랑한다면 당신 사랑은 조잡한 것이다, 그런 겁니다."
"조잡하다니? 결코 난 그렇지가 않소!"
"아니라면 뭡니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지 않는데 그게 과연 완전한 사랑일까요?"
'남자'는 '그이'가 '그녀'에게 엉터리 보석을 선물한다는 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남자'에게 반박할 수 없었던 '그이'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그녀'를 위해 직접 보석을 깎거나, 아무 보석이나 선물하거나. 완전한 사랑을 포기한 채 결혼해서 평생 살거나, 완전한 사랑 속에서 죽거나.
'그이'는 긴 고민 끝에, 결혼식을 단 하루 남겨둔 밤에 보석을 깎기 시작했다.
아, 욕심도 많으시군요.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보석, 그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싶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중 하나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셔야지요.
이 희곡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완전한 보석'과 '완전한 사랑'이라는 대조적인 소재의 유기적 관계입니다. 이 둘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가치이자, '그이'가 인간으로서 가진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장치이죠. 현실, 소유를 상징하는 '완전한 보석'과 이상, 존재를 상징하는 '완전한 사랑(여인)'. '그이'는 무슨 수를 써서도 이 두 가지를 전부 가질 수 없었습니다. '남자'는 그런 인간의 한계에 갇혀서 허우적대는 '그이'를 조롱하고 짓밟는 인물입니다. '그이'가 단 하나도 이루지 못한 채 파멸을 맞이하도록 유도하죠.
흉하게 늙은 노인이 될 때까지 '사랑' 대신 '완전한 보석'을 좇았던 '그이'는 허망한 소유에 집착했던 자신의 지난날들을 후회하며 '남자'와 기꺼이 계약합니다. 그렇게 보석을 잃은 대가로 사랑을 얻게 된 '그이'는 얼마 안 가서 다시 보석과 사랑이라는 굴레에 빠져버리죠. '그녀'에 대한 자신의 '완전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보석'이라는 표면적 가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이'는 증명되지 않은 사랑으로는 '그녀'와 평생을 함께 할 자신이 없었고,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이'는 그 무엇도 얻지 못했습니다. 분명 '완전한 사랑'을 얻고자 '완벽한 보석'을 선택했던 '그이'. 그런데 '그이'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에게 주기 위해 목숨과 맞바꾼 '완전한 보석'은 패닉 상태가 된 '그녀'에 의해 내던져집니다. 흠집이 생기고 얼룩이 졌으며 균열이 났겠죠. '완전한 사랑'은 또 어떻습니까? '그녀'는 '그이'를 잃었다는 사실에 엄청난 슬픔과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요약문에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이미 한 번 실연의 상처를 입은 채 살아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이'의 죽음으로 또다시 사랑에 상처를 입게 되었죠. 이것이 진정으로 '그이'가 원한 '완전한 사랑'이었을까요? 아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이'는 그저 '완전한 사랑'이라는 글자에 매몰되어 '남자'에게 놀아나며 모든 것을 잃은 비참한 인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보석'과 '여인'을 모두 가지고 싶어 했던 '그이'는 죽음을 감당하면서까지 그 둘을 구해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상처를 내고 말았죠. 보석은 깨지고, '그녀'는 비탄에 빠졌으니까요.
그이가 안 계신다면, 아, 이런 것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진정하십시오, 부인. 이렇게 깎여진 보석은 세상에서 단 하나 이것뿐입니다.
하나라구요! 수천 개인들 그게 무엇일까요! (보석을 내던지며) 아무 소용없어요, 저에게. 그이면 됐던 거예요. 그이라면 다 황홀하게 꾸미고도 남았어요! 오, 차라리 저에게 재앙을 주세요! (비탄으로 울부짖으며 나간다)
작품의 핵심을 담고 있는 '남자'와 '그녀'의 대화입니다. '그녀'에게는 반짝이는 보석보다 '그이'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진짜 사랑이었습니다. 작중에서 '그녀'가 이 사실을 '그이'에게 직접 말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자신은 아무런 상관없다고. 오직 당신이면 된다고. 그러나 '그이'는 '그녀'의 말을 흘려듣고 말죠. 어쩌면, 어쩌면 '그이'에게는 '완전한 사랑'을 스스로 얻어낼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결국은 죽음의 결말이었죠.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이'였다면 무언가 달랐을까요? '그이'도, 저도, 이 글을 읽고 계실 여러분들도 모두 한낱 인간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들 하죠. 모든 걸 갖고 싶어 하고 모든 걸 좇고 싶은 게 바로 인간이죠. 물론,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망각하고 눈이 멀어 미끄러지고 망가질 때가 많죠. 사랑이 꼭 물질로 대변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물질을 기대하거나, 물질 때문에 사랑에 소홀할 때도 있습니다. 결국 우린 인간이니까요. 결점 없이 완전한 인간은 모든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인간인 이상 결점, 위선, 모순이 없을 수가 없으니까요.
제가 잉글랜드 축구에 관한 글에서도 했던 얘기 같은데요, 인간은 퍼즐 조각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작고 연약한, 그 각각의 무수한 퍼즐 조각이요. 하나같이 어딘가 파여 있거나 튀어나와 있습니다. 수많은 것들 중 그 누구도 완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이'도, 저도, 또 여러분도 그렇겠죠. 모두 불완전함, 미숙함 투성이입니다. 상처도 많은 데다 모순 투성이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완전하지 않기에 인간이 아름다운 생명인 겁니다. 퍼즐 조각인 인간은 결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면서 교류하고 상호 작용하고 사랑해야 살 수 있죠. 스스로 완벽할 수 없지만, 서로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혼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지만, 함께 모여서 하나의 작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저마다 몇 가지씩의 결점이 있기에 서로 모여서 기적 같은 사랑의 힘으로 뭉쳐서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정사각형처럼 완전하고 빈틈이 없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죠.
결국 '보석과 여인'에서 제시하는 진짜 '완전한 사랑'은, 역설적이게 불완전할 순 있어도 서로에게 의지하고 힘을 주는 사랑입니다. '그이'가 '그녀'를 위해서 '완전한 보석'을 깎아 주지는 못했지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완전한 사랑'이 증명된 것 아닐까요?
사랑은 완전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랑이 완전함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믿어요. '완전한 보석'과 같은 물질을 줄 수는 없어도, '완전한 사랑'은 피어날 수 있다고. 오히려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가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물질이 아닌 존재로서 어우러지고 서로의 온정을 나누는 그 순간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진짜 '완전한 사랑'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