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찾은 오아시스, 그리고 격변의 시기
그 때 심리검사 같은걸 받았으면 우울증 비슷한게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성격이 예민하지 않고 무던한 편이라 매일 학교생활을 하며 (내게 먼저 다가와준 고마운)친구들과 맛있는 것도 먹고 놀러다니면 잊혀지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비교의식과 열등감, 그로 인한 우울감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생활의 첫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그 여름방학이 내 인생에 있어서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몰두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은 것이다.
얼떨결에 대학생 종교단체에서 하는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감동과 위로를 받고 신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목표가 생긴 나는 이어서 진행된 대외활동에도 신청하여 참석했다. 그곳에서 열정적으로 청춘을 바쳐 즐겁게 활동하는 언니, 오빠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고싶다 라는 생각을 했다. 고3때 그리던 대학 판타지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현실성이 있는 희망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내 성격이 전혀 문제가 되어보이지 않았고, 진심을 다해 열심히 하면 할 수록 인정받을 수 있는 곳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뒤로 그곳에서 하는 대외활동에 여름, 겨울로 참여하며(심지어 활동을 위해 1년 휴학도 했다!) 학기중에는 지역별로 묶인 다른 대학생 멤버들과 매일같이 얼굴을 보면서 우울감이 찾아올 겨를도 없이 열정적으로 살았다. 단지 문제는 이렇게 살다보니 학교에서의 내 모습과 해당 단체에서의 내 모습에는 상당한 괴리가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4학년이 될 무렵 모두가 취업준비를 할 때 나는 더 적극적으로 이 단체 활동에 몰두했고, 졸업하자마자 인턴 비슷한 자리에 지원하며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갔다. 그곳은 숙식을 해결하는 것 외에 어떤 금전적인 보수를 주지 않는 철저한 봉사직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진정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열정 때문이었다. 그때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그 곳은 평일과 주말의 구분이 없었고, 쉴 틈 없이 달려야만 했다. 명목상 퇴근시간이 있기는 했지만 할 일은 끊임없이 있었다. 밤을 새워 무언가를 해결해내는게 정상인 곳이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평가와 피드백을 받으며 늘 스스로의 부족함을 성찰하고 수련해야만 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가족, 건강, 돈(월급이 없으니까), 인간관계 등 세상 모든 사람들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들은 당연히 뒷전이 되었다. 나는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완전히 몰두했고, 그러면서 내게 불행을 느끼게했던 상황들로부터 그때만큼은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꽃다운 20대 청춘이 모두 흘러갔고, 30대가 되었다. 그 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게 된다. 해당 단체의 비리 사건이 터진 것이다. 나는 세계가 무너지는듯한 큰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였고, 당시 나를 비롯해 이 단체에 소속되어있던 수많은 멤버들이 거의 반절가량 단체를 떠났다.
그렇게 나는 30살의 나이에 취업시장에, 진정한 사회생활 속에 초라히 내던져졌다. 또한 애써 벗어났던 장애형제가 있는 본가로 완전히 돌아가 비장애형제로서의 나를 다시 마주해야만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