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인증이 아니라, 구조입니다”
ISO 내부심사원 교육 첫날이었다. 교육장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화이트 무늬목으로 마감된 차분한 벽, 대형 TV, 그리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책상과 푹신한 의자들. 일반 강의실처럼 일렬로 앉는 구조가 아니었다. 책상 위에는 칸막이가 있어 앞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서로를 마주 보게끔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었다. 묘하게 낯선 구조였다. 그리고 그 구조만큼이나 분위기도 어딘가 달랐다.
수강생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조금은 귀찮고, 조금은 지루하고, 그리고 분명하게 읽히는 한 가지 감정.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 교육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인증이고, 결국 만들어야 하는 문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형식적으로 배우고, 적당히 맞추고, 무난하게 통과하면 되는 일. 그때까지는 그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강사가 들어왔다.
세련되다기보다는 절제된 느낌의 옷차림이었다. 과하지 않지만 흐트러짐도 없는, 딱 필요한 만큼만 정리된 모습. 말투는 조용했고, 표정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교육장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조용히 깔렸다. 그는 자리 앞에 서서 우리를 한 번 훑어봤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정이도입니다.”
그게 전부였다. 자기소개는 길지 않았다. 심사 경력, 그리고 본인이 검증심사원이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리고 덧붙였다.
“주식회사 한국공학인증원의 심사원이자 강사입니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차가운 느낌이 남았다. 과장도 없었고, 설명도 없었고, 불필요한 말도 없었다. 그저 사실만 전달하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
“오늘은 ISO 42001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AI가 사고를 내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순간 교육장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눈을 피했고, 누군가는 노트를 넘기는 척을 했고, 누군가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정이도 심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그대로 두었다. 몇 초가 아니라, 꽤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답이 없다는 건,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말이 조용하게 꽂혔다. 그는 슬라이드를 넘기지 않았다. 대신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은 기업이 ISO를 문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잠시 멈췄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속으로 동의했다. 그런데 그는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정확하지 않습니다.”
조용했다.
“ISO는 문서가 아니라 구조입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구조. 그 단어가. 바로 정이도 심사원은 칠판에 간단한 그림을 그렸다. 하나의 원, 그리고 그 안에 몇 개의 선.
“이게 조직입니다.”
그리고 원 바깥에 작은 점을 찍었다.
“이게 사고입니다.”
그는 다시 말했다.
“문서를 잘 만든다고 사고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던 인증의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사고는 구조에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구조가 없으면, 사고는 반드시 발생합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AI가 만든 보고서
AI가 짠 코드
AI가 분석한 데이터
그리고 그 위에 아무런 통제 없이 쌓여가던 결과들 나는 그동안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이도 심사원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회사에는 AI 사용 기준이 있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데이터 검증 절차는요?”
침묵.
“결과에 대한 책임자는 명확합니까?”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겠네요.”
그 말은 조용했지만 무거웠다. 그날 교육은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문서를 어떻게 작성 하는지보다 왜 만들어야 하는지를 먼저 설명했다. 체크리스트보다 리스크를 먼저 보게 만들었다. 형식보다. 구조를 먼저 보게 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이 생각을 했다.
ISO가… 생각보다 위험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왜냐하면 이건 단순히 인증을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강의만 들었을 때는 회사가 무너지느냐, 아니냐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교육이 끝날 때쯤 정이도 심사원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ISO는 통과를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리고 잠시 멈췄다.
“살아남기 위한 구조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이미 늦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처음으로 ISO 문서를 찾아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