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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순이 Sep 15. 2024

대표님, 저와 술 한잔 해주세요

실장님은 불 같이 화를 내다가도 카톡으로 나에게 말을 걸곤 했다. 회사에 대한 욕, 특히 대표님에 대한 욕을 나한테 해대기 시작했다. 대표님이 자기 자랑을 좀 하면 재수 없다며 장문의 카톡을 퍼부었고, 일이 좀 많아지면 너무 힘들다며 자기가 회사에서 제일 고생하는 것 같다고 카톡을 쉴 새 없이 보내왔다. 나는 일일이 답을 해주기가 난감할 때도 있었지만, 억지로 이모티콘과 어색한 리액션으로 답을 했다. 디자인 일보다 실장님 카톡에 답해주는 일이 더욱 힘들었다. 그래도 이 또한 실장님이 나를 신뢰하고 좋아해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참아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대표님이 나를 따로 불러내셨다.

"지연 씨, 이번에 대기업 사보를 따내야 하는 피티가 있는데 디자인 좀 준비해 줄 수 있어?"

"네. 해볼 수는 있지만 실장님께 말씀 안 하시고 저한테 다이렉트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실장이 요즘 나한테 불만이 많네. 마음에 안 들어서 지연 씨한테 따로 부탁하는 거야. 실장한테는 내가 둘러댈 테니 걱정 말고. 다른 동료와 둘이서 준비해 봐."

  

대표님께서 순서를 무시하고 나에게 바로 말씀하시니 당황스러웠지만,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나는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다른 동료에게 둘이서 회의를 하자고 회의실로 들어가는데 실장님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나를 째려보며 '너네들이 얼마나 잘하나 한번 보자.'라며 눈빛으로 말을 하시는 것 같았다. 분명 질투였다.


동료와 둘이서 작업을 하는 중간에도 계속 모니터를 쳐다보며 다니셨다. 카톡도 조용했다. 나에게 어떻게 되어가는지 한번 보여달라는 퉁명스러운 말에 손을 벌벌 떨며 작업물을 보여드렸다. 한번 비웃곤, 그런 식으로 계속하라며 자리를 떠나셨다. 나는 작업하는 내내 눈치가 보이고 마음이 불편해서 제대로 작업을 하지 못했다.


"지연 씨, 대표가 너네가 나보다 나을 거라고 관심 갖지 말라고 하는데. 나 너네 잘하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 참나, 감히 내 자리를 넘봐? 너네 아무리 해도 내실력 못 따라가니까 괜히 다른 생각 마."


내가 실장님 자리를 넘봤다고 생각했다보다. 대표랑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디자인을 잘해도 문제 잘 못해도 문제였다. 결국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작업은 했다 정도의 결과물을 내놓기로 하고 동료와 합의를 봤다. 피티 전날 이게 잘하는 짓인지 분간이 안돼서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사회생활은 이렇게 쓴맛인 걸까. 견딜 수 없어 다 토해내고 싶을 정도로 문제가 없는 게 없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디자인을 잘해도 회사 내부의 문제에 부딪히니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보를 따는 피티는 결국 망했고, 유능한 기업이 채택됐다. 대표님은 고생했다며 밥을 사주신다고 하셨다. 난 그 말에 대뜸 드릴 말씀이 있다며 대표실로 향했다.


"대표님, 혹시 시간 되시면 저와 술 한잔 해주실 수 있으세요?"


대표님은 당황해하셨다. 일개 직원이 단둘이 술을 먹자고 하니 놀라우셨다보다. 그날 당장 술자리를 갖자고 했다. 나는 실장님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 말했다. 군대식으로 관리하시는 상황으로 모두 힘들어하는 점, 하루종일 대표님 욕을 카톡으로 보내는것데 답하느라 지치는 상황, 이번 사보 건으로 실장님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서 힘들다는 둥. 실장님과 대표님과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해결해 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사장님은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하셨다. 다 보인다며, 해결해 줄 테니 시간을 좀 달라고 하셨다.

 

두 달을 눈치를 보며 버텼다. 하루하루 실장님의 눈초리가 더 따가워졌고, 나에게 업무지시를 일부러 잘못해 주고 미안해하는 둥 뒤통수치는 일도 있었다. 대표님은 아무런 조치가 없었고, 자꾸만 나를 따로 불러내 일을 지시하셨다. 나는 상황에 지쳐서 퇴사를 했다. 퇴사를 하고 나서도 며칠간 대표님의 연락이 이어졌다. 다시 들어오면 다 해결해 주겠다는 말로 나를 설득했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회사에 얼른 취직헤버리고 싶었다.


역시 포트폴리오 빨로 또 다른 디자인 회사에 바로 취직을 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알아주는 기획사에서 실장자리에 있다가 퇴사하고 차린 회사라고 했다. 패션분야에 편집디자인을 진행하는 회사였다. 입사 첫날 대표님의 팔뚝에 전체적으로 깔린 문신을 보고 기겁했다. 그리고 대표실에 청소를 하러 들어갔다가 영화에서나 볼법한 구두들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이곳은 편집디자인회사인가 패션디자인회사인가. 대표님, 실장님, 팀장님은 콧대가 정말 높았다. 나에게 담배연기를 뿜으며 얼마나 잘하는지 실력 좀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기에 눌렸다. 첫날부터 패션브랜드 로고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1차 결과물을 보고 어디 관공서 디자인을 하고 있냐며 비웃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난 첫날부터 새벽 4시가 되어서야 퇴근을 했다.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내 디자인 수준이 한층 올라간 건 분명했는데 패션계에서 써먹을 정도의 간지 나는 디자인은 아닌 것이 확실해 보였다. 내 실력을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욕먹으며 노력할 수도 있었지만,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기죽이는 사무실 분위기는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결국 하루 만에 또 퇴사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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