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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순이 Sep 04. 2024

불안한 새벽 4시

스릴 넘치는 영화를 한 장면도 못 보고 잠에 빠져버린 것이다. 남자친구가 이번엔 여행을 가자고 했다. 렌터카를 빌려 동해바다로 떠나기로 했다. 새벽 5시부터 오피스텔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신나게 출발을 외치며 이동하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졸고 있으니 남자친구가 시트를 눕혀서 푹 자라고 한다.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가는 내내 잠을 잤다. 바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맛있는 홍게를 먹으며 추억을 한가득 쌓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잤다. 자는 도중 분명 남자친구의 한숨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아는 척할 기운이 없었다. 그렇게 데이트는 매번 졸음과 함께였다.


과제에 치이고 아르바이트에 치여도 데이트는 나에게 에너지를 준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이번주 데이트는 어떻게 하면 미룰 수 있을까 고민하기 일 쑤였다. 은근슬쩍 남자친구한테 질문을 했다.


"자기야, 만약 내가 3개월 정도 못 만날 것 같다고 하면 기다려줄 수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못 기다리지."


떠보는 질문이었는데도 나는 상처를 받았다. 이기적일 수도 있겠다. 기다려줄 수 있는 남자가 과연 있을까? 어쨌든 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헤어질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결국 그 길로 헤어짐을 결심했다. 내가 남자친구에게 정을 떼려고 하는지 마음에 안 드는 부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며칠 뒤 헤어지자고 말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하철에서 울컥울컥 눈물이 흘렀다. 

'내가 잘하는 짓인가? 디자인이 뭐라고 사랑까지 포기했지? 이 사람 같은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남자친구는 내가 학원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자주 꽃을 사들고 데리러 오는 로맨틱한 남자였고, 데이트마다 피곤해해도 이해심의 끝판왕이었다. 그런 남자친구를 내가 버린 것이다. 이제는 정말 디자인 하나만 보고 미쳐야 했다. 그래야 죄책감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학원 과제는 매일 1개씩 주어졌다. 회사에서도 포스터 하나 만드는데 며칠 걸린 적도 많았는데 과제는 더 힘들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저녁에 과제를 해야 하니 하나둘씩 밀리기 시작했다. 6개월 과정이었는데 꼬박 1년이 걸려서 과정을 끝내게 되었다. 자신감이 없으니 과제를 제출할 때도 시무룩한 얼굴로 피드백을 들었다. 


"지연 씨는 걱정이 많아서 걱정이에요. 실력 많이 좋아졌어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선생님이 끌어주시는 데로 포트폴리오까지 하나의 책으로 완성했다. 이제 실무에 다시 투입될 차례다. '나 잘할 수 있지? 잘해보자 이지연!'을 몇 번이고 되뇌며 이력서를 넣었다.


포트폴리오가 꽤 괜찮았는지 단번에 취업을 했다. 이름이 좀 알려진 잡지사였다. 디자인사업팀으로 새로 생긴 부서로 배정되었다. 새로운 잡지 디자인을 개발하거나 다양한 디자인의뢰가 들어오면 작업을 해드리는 업무를 맡았다. 지난 실장으로 근무한 2년의 경력이 인정이 되어서 선임디자이너로 들어갔다. 신입이라면 좀 덜 떨릴 것 같았는데 또 잘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잡지 컨셉 디자인을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마감기한은 내일 까지란다. 실장님께 컨펌을 받은 후 수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내일 오전까지는 만들어야 한다. 두근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작업을 시작했다. 

'이게 나은가, 저게 나은가.' 

요놈에 걱정이 또 시작했다. 고민하느라 다시 엎고 만들기를 반복했더니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첫 작업부터 망신을 당하기 싫었다. 포트폴리오도 최선을 다해서 만들었고, 실장님이 그 실력을 기대하고 있을 텐데, 비전공자 티를 팍팍 내는 결과물을 가져가는 일은 절대 없었으면 했다. 퇴근해서 다시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다시 만들수록 더 괜찮게 나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니 새벽 4시였다. 밤을 꼬박 새운 것이다. 거의 다 만들고 마지막 면을 만드는데 갑자기 불안감이 몰려왔다. 출근해서 실장님께 보여드렸는데 다시 새로 만들라는 피드백을 받는 상상을 했다. 옆에 있던 동료들이 긴장하며 나를 쳐다보는 상황. 부끄러워서 어딘가에라도 숨고 싶은 상황. 불안감은 상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다 엎고 새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거의 다 만들었고, 출근 시간도 별로 남지 않았다. 

'아, 죽어버리고 싶다.'

뜬금없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담감이 너무 컸나 보다. 누구도 그렇게 기대하는 것 같지 않던데 나만 혼자 이러고 있는 느낌이었다. 디자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헤어진 남자친구에 대한 죄책감까지 한꺼번에 몰아쳤다. 그렇게 아침을 맞이하고 빨개진 눈으로 출근을 했다.


"실장님, 여기 잡지 디자인 개발한 것 컨펌부탁드립니다."

"어머. 이 정도면 괜찮게 잘했네. 그대로 쓰면 되겠어."


걱정이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았다. 칭찬을 받은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잠시 멍하니 내 결과물을 들여다보니 웃음이 나왔다. 

'새벽에 자살충동까지 일었는데. 결국 이럴 것을. 이래서 학원 선생님이 걱정이 많아서 걱정이라고 한 거였구나.'


회사에서는 실장님이 나를 제일 예뻐했다. 옆에 딱 붙어 앉아서 디자인을 알려주시곤 했다. 그 후로도 몇 가지 결과물을 보시고 점점 나를 신뢰하셨다. 대표님 또한 칭찬 일색이었다. 바라고 바라던 디자인으로 인정받는 날이 왔구나 하는 마음에, 매일 밤을 새우며 작업을 해도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런데 큰 단점이 있었다. 실장님이 군대식으로 직원관리를 하는 것이다. 전화기가 2번 이상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아야 했고, 월요일 아침 청소를 10분 안에 깔끔하게 마치고 검사 같은 것을 받야 한다는 것. 대답도 크게 해야 했고 이 모든 것들을 마음에 들지 않게 하면 실장님이 번개처럼 다가와 큰소리를 내셨다. 말 그대로 회사의 실세였다.

"목소리가 왜 이렇게 기어들어가? 대답 똑바로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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