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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순이 Aug 28. 2024

비전공자의 분투

번역이나 프레젠테이션은 잘 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개판 쳐놨다는 말이 듣기가 힘들었다. 안 그래도 자신 없는데 대놓고 제대로 확인이 된 거다. 사장님께서는 괜찮아 디자인은 할수록 느는 거라고 위로해 주셨지만 내 자존심이 망가졌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몇 개월간 잠을 줄여가며 집에서 따로 디자인을 했건만, 노력을 아무리 해도 디자인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래서 그렇게 전공자들이 비전공자를 싫어하는구나.'


디자인 공부를 시작할 때 의기양양했던 모습이 부끄러웠다. 프로그램툴만 제대로 다루면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고, 회사에서 배우면서 하면 못할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미술공부와 미대에 입학하여 기본기를 다져놓은 전공자들의 기본실력이라는 건 무시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는데, 착각이었던 것이다. 나의 '하면 된다'는 마인드가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신입사원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실장님, 혹시 지금 작업하시는 거 한번 봐도 될까요?"

"그.. 그래요."

"와, 디자인이 많이 늘으셨어요."


고맙다고 답은 했지만, 표정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신입도 내가 디자인을 못하는 걸 알았나 보다. 지난번 일 때문에 위로한답시고 해준 말인 것 같은데,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나에게 실장이란 자리가 괜찮은 건지. 처음부터 너무 큰 일을 맡아서 이렇게 된 건 아닌지. 자신감이 떨어졌다.


이렇게 안 되는 디자인을 끌고 갈 수가 없었다. 디자인 공부를 좀 더 심층적으로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회사를 다니면서는 도저히 따로 공부할 시간이 나질 않았다. 결국 퇴사를 하고 공부를 디자인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포털사이트를 뒤졌다. 우리나라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는 학원 중 포트폴리오를 기막히게 잘 뽑아내주는 학원이 있다고 했다. 홍대 근처에 위치한 학원이었다. 홈페이지, 강사이력, 학원건물까지 둘러봤다. 여기라면 전공자 못지않게 실력을 키워줄 것 같았다. 대신 6개월 과정에 학원비가 한 달에 70만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망설임 없이 투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드디어 상담을 예약한 날이다. 번쩍번쩍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했던 작업물들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여기 부끄럽지만 가져왔어요."

"전형적인 비전공자 냄새를 풍기는 작업물이네요. 요즘 국비지원으로 디자인 배우고 시작하신 분들이 많이 찾아오세요. 전공자도 많이 찾아오십니다. 고민 많으셨죠? 우리나라에서 저희가 실력 높이는 데는 최고라 자부합니다. 대신 매일 과제가 많아요. 감당할 수 있는 분만 받습니다. 여기 학생들 포트폴리오 한번 보세요."


포트폴리오를 구경하다가 입이 떡 벌어졌다.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런 포트폴리오를 만든 학생들 전부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고 한다. 과연 나도 할 수 있을지 의심반 기대반으로 수강 등록을 했다. 


학원 수업 첫날, 소규모 정원의 수업이라서 6명의 학생들을 만났다. 작업을 하며 수업을 듣는 방식이었는데 습득하는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많았다. 비전공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빼어난 솜씨들을 갖고 있었다. 나는 점점 주눅이 들었고, 정말 코피 나게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학원만 다니며 공부하고 싶었지만 나의 경제상황이 좋지 못했다. 6평 오피스텔에 간신히 살고 있는 터라 월세와 학원비를 감당하려면 돈이 되는 알바를 하면서 공부를 해야 했다. 평일에는 콜센터, 주말에는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 3~4시까지 과제를 하고 잠에 들곤 했더니, 입병에 감기몸살을 달고 살았다. 그렇게 겨우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들었지만, 실력이 늘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기운이 났다. 오로지 디자인으로 인정받겠다는 목표뿐이었다. 앞만 보며 달려야 했다.


콜센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뜻하지 않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콜센터 내에서 알아주는 능력자로 다들 연애를 부러워했다. 과제가 많아서 데이트를 거의 카페에서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는데 좋다고 한다. 이렇게 연애하는 게 괜찮을지 의문이었지만 그가 괜찮다는데 안 할 이유는 없었다. 미치게 바쁜 와중에 연애까지 하는 내가 대단스러웠다. 


과제를 일찍 끝내고 새벽에 영화를 보기로 했다. 스릴러물이었다. 알콩달콩하게 붙어서 보겠다며 끝자리를 예약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영화제목이 스크린에 등장하며 영화가 시작됐다. 그런데 내가 눈을 잠시 감았나 보다. 졸린 눈을 치켜세우니 사람들이 나가고 있었다.


"잘 잤어?"

"헉, 영화 끝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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