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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순이 Sep 23. 2024

자율출퇴근이 불러온 일중독

새로운 디자인회사에 입사했다. 내 실력에 맞게 관공서 디자인을 하는 회사로 들어갔고, 마음씨 좋은 대표님과 직원들이 있었다. 대표님이 가끔 클라이언트 때문에 투정을 부리는 것 외에는 단점이 하나도 없는 회사였다. 아, 연봉이 다른 곳에 비해 조금 적었다. 일이 많지 않다면 그 정도는 감안할 수 있었다. 


디자인 경력이 생기니 점점 예쁜 디자인보다 기획 쪽에 눈을 뜨게 됐다. 기획을 잘해야 디자인도 잘 나오고, 예쁜 디자인보다는 타겟층에 가깝게 과녁 하는 아이디어, 카피문구, 콘셉트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디자인을 하다 보니 관공서에서도 인정을 받고 영업적으로도 플러스가 되었다. 1년이 지나고 대표님과 신뢰가 쌓이니 연봉협상 시기에 내가 원하는 것들을 요구했다. 


"대표님, 저 기획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요.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업무도중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서점이나 전시회에 들러보고 싶고,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며 시야를 넓히는데 노력해보고 싶습니다. 연봉을 올리기보다는 도서구입비와 밥값을 챙겨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본 적이 없어서 맞는 결정인지 모르지만 지연 씨 믿으니까. 한번 해보자."


영감을 얻기 위해 온갖 행사와 전시를 돌아다녔다. 카페에서 일을 하니 시간제한이 없어 하루종일 일만 했다.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우니 주말에도 일을 했고, 공휴일도 없었다. 가족행사는 모두 뒷전이었고, 내 머릿속에는 온통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야말로 일중독이었다. 자율이 오히려 나에게 독이 되었다. 아이디어는 샘솟고 디자인은 점점 잘 나오는데 몸이 시들어갔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몸이 안 좋아 보인다고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니 아이디어도 고갈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대표님께 제가 알아서 다하겠다고 자신감 넘치게 말하고, 클라이언트 측에는 잘해드리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고 돌아와서 머리를 쥐어뜯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이젠 기획에도 한계를 느꼈다. 


대표님께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도와달라는 말도 계속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일이 잘 안 풀리니 매일 모니터를 쳐다보며 울었다. 기획에 눈을 떴다고 그렇게 기뻐하고 자만했는데, 왜 잘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고 겸손하지 못했을까 자책을 했다. 


하지만 대표님과 동료들은 나를 실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했다.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할 때도 내 칭찬을 하기 바빴고, 회사에서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도 내 의견으로 반영이 되었다.


되돌릴 수 없는 강을 넘은 것 같았다. 내 마음과 같지 않은 현실에 우울감이 지속되어 휴식기가 필요했다. 3년 동안 몸 바친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집으로 들어왔다. 동료들이 의아해하고 대표님께서는 화를 내는 상황이었지만 모두 외면하고 퇴직을 했다. 1주일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잠만 잤다. 


'디자인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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