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들렀다. 디자인 분야에 한번 쓱 훑어보다가 시각디자인 기초 입문서라는 책을 펼쳐봤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토록 연습하고 일하며 알아낸 지식들이 나만의 노하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내용들이 기초서에 다 들어있었다.
'와, 미대는 입시 때부터 이 노하우를 다 배우고 졸업하는구나.'
기획하면서 막혔던 부분들 중 일부분도 기초서에서 해결법이 있었다. 비전공자인 내가 그동안 또 자만했던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내가 일할 때 만난 신입동료들 중에도 미대 나온 직원들이 꽤 많았는데 왜 실력이 낮았을까. 놀면서 대학을 다녔을 수도 있고, 무슨 뜻인지 모르고 주입식으로 교육받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디자인 기획을 하면서 한계를 느낀 것이, 대학 때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이유라는 것을 한번 더 인지하게 되니 인정하기가 싫었다. 나는 처음 이 사실을 느꼈을 때 겸손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일하는 동안 칭찬에 익숙해져 있으니 다시 자만에 빠졌나 보다. 내가 겸손해지면 작아지는 것 같아서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심리상담을 무료로 해준다는 글을 보았다. 몇 명이 모여서 함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룹상담이었고, 나는 차분히 내 이야기를 꺼냈다.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니 어렸을 적 공부할 때는 어땠냐고 질문이 들어왔다.
어린 시절 나는 늘 집에서 할아버지와 아빠가 경제력 때문에 싸우는 걸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나가서 성공해서 이 모든 걸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했고,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문제 한 문제에 집착하듯 공부를 했고, 초등학생 때부터 밤을 새우며 공부하느라 마음은 너무 힘들었다. 중학생 시절에 반에서 2등을 해서 기쁘다는 이야기를 아빠에게 한 적이 있다. 아빠는 1등이 아니면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이 상처였고, 1등을 해야만 하는 현실에 또 좌절했다.
상담을 받으며 기준이 높은 아빠의 말에 나 또한 높은 이상을 갖게 된 것을 알게 됐다. 뭐든지 잘해야만 했고 잘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여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라는 주변 지인들의 다독임이 마음에 전혀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일을 죽어라 열심히 해야 했고, 내가 할 수 없는 한계점을 실감하거나 그 이유를 알게 됐을 때도 쉽게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 중독에 빠진 것도 이제야 제대로 된 이유를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