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바깥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가는 광기
<조커 폴리 아 되>는 제가 토드 필립스의 <조커>를 보고서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이 되어 기대가 되었던 작품입니다. 사실 저는 <조커>도 두 번 보았는데요. 처음 <조커>를 보았을 때 제 친구 세 명과 함께 보았었는데, 그 중 두 놈이 조커가 웃을 때마다 따라 웃는 통에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한 번 더 보았었습니다. 재밌더라구요. <조커 폴리 아 되>도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대를 하고 보러갔었는데 아니 기대를 넘어서더라구요. 그래서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에게도 많이 추천을 했었는데 다음날 보니 네이버 평점이 1점 찍혀있었어요. 아니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하는 마음에 제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이 영화가 왜 좋은 영화인지 약간이나마 옹호해보고자 합니다. 물론 지금 제가 쓰는 글은 제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고 제가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사람은 저래서 재미있었구나 정도로 읽어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다 적고 보니 좀 깁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하지만 또 조커에 대해 심도 깊게 읽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글의 또 하나의 장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조커 폴리 아 되>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명료한 이유는 구조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돋보이는 개성도 가지고 있는 영화이죠. 먼저 이 영화가 <조커>와 쌍둥이처럼 닮아있으면서도 변주되어 있는 거울관계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편의 오프닝에 쓰러져 있는 아서와 2편의 결말부에 쓰러져 죽음을 맞는 아서가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고, 1편의 결말부 경찰차를 타고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는 조커와 2편의 결말부 경찰차를 타고 연행되어가며 침울한 표정을 짓는 아서가 대비되며, 1편에서 조커가 깨끗한 광대 분장을 하고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은 2편의 아서가 지저분한 모습으로 계단을 올라오는 장면과 대비됩니다. 리가 권총으로 자살하려던 장면은 아서가 머레이 쇼에서 자살하려던 장면과 이어지구요. 조커가 3명의 교도관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은 아서가 지하철에서 폭행당하던 장면과 이어집니다.
그런데 두 영화의 특성상 무엇이 조커와 할리 퀸의 망상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렵죠. 말하자면 철저하게 이어진 두 영화의 구조는 마치 공유 정신병처럼 관객이 스크린으로 보는 두 영화가 모두 현실이 아닐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의 이러한 특징을 살려주는 광인의 시선으로 본 알록달록한 색감의 기이한 연출, 그리고 열린 결말은 그동안에 본 어떤 영화와도 다른 독특한 미감을 관객에게 선사하는 것이죠.
영화의 두번째 구조적 장점은 극중극의 존재입니다. 투니툰 형식의 영화 오프닝은 기괴하고 아기자기한 연출과 더불어 영화의 줄기를 잡아주는 길라잡이 역할도 하고 있죠. 산보다는 사랑이 필요하다며 조커가 오프닝에서 부르는 노래 가사는 이후의 수많은 뮤지컬 장면에서 나올 할리 퀸의 산을 쌓겠다는 대사와 완전히 모순됩니다. 뮤지컬 장면을 블랙코미디로 둔갑시켜버리죠. 해당 노래 가사도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해주는 좋은 라인이지만 조커의 그림자가 조커를 조종한다는 기발한 상상력과 교도관들이 조커를 폭행하며 터져나온 피가 극의 시작을 알리는 커튼으로 보여지는 장면이 더 감탄스러웠습니다.
리와 아서가 교도소에서 시청하던 영화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네요. 해당 영화는 오이디푸스 연극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영화 속 배우는 오이디푸스를 연기하며 계단을 내려간 적이 있다고 말하죠.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운명을 피하려 했지만 오히려 운명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는 점에서 아서와 유사합니다. 계단을 내려갔다는 대사도 소름이 끼치죠. 더욱이 소름끼치는 것은 아서와 리의 반응인데, 아서는 눈물을 흘리고 리는 씩 웃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서를 찔러 죽인 죄수의 농담도 아서와 죄수를 비유한 하나의 극중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의 미장센도 훌륭합니다. 인상 깊은 장면들이 한두개가 아닌데요. 어두운 감방안에서 담뱃불이 확 타오르며 아서의 얼굴을 밝히고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젖히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구요. 비 속에서 홀로 웃고 있는 아서를 몇 초 간 비추다 별안간 음소거가 되며 아서의 절규하는 얼굴만이 남는 장면, 죽어가는 아서 뒤로 낮은 심도의 화면 속에서 죄수가 칼로 입을 찢어버리는 기묘한 연출도 좋았습니다. 아서가 독방으로 내던져지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데 독방의 좁은 창문으로 아서의 얼굴만이 보이게 연출한 장면도 인상깊었네요.
인물 간의 관계는 어떨까요. 영화 속 인물 간 관계 형성은 간접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두 조커 영화 내 주연인물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정신질환자들이죠. 이 정신질환자들 사이를 매개하는 오브제가 TV입니다. 저는 이 TV라는 오브제가 두 영화 각각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아서가 TV를 통해 우상 머레이와의 관계를 형성했듯이, 페니가 TV를 통해 토마스와의 관계를 형성했듯이, 리도 TV를 통해 우상 아서와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리는 조커와 함께 교도소에서 말썽을 일으키지만 아서를 교도소에서 구해주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그녀는 노래를 부르는 아서의 모습이 담긴 TV를 훔쳐 품에 소중히 안습니다.
이렇듯 <조커 폴리 아 되>에서 리의 행적은 <조커>에서의 아서와 거울 관계에 있습니다. 상류층을 동경한 하류층. 하류층을 동경한 상류층. 환상을 잃어버리며 할리 퀸이 된 리와 환상을 만들어내며 조커가 된 아서. 결국 마지막까지 리와 아서가 서로를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은 상류층과 하류층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영화의 결말을 강조합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공유정신병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서가 아닌 조커만을 사랑했으나 조커의 본질인 아서와 점점 닮아가는 리를 의미하기도, 조커에 열광하며 아서가 손쓰기 불가능할 정도로 고담 내에 퍼져나가는 광기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TV와 광기에 대해 더 이야기하자면 조커가 머레이를 죽이는 장면에서 갑작스레 화면이 전환되고 조커의 모습이 송출되는 수많은 TV화면을 비춘 것을 기억하시나요. 이는 아서가 머레이를 아버지의 상징으로서 TV를 통해 받아들인 것처럼 그순간 수많은 군중들이 아서를 조커라는 상징으로 받아들였음을, 또 그 상징이 번져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연출입니다. <조커 폴리 아 되>의 결말부, 아서가 조커는 없다고 선언할 때도 영화는 조커를 직접 조명하기 전에 교도소의 TV화면을 클로즈업합니다. 관객들도 화면을 통해 아서를 조커라는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메타적으로 드러내는 연출입니다. 카메라맨을 쏴죽이던 조커의 환상, 면회 전에 만화영화를 멍하니 응시하던 아서를 고려해보면 감독이 메타적인 요소를 통해 극장을 극의 일부로 포함시켰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메타성은 영화의 주제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많은 관객들이 아서를 제대로 바라봐주지 않고 혹평을 내리는 관객들이 오히려 메타적으로 영화를 완성시킨다는 평을 내렸는데,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 정확한 평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혹평도 틀린 의견이 아닙니다. 아서라는 한 개인이 조커를 포기하는 결말은 어떤 면에서는 전작을 부정하고 퇴보시킨 것임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지 1편의 감동을 반감시킬 뿐만 아니라 조커라는 역사적인 악역을 무의미하게 소모시키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커라는 캐릭터를 감독이 무시했다는 평은 과해보여요. 두 영화를 모두 보았을 때, 감독은 조커 등장 코믹스 중 가장 유명한 킬링 조크를 상당 부분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킬링 조크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광인 조커가 실은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그의 농담을 통해 암시하거든요. 조커가 미치지 않은 채로 1편의 범죄를 모두 저질렀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그를 더욱 섬뜩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이기도 한 것이죠. 그런데 연출상으로는 그런 섬뜩한 느낌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 비판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어쩌면 1편 이후 미국에서 들끓었던 조커 비판 여론을 의식하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음악은 좋았지만 뮤지컬 장면도 저는 불호였구요.
이상하게 침잠하는, 잔혹하고 신나는 영화. 광기의 몰락을 다루었지만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까지 논쟁이 번져가게 한 영화.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 폴리 아 되>입니다.
평점 4/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