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기를 바라지 않아요
호주학교는 부모님들이 참여하는 학교 행사가 많다.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아이들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번갈아가며 휴가를 내고 행사에 참여하려 노력한다. 꼭 모든 행사를 참여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기회에 아이의 학교 생활도 엿볼 수 있고, 아이와 좋은 추억이 남길 수 있어서 최선을 다해 함께하려고 하는 편이다.
학교에서 곧 있을 아이들의 소풍을 위해 학부모 헬퍼들이 필요하다는 공지를 받았다. 저학년 아이들 소풍에는 많은 학부모 지원자들이 몰린다. 공지를 받자마자 바로 지원했는데도 지원자가 많았는지, 기다리라는 답변을 받았다. 초조하게 한 달 같은 일주일을 보내고 '축하드려요 ㅇㅇㅇ반 소풍 학부모 헬퍼로 선택되셨습니다!'라는 이메일을 받았다. 꺅! 소리를 질렀다. 누가 보면 오디션 프로그램 합격통지서를 받는 줄.
학부모 헬퍼 확정이 되자마자 회사에 휴가를 냈다. 무엇을 입고 갈지, 도시락은 어떻게 쌀지. 오랜만에 휴가라 아이 소풍 후에는 무얼 할지. 소풍날에 대한 기대가 듬뿍 피어났다. 소풍 가는 아이보다 내가 더 들떠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아이 때 소풍 헬퍼 지원했다가 모두 낙방을 해서 아이 소풍에 따라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큰아이마저도 꼭 둘째아이때는 소풍 같이 가주라고, 엄마 오는 아이들이 부러웠다는 말에 가슴이 아파서 꼭 둘째 아이를 위해 소풍 헬퍼를 꼭 하고 싶었다.
드디어 아이의 소풍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바쁘게 도시락을 싸고 들뜬 마음으로 아이와 함께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에 아이들 데려다주러 온 엄마들하고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수다를 한참 떨고 난 후, 아이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아이가 수업시간에 만들기 하고, 글쓰기 했던 작품들이 교실 곳곳 걸려있었다. 아기 같기만 하던 아이가 열심히 학교생활을 한 흔적들을 보니 뿌듯했다. 이 맛에 아이 학교 와보는 거지! 싶었다.
소풍일정에 관한 설명을 듣고, 버스에 올라탔다. 우리 아이와 버스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소풍을 갈 거라고 상상했는데... 우리 아이는 이미 단짝 친구와 둘이 버스에 앉아 신나게 이야기를 하느라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 소풍이 그런 거지. 친구랑 버스에서 실컷 떠들다 웃으며 가는 거. 서운함도 잠시, 잘 크고 있구나 싶은 뿌듯함에 웃음 지었다.
마침내 행선지에 도착했다. 오늘의 소풍장소는 박물관. 아이들 데리고 수 없이 다녔던 박물관이라 눈 감고도 어디가 어디인지 잘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자신감이 뿜뿜이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5그룹으로 나누어 각 학부모 헬퍼들이 한 그룹씩 지도하도록 하셨다. 나는 우리 아이를 포함한 호주 아이들 5명의 일일 지도선생님의 역할을 하게 됐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내 말을 잘 들어주었다. 그룹에서 한 명이라도 낙오되면 자기들끼리 가서 낙오된 친구를 찾아오고, 오래 걸린다 싶으면 서로 재촉하기도 하고. 기특한 아이들 덕분에 내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소풍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질문지와 연필을 나누어주셨다. 질문지에 빈칸 채워오기! '역시 어느 나라든 소풍날 질문지는 필수구나! 싶었다.
선생님께서는 질문지를 전달받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다.
"ㅇㅇㅇ반 여러분! 선생님은 여러분이 질문지를 모두 완벽하게 다 해오길 바랄까요?"
그러자 아이들이 늘 하는 질문이라는 듯 모두 합창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맞아요. 그럼 선생님은 우리 ㅇㅇㅇ반 여러분들이 각자 좋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려 최선을 다하길 바랄까요?"
아이들이 다시 다 함께 합창했다 "네!!"
아니, 질문지는 주시면서 완성해오지 말라니.. 내가 지금 잘 못 들은 건가? 선생님께서 주시는 과제는 모두 열심히 다 해와야 하는 거 아닌가?
이게 맞나 하는 엉뚱한 표정의 나를 뒤로 두로, 늘 선생님과 하는 이야기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은 흩어져 질문지를 채워나갔고, 그곳에서 나는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아이들은 첫 질문부터 시작하기보다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질문들부터 답을 써 내려갔다. 답을 찾지 못하는 질문이면 고민하다가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자기가 못 찾는 질문은 다른 친구의가 적은 답을 받아쓰려 하지 않았다. 서로의 것을 보고 적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이들의 답은 모두 가지 각색이었다. 몇 아이들은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토론의 장을 열기도 하고, 자신이 찾은 새로운 발견에 대해 친구들에게 알려주며 신이 나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중 가장 놀라왔던 건 시간 내에 질문지를 다 끝내지 못한 아이들이 전혀 실망한다거나 기죽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아이들의 목표는 완성이 아니라 최선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다 해오세요" "답을 찾아오지 못하면 점수가 깎일 거예요" "다 끝내지 못한 건 성의가 없는 거야"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평생 익숙해져 있었다. 안 해도 돼. 덜해도 돼.라는 편안한 말이 나에게 거슬려 질정도로.
어른이 되어보니 질문지 한 장, 시험, 수행과제.. 그 어떤 거 하나 안 하거나 덜한다고 내 인생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던데.. 내가 어릴 때 누가 나에게 이런 걸 알려줬다면, 내가 이 지긋지긋한 완벽주의를 가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집에 돌아오며 아이에게 물어보니, 아이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과제를 주시면서 늘 하시는 말씀이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내가 세운 나만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것이 완성이 아니라도 괜찮다는 걸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만큼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없더라.
완벽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최선으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