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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린 Oct 28. 2024

이웃 호주할머니의 반전 과거

재택근무를 하는 나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점심시간에 혼자 조용한 동네산책하며 머리도 식히고 기분전환을 한다. 쌀쌀하지만 햇살도 반짝거리고 꽃도 새싹도 반겨주는 봄날. 높고 푸른 하늘과 봄꽃들을 구경하다 한 이웃할머니가 집 마당에 나와계신 걸 보았다. 할머니는 예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날 보자마자 반갑게 손짓하셨다.


호주에서 지금껏 살며 만난 할머니들은 눈만 마주치면 반갑다고 인사하시고 말 걸어주시고, 이야기를 재밌게 듣는다 생각하시면 날 보내줄 생각 없는 듯 끝없이 이야기를 하시는 다정하고 귀여운 할머니들이셨다.


내가 다가오자, 할머니는 나를 처음 보는데도 자주 놀러 오는 손주처럼 따듯하게 안부 물어주시고 오늘이 분리수거통 수거날인지, 일반쓰레기 수거날인지 물으셨다. 우리 동네는 각 쓰레기통을 격주로 내놓아야 하는데 그 주에 정해진 쓰레기통을 내놓지 않으면 수거해가지 않아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 할머니께 오늘은 일반쓰레기와 정원쓰레기 수거 날이라고 알려드리면서 small talk을 이어갔다.


외국인이라 생각했는데 말이 통한다 싶어서 반가우셨는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할머니 성함은 Lesley. Les(레스)라고 불러달라고 하셨다. 레스 할머니는 2년 전 뇌졸중에 걸려 쓰러지셨고, 그때부터 거동이 어려워지셨다고 했다. 레스 할머니를 보니 무릎이 안 좋으시다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가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팠다. 조심스레 혹시 가족들이 함께 사는지 여쭈었는데, 형제자매 없는 외동딸에 본인이 직접 모시고 살던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혼자가 됐다고 하셨다. 바쁘게 사느라 결혼도 하지 않으셔서 남편도 자식도 없으셨다. 큰집에 혼자 강아지랑 사시는 게 쓸쓸해 보였고 더 일찍 할머니를 만나 빨리 친구가 되어드리지 못한 게 후회가 되었다. 마음은 할머니와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눠드리고 싶었지만 남은 근무를 해야 했기에 할머니께 꼭 다시 오겠다고 인사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부터 나는 80세 레스 할머니의 새 친구가 되었다. 레스 할머니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다. 할머니는 거동이 어려워진 본인 때문에 Ruby(루비)가 걱정이라 하셨다. 할머니가 쓰러지신 후 루비가 2년 동안 밖에 나가지 못해 사람도 다른 강아지도 만나지 못했다고. 루비는 잭 러슬이라는 종의 강아지다. 잭 러슬은 영화 '마스크'에 주인공의 강아지로 출연한 적 있는 아주 작고 빠르며 촐싹대는 강아지이다. 워낙 빠르고 가벼운 성격에 살도 잘 찌지 않는 강아지 종이다. . 하지만 내가 루비를 처음 봤을 때, 루비는 운동을 하지 못해 엄청나게 늘어난 체중에 금방이라도 똑 부러질 것 같은 다리가 부들부들 떨며 버티고 있었고, 점프는 불가하고 걷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도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고 꼬리를 힘껏 흔드는 루비가 안타까웠다. 그런 루비를 볼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찡해졌다. 그런 루비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주말에 시간이 생길 때마다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레스 할머니댁에 들러 할머니 안부도 묻고, 우리 강아지 산책하는 겸 루비를 함께 데리고 산책했다.


레스 할머니와 서로 집도 방문하고 티타임도 가지면서 더욱 가까워지게 되자,  할머니께서 조금씩 본인의 과거 시절 이야기를 해주셨다. 레스 할머니는 젊으실 적 크루즈 선상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셨다. 적어도 50-60년 전에 말이다. 할머니는 그 일 덕분에 세계일주도 하시고 캐나다, 노르웨이 등 해외에 몇 년씩 살아보기도 하셨다고 한다. 노르웨이에서 크루즈를 타던 시절, 달에 처음 발을 내디뎠던 닐 암스트롱을 만난 이야기를 해주셨다. 레스토랑에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레스뿐이라 직접 닐 암스트롱과 이야기를 나누고 도와드렸다고 한다. 노르웨이에서 직접 말을 키우고 승마도 하셨다고 한다. 드넓은 들판에 말을 타고 달리는 자유로운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니 내가 다 짜릿해졌다.


호주로 귀국하신 할머니는 캠핑카를 사서 단짝 친구랑 둘이 캠핑카를 타고 호주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하셨다고 하셨다. 그때서야 할머니댁 뒷마당 구석에 우거진 나뭇가지들 사이에 엉켜 할머니와 함께 나이가 든 캠핑카가 눈에 들어왔다. 녹슬고 부서지기도 했지만 할머니의 추억이 모두 담겨있는 캠핑카가 무척 낭만스러워 보였다. 레스 할머니는 나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실 때마다 진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무척 행복해 보이셨다.


나는 왜

80세에 남편도 아이도 형제도 없이 혼자 사시는 할머니의 삶은

꼭 외롭고 쓸쓸한 인생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모든 이의 인생은 빛이 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매년 호주의 명절인 크리스마스과 부활절에는 아이들과 카드와 선물을 사서 레스 할머니께 드린다. 올해부터는 할머니의 생신날을 게되서 생신날 케이크를 들고 찾아뵙기도 했다.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살아서 명절에 가족들을 만날 수 없는 우리 가족과, 가족이 없어 명절날에 쓸쓸히 계신 할머니는 꼭 서로 만나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나에게 할머니 같기도 친정 엄마 같기도 이모, 고모 같기도 한 의지가 많이 되는 존재다. 레스 할머니께서 오래오래 우리 곁에 계셔 주셨으면 좋겠다.


작년 크리스마스,  할머니에게 드릴 선물과 초콜릿을 포장하던 어느 날, 우리 작은 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왜 우리는 매년 Les할머니에게 선물을 드리는 거야?"

"크리스마스에는 가족끼리 선물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잖아. 이웃도 가족 같은 거야. 함께 나누면 좋은 거야. Sharing is for caring!(나눔은 아끼고 사랑하는 거야)"라고 내가 답했다.

그러자 아이가 결심을 한 듯 말했다.

"엄마, 나도 커서 할 일이 생겼어. 나도 크면 크리스마스 때마다 엄마처럼 이웃들에게 선물할 거야"



그래, 아가. 그렇게 크렴.


나눗셈은 몰라도 된다. 네가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덧셈을 몰라도 된다.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된다면.  

곱셈도 몰라도 된다. 그렇게 살았을 때 너의 삶이 배로 행복해진다는것만 알아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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