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투쟁'이라고 쓰여있는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주먹 쥔 손을 흔들며 시위를 하는 어른들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뿌연 연기가 나는 것을 던지기도 하고, 몸싸움하다가 다치시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뉴스를 보면서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저 아저씨들은 머 하는 거야?' 그러자 아빠가 '어휴.. 적당히들 해야지. 뭐든 더 받으려고 저러는 거야' 하셨다.
사실 1997-8년은 IMF로 수많은 회사들이 경영난을 겪었고, 많은 회사들이 파산을 막을 방법으로 회사를 팔아버리고, 수천 명의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았다. 수년을 다녀온 회사가 하루아침에 나와 내 가족의 숟가락을 치우는데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이것을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됐다. 아빠가 말한 것처럼 그 당시 몇몇 언론에서는 파업을 하는 사람들을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려고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귀족 노조'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불법 노조'라며 불법을 저지르는 나쁜 아저씨들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몇몇 언론의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진짜 '귀족 노조'를 직접 본 적이 있다. 그것도 이곳 호주에서.
리쿠르트(Recruitement) 에이전시에서 일을 할 때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도로 및 철도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직원들을 고용해 파견하는 사업을 했다. 사실 직원들의 공식적인 고용형태는 일용직이지만 한번 파견이 되면 짧게는 1-2년에서 길게는 10년 이상 일했다.
호주에서는 위험수위가 높고 일하기 힘든 환경에서 일하는 경우 페이를 더 받는다. 야외 건설 현장의 인부들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건설 현장인부들은 야간근무나 이른 아침근무를 하는 사람은 기본 시급의 1.5배를 받으며, 토요일 근무는 1.5배, 일요일 근무는 2배, 공휴일 근무는 2.5배를 받는다. 예측 불가능한 섬 날씨의 호주에서는 날씨에 따라 받는 혜택도 있다. 비 오는 날 일을 하면 추가 수당을 받고, 야외 온도가 38도가 되면 즉시 퇴근을 해야 한다. 날씨가 너무 안 좋아 현장근무를 접어야 하는 경우, 단 1시간 일을 했더라도 미니멈 4시간에 해당하는 시급을 지급하도록 되어있다. 이 외에도 식비, 차비 등이 일당에 더해진다. 11년 전, 내가 건설현장에 나가는 직원분들의 급여를 담당했을 때, 그분들의 최저 시급이 호주달러로 $20.24불, 약 만 9천 원 정도였는데, 그분들 일주일을 일해서 받아가는 급여가 $2,000불을 웃돌았다. 그 당시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200만 원 정도 되는 돈을 일주일 급여로 받았던 것이다. 내 월급에 몇 배가 넘는 급여를 계산해 드리면서, 나도 사무실에서 계산기를 만질게 아니라 나가서 삽을 들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급여지급 소프트웨어를 바꾸고 시범운영을 해보는 프로젝트 진행 중 계획했던 일정들이 틀어지면서 딱 한번 급여가 제때 못 나간 날이 있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그야말로 사고였다. (10년이 넘도록 일하면서 아직까지 급여날 사고가 터진 것은 딱 그때 한 번뿐이다) 급여가 나가지 못한 그날, 아침부터 우리 payroll팀과 회계팀장님, 사장님은 출근과 동시에 불나는 전화를 붙잡고 사과를 하느라 애를 먹었다. 분명 하루만 기다리면 급여가 차질 없이 나갈 예정이었다. 설명을 드리고 설득했지만 여전히 역정을 내시는 분들은 대부분 건설현장 일용직 분들이셨다. 결국, 건설업계의 Union(노동조합)에서 전화가 왔다. (담을 수 없는 욕은 생략하고) 노동조합에서는 '임금이 제때 안 들어와서 차비가 없어 일을 못 가겠다!'라고 말했다 즉, 파업을 선포한 것이다. 아무리 일주일에 한 번 급여를 받으시는 분들이라도 어떻게 $2,000불이나 되는 돈을 몽땅 다 쓰고 차비가 없어서 회사를 못 간다니.. 이것이 '귀족 노조' 구나 싶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건설현장에 일용직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아서 하루 공사를 손해를 보게 생겼다고 건설회사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왔다. 결국, 우리 사장님께서 사비로 직접 일용직 직원들에게 차비와 식비를 보내주고 나서야 건설현장 일용직 직원들이 출근을 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바로 다음날 모든 직원분들의 급여가 지불됐다.
일이 마무리가 되고 나서, 나는 사장님께 물었다. 어떻게 일주일마다 $2,000불을 꼬박꼬박 받는 분들이 차비가 없을 수 있냐고. 그분들의 거짓말에 속으신 거 아니냐고. 사장님께서는 그 말이 내 말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분들은 대부분 급여가 들어오는 즉시 술집이나 도박장에 가서 돈을 다 탕진해요. 그 외도 탕진할만한 이유는 많죠. 급여가 들어오지 않아서 차비도, 식비도 없다는 건 거짓말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아무리 탕진하고 탕진을 해도 꼬박꼬박 일만 나가면 일주일마다 계속 $2,000불씩 채워지니까 그 돈의 소중함이 절실하지 않았던 걸까. 고된 육체적 노동에 힘든 몸을 위해 화려한 금융치료가 필요했을까. 자고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나보다 돈 많이 버는 사람들 걱정이라 했다. 무슨 이유로 탕진을 하건, 그건 그분들의 인생이고.
당시 새내기 직장인이었던 나는 열심히 일을 해서 승진도 하고, 월급을 많이 받는 사람이 되면 부자가 될 거라는 막연한 꿈을 꾸며 살았다. 이 일을 계기로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다 부자가 되는 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어느 책에서 읽은 한 문구가 생각난다. '돈을 사람처럼 여겨라'. 단 한 사람이라도 나에게 온 사람을 가볍게 대하지 않아야 하듯, 단 한 푼이라도 나에게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사람도 돈도 나에게 머물 것이다.
"It’s not your salary that makes you rich, it’s your spending habits." – Charles A. Jaffe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것은 월급이 아니라 소비 습관입니다. - 찰스 A 재프 <미국의 금융 저널리스트이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