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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를 당하다

회사와 이별을 고하며

by 최현숙 Apr 10. 2025

2월 27일 목요일 아침, 유럽에 있는 팀원들과 맹맹한 미팅을 하고 있었는데 매니저에게 슬랙 톡이 왔다. 급한 일이니 바로 미팅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성급히 줌 미팅에 들어가자마자, 매니저는 원고를 읽듯이 말했다. 내 포지션이 없어졌고 그 이유는 회사 구조조정과 AI 투자라며. 내 얼굴은 얼어 갔고 매니저는 3분 만에 황급히 미팅을 종료했다. 아.. 드디어 내게도 왔구나.


5분이나 지났을까? 이멜도, 슬랙도, 내 회사 어카운트가 갑자기 마비되었다. 자택근무를 하던 나는, 내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이런 소식을 감내해야 했다. 세상과 연결되었던 문과 창문이 갑자기 잠겨 이 좁은 공간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온 소식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17년을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나는 회사 컴퓨터가 내 과거 기록의 전부였는데, 순간 컴퓨터가 먹통이 되었다. 인터넷 브라우저도 막혀버렸고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았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나의 새로운 현실. 울타리가 없어지고 바람막이가 날아가니,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실은 오토데스크라는 회사는 내게 고마운 존재였다. 이혼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날 든든히 지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미국 기업의 문화와 운영방식에 대해 배우며 내 커리어가 자라 갔다. Make Anything이라는 회사의 미션도 너무 맘에 들었었다. 주변에 보이는 자동차, 건물, 고속도로, 영화 등에 우리 회사의 제품이 쓰였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오토캐드가 가장 유명한 제품으로 창업 이후 40년을 견뎌온 튼실한 기업이다.


그렇게 17년이라는 시간과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정리해고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며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내 정체성에 대한 상실감이었다. 나라는 사람, 평생을 일하며 나름 커리어 우먼으로 자부심을 갖고 살았는데, 그 정체성을 떨치고 남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새롭게 알게 된 지인은 내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자세한 설명을 하기도 뭐해서, 그냥 한글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칩니다라고 했더니, 눈이 동그래지더니 묻는다. "그게 풀타임 잡이예요?" 토요일 오전 3시간 만을 할애하고 있지만, 이제 나의 정체성은 한글을 가르치는 50대 아줌마이다.


한주 한주 지나다 보니 어느새 6주가 흘렀다. 회사라는 허울을 벗고 나니, 오히려 걱정보다는 속박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더 크다. 물론, 다시 취직을 할 수 있을까? AI시대에 내 스킬이 아직도 쓸만한가? 적잖은 우려가 있지만, 일단은 내 복잡했던 머릿속을 비울 수 있어서 감사하다. 17년을 한 회사에서 일한 덕인지 다행히 퇴직금이 나쁘지 않다. 누구는 아무 생각 없이 3개월을 푹 쉬어 보라고 했다. 50대 중반으로 달려가는 나이, 인생을 점검하고 앞으로의 남은 생을 설계해야 하는 데, 성급하게 일자리를 찾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했다.


지난 2년, PM으로 일을 하면서 느꼈던 스트레스가 아직도 지긋지긋하게 느껴진다. 내가 맡고 있던 프로덕트가 임팩트는 컸지만, 리더들도 동료들도 앞으로 제품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PM으로서 비전을 제시하기에는 제품의 덩치가 너무 컸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이미 벗어나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난 자꾸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내 목소리를 내며 일을 하기보다는 리더들과 동료들에게 맞추고 눈치 보기에 바빴던 것 같다. 돈을 떼로 더 줄 테니, 다시 오라고 해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소굴 속에서 무너졌던 내 자존감, 마주할 힘이 아직은 없다.


지난 6주, 주변 사람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이력서를 리뷰해 주는 친구들, 내 장점을 상기시키며 브랜딩을 코칭해 주는 예전 동료들, 인생 전반에 대해 조언을 해주시는 선배님들,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동네 친구들, 고마운 분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회사라는 틀이 사라져도 나라는 사람은 오롯이 남는구나. 앞으로 내 생의 전환기, 어떻게 흘러갈까? 정리해고도 경험이구나. 이를 통해 또 새로운 것을 배우고 느끼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또 마음이 들떴다.


우리 집은 크지는 않지만 건물 사방으로 작은 정원이 있다. 땅이 촉촉할 때 잡초를 뽑아햐 한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작정하고 잡초를 뽑았다. 팔근육이 아파서 진통제를 먹을 정도로 며칠 동안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열심히 뽑았다. 문제는 이 뽑은 잡초를 버리는 일이었다. 마린 카운티에서 준 퇴비통 3-4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았다. 결국 3주에 걸쳐 뽑은 잡초를 버렸고 오늘이 그 마지막 잡초 더미를 버리는 날이었다. 끝내고 앞마당 물청소를 하는데, 내 정원이 꼭 내 머릿속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헝클어져 있던 내 정원이 몇 주에 걸쳐 자리를 잡는 것처럼, 내 머리속도 마음도 정결해지는 느낌. 친구들이 준 화초들이 여기 저기 보인다. 화초를 나눠주는 친구들의 마음이 담겨서 더 정겹다. 그 화초를 돌보는 마음, 잘 자랄 수 있을까 지켜보는 마음이 있어 내 정원이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우리 집 정원은 화려하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지나치게 정리되지 않아서 훈훈하고 인간적이라고 했다. 주변 친구들에게 좋은 조언을 얻으며 다시 나로 돌아가는 것 처럼, 내 정원도 그렇게 훈훈하게 돌아왔다.


자유와 해방감을 통해 온전히 나를 바라보며 다시 내 인생을 설계하려고 한다. 내 인생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던 오토데스크, 이제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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