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part 1과 이어집니다.
슬로베니아에 오는 사람들은 거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버스를 타고 이탈리아에서 출발해 헝가리로 가는 길에 지쳐 하루 묵었다 가는 유형이거나 오스트리아에 갔다가 욕심을 내 슬로베니아까지 들렀다 가는 유형. 그래서 슬로베니아에 길게 있어봤자 사흘, 나흘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슬로베니아는 아주 작은 나라다. 우리나라 전라도 크기라고 보면 된다.
차로 한두 시간이면 슬로베니아 어디든 갈 수 있다. 심지어 조금만 더 멀리 가도 국경을 넘어버리기 때문에 긴급여권을 가진 나로서는 아주 조심해서 이동해야 했다.
물론 긴급여권으로도 입국은 할 수 있겠지만 다시 슬로베니아로 돌아오는 게 불가능하다. 나는 이미 슬로베니아에서 출발하는 한국행 티켓을 갖고 있었기에 국경을 넘을 수 없었다.
아무튼 이런 작은 나라에 40일 동안 발이 묶였다는 말은 즉, 겨울 문턱에도 바다를 찾아갈 정도로 구석구석 가보았다는 뜻이다. 여행객 대부분이 이탈리아 동북부에 있는 ‘트리에스테’에 갈 때, 나는 슬로베니아 끝자락에 겨우 걸쳐있는 ‘이졸라(Izola)’에 갔다.
자칫하면 국경을 넘을까 걱정될 정도로 이탈리아와 가까이 붙어 있는 바다 마을이다. 그런 아슬아슬한 국경 타기를 하면서 느낀 것인데, 색이 짙은 타국 옆에 붙어있는 소도시는 물들어있다.
처음에는 뭐야, 굳이 국경 넘을 필요 없네 하며 좋아했는데, 여러 곳을 가본 뒤로 오히려 슬로베니아 고유의 색을 더 여실히 알게 됐다.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한들 슬로베니아는 슬로베니아니까. 그게 바로 정체성 아닐까.
예상은 했지만 11월 초중순에 바다 마을을 찾는 여행객은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 또 6인실 도미토리를 혼자 썼다. 뭐, 나름 괜찮다. 싼값에 1인실을 쓴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이득이니까. 나는 기왕 이렇게 된 김에 5일 동안 묵기로 했다.
호스텔에는 5일 내내 나와 호스텔 관리인 둘 뿐이었다. 그런 처지라 둘 다 심심한 탓에 이따금씩 시시콜콜 수다를 떨었다.
“오, 오늘도 요리하나요?”
“네, 파스타를 해 먹으려고요.”
내가 재료를 손질하고 있으면, 그가 슬쩍 주방으로 와서 말을 건다.
그는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키가 작고 미국 드라마 프렌즈에 나오는 로스 겔러와 엄청 닮았다. 중안부가 긴 유럽식 말상. 말이 느리고 팔자걸음이 심하다. 왠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일하는 직원 느낌보다는 공짜로 재워준다는 말에 비수기 호스텔을 지키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가 너털웃음을 지을 때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면접 보는 장면이 상상된다. 베개랑 이불만 있으면 어디서든 잘 수 있어요라던가 손님 없으면 나가서 놀아도 되죠?라는 질문을 할 법하다.
“파스타에 콜리플라워를? 좋네요.”
“하하, 슬로베니아가 유독 콜리플라워가 맛있더라고요.”
“그렇죠. 신선하죠.”
그는 별다른 할 말이 없으면서도 파스타가 거의 완성될 때까지 주방 근처를 서성거렸다. 말이 끊길 때면 텅텅 빈 냉장고 문을 열어 누가 두고 가서 썩고 있는 피클 병 따위가 있나 없나 확인했고, 그것도 없으면 차를 끓여 마셨다.
이졸라에 있던 시점에는 이미 류블랴나, 블레드, 크란스카고라, 포스토이나, 마리보르에 갔다 온 뒤라 슬로베니아에 대해 도가 트일락 말락 하는 상태였다. 그와 동시에 슬로베니아에 오랫동안 있었다는 자부심도 살짝 생겼다.
“슬로베니아에는 여행 중인가요?”
“네. 오늘로… 28일 차예요.”
“예?! 28일이요? 왜요?”
슬로베니안들은 대게 이런 반응을 보였다.
내가 장기 여행자라고 밝히면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지 궁금해했다(간혹 너무 놀라 뒤집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 반응이 기묘하고 웃겼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다. 당신들은 왜 오랫동안 있겠다는 내 결정에 의문을 품나요? 작지만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에 살면서.
나는 그렇게 질투 섞인 반문을 하는 대신 기분 좋은 대답을 했다.
“저는 슬로베니아가 너무 좋아요. 안전하고 깨끗하고. 그래서 최대한 오래 있기로 했어요.”
“세상에… 정말 감동적이네요. 이런 말은 처음 들어봐요. 보통 슬로베니아는 잠시 스쳐 지나가고 오스트리아나 이탈리아에 가거든요.”
나는 속으로 ‘저도 사실 가고 싶은데 여권 문제로 갇힌 거예요’라는 말을 삼켰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무슨 콩고물이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이런 처세술만 능수능란 해진다. 그는 무척이나 행복해하며 말을 이어갔다.
“어디 어디 가봤어요?”
"류블랴나, 블레드, 크란스카고라, 포스토이나, 마리보르… “
“와우! 트리글라브 산도 등반했나요?”
“아니요. 아쉽게도 못 했어요. 위험하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쉽진 않죠. 슬로베니아에는 그런 말이 있어요. 트리글라브 산을 올라야 진정한 슬로베니안이다.”
“정말요? 그럼 저는 근처까지는 가봤으니까 반은 슬로베니안이네요.”
“저보다 더 슬로베니안입니다. 저는 근처도 안 가봤거든요.”
이 대화로 인한 것인지 원체 그가 친절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이졸라에 있는 동안 그가 꽤나 잘 챙겨주었다. 물어보지도 않은 맛집을 추천해준다던가, 트레킹 코스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체크아웃이 늦어도 별말 없이 숙박비를 깎아주었다. 내 생에 가장 뿌듯한 거짓말이었다.
이졸라에 오기 며칠 전 어느 잡지에서 바다 사진을 발견했다.
전문가가 각 잡고 찍은 사진이라 실물과 다른 걸 감안하고 보더라도 아주 멋진 바다였다. 사실 이곳에 그 바다를 찾아온 셈이다.
호스텔 가이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며 어디냐고 묻자 숙소에서부터 그 바다까지 가는 약도를 그려주었다.
그곳의 이름은 ‘Moon Bay’다.
직역하면 ‘달 만’이다. 여기서 만이란 바다가 육지 쪽으로 들어간 지형을 말하는데, 그 모양이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스트루냔 국립공원(Strunjan National Park) 안에 있어서 잠깐이지만 하이킹을 해야 갈 수 있다.
나는 유럽 국립공원을 참 좋아한다. 잘 관리하는 것 같으면서 방치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밸런스를 잘 지키는 곳에 가면 자연과 가까워지면서도 인간이 선물한 편리함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와 적절하게 몰입할 수 있다. 이를테면 새소리에 마음이 빼앗겨 심취해 있다가 ‘유럽의 새들’이라는 표지판이 등장하면 스스로 상영 중이던 영화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문베이로 가는 길.
나무 사이 액자처럼 난 틈으로 바다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올라갔다.
중간중간 절벽을 내려다보며 바닷바람에 땀을 식혔다. 어느새 바다가 저 멀리 밑에 깔려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고 뒤이어 문베이가 보였다.
절경이었다. 곶은 많이 봤어도 이렇게 제대로 된 만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치 바다가 너무 푸르고 강렬해서 절벽까지 우적우적 먹어 치운 것처럼 보였다. 그 매혹적인 곡선에 홀려 오랫동안 관조했다.
자연이 빚은 각도는 유려하게 뻗어져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각도를 설계한 뒤 포크레인으로 파낸 것도 아닌데 절묘하게 바다를 감싸고 있었다. 바다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절벽을 깎으며 자라나고 있다. 그런 자연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력감이 든다. 그러나 곧이어 그 땅 위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무력감은 내게서 유리되어 저 먼바다로 떠내려 간다.
이졸라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
그날은 하루종일 바다에만 붙어 있기로 작심했다. 미리 마트에 들러 샌드위치 재료와 간식거리, 로제와인 한 병을 샀다. 레스토랑이나 바에 가지 않고 오직 바다 앞에서 모든 것을 할 계획이었다. 가방에 노트와 책, 스케치북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으로 갔다.
그 해변을 구글 지도에서 검색하면 ‘대중목욕탕’이라고 뜬다. 첫날에는 그게 말 그대로 대중목욕탕인 줄 알고 샴푸를 챙겨서 갔는데, 알고 보니 바다로 들어갈 수 있게 수영장 사다리를 둔 게 전부였다(구글은 대중목욕탕이 뭔지 모르나). 속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뜨끈한 목욕탕에서 때 빼고 광낼 생각에 설렜었는데.
그래도 좋은 점은 잔디밭이 깔려 있어 바다 피크닉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다가 잘 보이는 자리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나는 로제와인을 마시며 바다와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들었다. 그렇게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던 중, 갈매기가 과자 냄새를 맡고 모여들어서 깩깩 소리를 질렀다.
갖고 있던 땅콩 과자를 던져줬다. 갈매기 몇 마리가 엎치락뒤치락 과자를 먹었다. 그 모습이 꽤나 흥미로워서 관찰하다가 갈매기에 관한 시를 썼다.
로제 와인을 반쯤 비웠을 때, 해가 수평선을 향해 슬그머니 내려왔다.
안주로 먹을 그린 올리브 병을 딴다고 잠시 한눈을 팔았다가 다시 앞을 봤는데, 하늘이 그 짧은 시간 안에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야말로 깜짝 놀라 그만 올리브를 쏟을 뻔했다. 그 정도로 명백한 분홍색 하늘이었다.
바다도 그 빛에 물들어 분홍빛 윤슬과 함께 찰랑거렸다. 로제와인 색 하늘, 로제와인 색 구름, 로제와인 색 바다. 아아, 황홀해라.
한 시간 만에 로제 와인 한 병을 혼자 다 마셨다. 분홍빛 노을에 취해 홀짝홀짝 들이키다 보니 술이 없었다.
나는 결국 취했다. 보통 취한 게 아니라 그야말로 만취. 깨어나보니 숙소 침대였다.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로제와인 색 토를 했다.
부분적으로 기억나는 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이상한 걸음걸이로 숙소에 돌아갔고 어딘가에 부딪치며 침대에 쓰러졌고 … 새벽에 잠깐 눈을 떴을 때 화장실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어느새 다시 침대에 돌아와 있었다는 정도. 투숙객이 나 혼자라 정말 다행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취한 건 처음이었다. 로제와인… 그 뒤로 한 방울도 안 마셨다. 우연히 또 로제와인 색 하늘을 발견하면 안 마시고는 못 배길테지만.
P.S 개인적으로 이졸라 옆에 피란’(Piran)’이라는 해안 마을도 추천한다.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문어 샐러드와 맥주를 마시며 바다를 구경하기 좋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촬영지라 더 유명하고 소금 초콜릿도 판다.
이 모든 곳을 아우르는 중심에는 류블랴나가 있었다.
나는 자그마치 5번이나 류블랴나로 돌아갔다. 다른 도시를 돌다가 지치면 류블랴나로 돌아가서 쉬고 또다시 어딘가를 탐험하다가 돌아가서 쉬고. 한국을 떠나기 전 12일은 아예 류블랴나를 벗어나지 않았다.
‘돌아갈 곳’이라는 것 자체가 류블랴나를 집이라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3번째부터는 아, 이제 집에 왔구나라고 생각이 들 만큼 편안했다. 나 같은 길치가 지도 없이 레스토랑을 찾아갈 정도로 익숙해진 것이다.
가끔씩 서울에 있는 내 방을 떠올리면 비교도 안될 정도로 불편한 류블랴나지만, 까짓 거 안 떠올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여기에 오면 최대한 한국의 ㅎ자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류블랴나는 사랑의 도시라는 뜻이다.
그런 이름에 걸맞게 도시 곳곳에 낭만적인 것들이 널려있다.
강을 따라가는 조깅 코스, 도시 중앙 언덕 위에 있는 류블랴나 성, 청동색으로 부식된 드래곤 동상이 있는 다리(이렇게 말하면 별로지만 도시 전설에 드래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낭만 아닌가), 강줄기 따라 즐비한 레스토랑, 그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밝히는 주황색 조명, 주말이면 열리는 과일 장터, 그 옆 ‘닥타리’라는 술집 앞에서 첼로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3인조 악단, 분수대 앞에 앉아 노래하는 버스커, 다리 옆을 지키는 군밤 장수, 라이브 공연이 열리는 야외 펍 중앙에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그것들이 어찌나 낭만적인지 하마터면 길 가는 사람과 사랑에 빠질 뻔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류블랴나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곳은 단연 줄리아 레스토랑이다.
이미 맛집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이라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나는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느껴질 때가 되면 그 레스토랑에 찾아갔다.
부채꼴 패턴 돌바닥이 깔린 뒷골목을 걷다 보면 레스토랑이 모여있는 길이 있다.
쥴리아 레스토랑은 건물 앞에 야외 테이블이 깔려있다. 보통 야외 테이블이라 하면 비에 젖어도 상관없는 철제 테이블과 의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곳은 다르다. 실내에서 쓸 법한 화이트 우드 의자와 테이블을 뒀고, 그 위에 민트색 체크무늬 식탁보까지 깔았다.
그 정갈함 때문인지 사람들은 아무리 추워도 밖에 앉는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난로가 꺼진다 한들 꿋꿋이 앉아있다. 내가 만약 줄리아 레스토랑의 웨이터라면 이 야외 테이블을 싹 치워버리고 싶을 것 같다. 왔다 갔다 이동하기도 힘들고 식탁보가 금세 더러워져서 곤욕스럽겠지. 난로 관리는 또 어떻고. 아무튼 신경 쓴 티가 난다.
검은색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일단 멈춰 서서 바쁜 웨이터가 나를 발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예약 손님을 먼저 안내하고 대뜸 들어온 나에게는 남는 테이블을 준다.
이 레스토랑은 그 흔한 재즈 피아노 노래도 틀어 놓지 않았는데, 그 적막을 채우는 건 사람들의 목소리다. 깨끗한 흰 식탁보가 깔려 있고 유리잔에 물을 수시로 채워주며 클래식한 촛대에 불을 붙여주는 레스토랑 중 음악이 없는 곳은 분명 드물다.
그런데 적막이 나쁘지 않다.
낮게 깔린 웅성거리는 대화 소리, 웨이터가 셔츠를 휘날리며 빠르게 걷는 소리,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 주방에서 뭔가가 떨어져서 챙그랑 깨지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어우러져 그럴듯한 백색 소음이 된다.
하우스 와인 한잔과 문어 샐러드, 웨이터가 추천하는 로스트비프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이래 봬도 쓸 때는 쓰는 여성이다(…40유로 나왔다).
제일 먼저 와인을 받았다. 나를 담당하는 중장년 웨이터가 아주 말끔한 솜씨로 와인을 따라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찡긋 윙크를 하며 미소 지었다. 이탈리아 웨이터의 윙크는 속이 부글거릴 정도로 느끼한 반면 슬로베니아 웨이터의 윙크는 꽤나 담백했다.
이어서 호밀빵이 라탄 바구니에 담겨 나왔다. 나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에 비네가 한 방울을 떨어트려 소스를 만들었다. 조금씩 찍어먹자 빵이 쫄깃하니 맛있었다.
호밀빵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렇게 레스토랑에서 제공되면 한 입이라도 먹어본다. 밑반찬 잘하는 집이 맛있다는 한국의 정설이나 빵이 맛있어야 제대로 스테이크를 굽는다는 유럽 레스토랑의 법칙이나 똑같다.
다음으로 문어 샐러드. 비주얼부터 환상이다.
파란 데이지 꽃문양이 둥글게 새겨진 커다란 도자기 접시에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나왔다. 피란에서도 문어 샐러드를 맛있게 먹었는데, 여기는 차원이 달랐다.
줄리아 셰프가 최초로 문어 양식에 성공이라도 했는지 문어숙회를 세네 명이 먹어도 좋을 만큼 잔뜩 썰어 주었다. 거기에 싱싱한 루꼴라와 얇게 저민 3색 파프리카, 썬드라이 방울토마토, 블랙 올리브(싫어하지만), 레몬 반 조각이 신선한 올리브 오일에 적당히 버무려져 있었다.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샐러드! 비주얼만큼이나 맛도 좋았다. 문어가 탱글 하니 잘 삶아져서 질기지 않았고 무엇보다 간이 딱 맞아서 접시를 비울 때까지 물리지 않았다.
내가 먹는 속도에 맞춰서 스테이크가 나왔다. 이렇게 알맞은 타이밍에 메인 디쉬가 나오면 흐름이 끊기지 않아 좋고 웨이터가 나를 계속 신경 썼다는 걸 알 수 있다. 분주한 유럽 레스토랑에서 이런 대접을 받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따뜻하게 데워진 도자기 접시에 역시나 셰프가 따로 도축 사업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많은 양의 고기가 나왔다. 등심과 토시살이 살짝 섞인 부분인 듯했다.
육안으로 봐도 딱 알맞게 구워졌는지 겉면은 노릇노릇하게 그을렸고 속은 핑크빛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한입 먹자 야들야들한 살이 통후추와 함께 어우러지다가 꿀떡하고 넘어갔다.
이 소는 분명 행복했을 거야. 육즙에서부터 도파민이 뿜어져 나오잖아.
나는 그저 감탄하며, 어쩌면 찔끔 눈물도 흘리며 스테이크 접시를 비웠다.
다시 슬로베니아에 간다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줄리아 레스토랑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다.
나는 류블랴나에서 지내는 일상을 사랑했다. 아침에 일어나 야외 카페에 앉아 카푸치노를 마시며 어제 있었던 일을 노트에 적고, 날씨가 좋으면 류블랴나 성곽길을 따라 오르는 조깅 코스를 두어 시간 뛴다.
개운해진 몸으로 사거리 코너에 있는 5유로 피자를 사서 공원으로 간다. 앉은자리에서 비둘기 눈치를 보며 피자 한판을 다 먹는다. 이걸 다 먹기 위해 뛰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거리를 걷다 마음에 드는 소품샵을 구경하거나 낡은 책방에 들어가 유명한 고전 소설을 찾아보며 낮 시간을 보낸다. 밤이 오면 낮에 갔던 카페가 맥주를 파는 펍으로 바뀌었다. 또 그 자리에 앉아 이번에는 라거 맥주 한 잔을 주문한다. 시원하게 들이켠다. 심심해지면 생각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일상을 보냈다. 그 모든 날들이 좋았다.
내가 슬로베니아에 온 지 35일째 날, 류블랴나는 내게 잊지 못할 선물을 줬다.
그날은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종일 호스텔에 있었다. 이미 이 도시가 익숙해진지라 하루쯤은 그냥 어물쩍 보낼 생각이었다.
그때 내가 묵던 호스텔 방은 철제 침대 10개가 두서없이 놓여 조금 이상한 구조였다. 쓸데없이 방 면적이 넓어서 같은 방인데도 두 가지 냄새가 났다(마치 원머리 투냄새).
왼쪽 벽면 침대 옆을 지나갈 땐 외국인 암내가 진동했고, 안쪽 화장실 가까이에 가면 지린내가 풀풀 낫다. 그래서 나는 창문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침대를 택했다. 그것도 딱히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냄새만 안 날 뿐 침대에 누워 있으면 창문을 통해 길가는 사람들과 자꾸 눈이 마주쳤다.
그때도 몇몇 주민들과 눈을 마주치며 누워 있다가 깜빡 잠에 들었다. 10분 정도 잤을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 눈을 떴다.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줄 알았다.
창문 밖이 시뻘건 색이었다. 그 빛이 방 안쪽으로 들어오는데, 어찌나 붉었는지 핵폭발이 일어난 줄 알고 벌떡 일어나 창문 앞에 붙었다. 하늘이 온통 붉은색으로 끓어올랐다. 저 멀리 류블랴나 강 너머로 지는 해가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맨발로 뛰쳐나갔다. 이런 노을은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 전부 걸음을 멈추고 그 노을에 홀려 있었다. 마치 외계 행성에서 온 UFO가 인간들에게 최면 빔을 쏴서 정신이 빼앗긴 것처럼.
카메라를 든 어느 사진작가는 귀까지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 누구도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카메라로 담거나 그저 멍하니 빛을 바라보았다. 류블랴나에 평생 산 사람도, 이곳에 처음 온 사람도, 35일 동안 머문 사람도 전부 다 태어나 이런 것은 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나는 마치 오랫동안 정들었던 친구와 작별하는 것처럼 애석한 마음에 시달렸다.
이번 여행 기간 84일 중 40일을 슬로베니아에만 있었으니까 그럴 법도 하거니와 긴 여행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까지 어쩐지 서운했다. 물론 떡볶이나 김치찜 같은 것을 떠올리면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띠긴 했지만.
다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대형 마트에 가서 그동안 맛있게 먹었던 정어리 통조림과 토미 마요네즈, 크리스마스 초콜릿, 발포 비타민을 대량 구매했다. 이때는 한국에서도 먹을 생각이었는데, 돌아가서 후회했다. 슬로베니아에서 먹었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몰랐다.
책방에 가서 다 읽은 책을 기부했고, 소피아 할머니가 있는 장난감 가게에 가서 며칠 동안 눈독 들여놨던 유니콘 인형을 샀다. 백화점에 들러 부모님께 드릴 가죽 장갑 두 세트를 샀다. 돌아가는 길에 류블랴나 샵에 들려 유명하다는 트러플 오일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숙소에서 짐을 꾸렸다. 여행하는 동안 낡고 닳아버린 반스 체커보드 슬립온을 두고 가기로 했고, 부피가 큰 후드티나 구멍 난 바지 등 한국까지 들고 가도 옷장에 처박힐 옷들을 버렸다.
쓰레기봉투가 채워짐에 따라 생기는 캐리어 공간에 들고 갈 선물들을 꽉꽉 눌러 담았다. 무거워진 캐리어 무게에 놀라며 내가 낼 추가금액을 헤아려 볼 때서야 어렴풋 이 대장정의 막이 내려간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런 묘한 기분으로는 역시 비행기가 뜨기 전까지 실감이 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되돌아보니 추억 주머니가 가득 차 있었다.
얻어 가는 게 많았다. 그건 내 몸속 깊은 곳에 담아 가는 거라 수화물 추가요금도 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 추억 뭉텅이를 한데 모아 푹 끓여서 사골처럼 우려먹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행복했던 슬로베니아를 뒤로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보고 싶은 가족들과 그리운 친구들의 얼굴을 그리며 긴 비행을 했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국제공항에서 두바이 국제공항까지. 공항에서 4시간 체류한 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인천 국제공항까지. 하루 꼬박 걸려 한국 땅을 밟았다.
부모님이 공항에 마중 나오셨다. 나는 지친 몸으로 엄마 품에 안겼다. 이제 집이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84일 내내 긴장감으로 굳어있던 어깨 근육이 풀렸다.
집으로 오자마자 엄마 밥을 먹었다. 엄마는 며칠 전부터 내가 먹고 싶다고 했던 것들을 준비해 두셨다. 간장 새우, 등갈비 김치찜, 꽈리고추 멸치볶음, 양념 게장까지. 아빠는 겨울에 제철이라는 과메기를 사다 두셨다. 나는 입안 가득 쌀밥을 먹으며 부모님의 사랑이 이토록 진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밥을 먹자마자 내 방 침대에 누웠다. 삐걱 거리는 2층 철제 침대가 아닌 내 침대. 위층에서 코 고는 외국인 남자가 없는 나만의 방. 사랑하는 내 강아지 하루를 끌어안고 한참 쓰다듬다가 잠에 들었다.
4시간 뒤, 새벽 3시. 전화 벨소리에 깼다. 부재중 전화가 10통 넘게 찍혀 있었다. 그 전화는 장례식장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내가 두바이 공항에 도착했던 그 시간에, 내 친구가 죽었다.
그 애는 나와 초등학교 동창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오래된 친구 같지만 초등학교 때 우리는 친하지 않았다. 나는 활달했고 그 애는 내성적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 서울을 떠나 경기도로 전학을 갔다. 10년 동안 다른 지역에 살다가 20대 중반에 다시 살던 동네로 이사 왔다. 돌아온 동네에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시간이 그대로 멈춰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불량식품을 사 먹던 문구점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 계기로 옛 친구들을 자주 만나게 됐고, 자연스레 그 애의 소식을 접했다.
너 그 애 기억나? 우리 같은 반이었는데,라는 말로 그 애 이름을 기억해 냈다.
어쩌다 보니 그 애가 2년 동안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시를 써서 보냈다. 내가 갑자기 다시 이 동네에 이사 온 것처럼 아주 뜬금없게.
그 애는 위로를 받았다며 아주 고마워했다. 그렇게 우리는 단 몇 개의 문단으로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었다.
우리는 전화를 자주 했다.
나는 친구 카테고리가 세세하게 나누어져 있는 편인데, 그 애는 ‘언제 어디서든 전화해서 뭐든 말할 수 있는 친구’에 속했다. 내가 공황장애를 앓은 것도 그 애한테는 너무도 쉽게 털어놓곤 했다. 그 애도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내게 말해주었다.
크리스마스 때, 둘 다 약속이 없었던 우리는 만나서 밥을 먹고 동네 친구 집에 놀러 갔다.
그날 다 함께 손을 모으고 내년 목표를 세웠는데, 그 애의 목표는 ‘행복하기’였다. 고전소설 포함 책 50권을 읽겠다는 내 목표와 달리 그 애의 목표는 도자기가 되기 전 옹기토 덩어리처럼 뭉뚱그린 모양새였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크리스마스 밤, 나는 그 목표를 들으며 그 애 손목에 차오른 분홍빛 새살을 유심히 보았다. 우리가 모은 손목 중 가장 여린 손목이었다.
슬로베니아를 여행할 때, 유독 그 애에게서 전화가 자주 왔다.
류블랴나에 도착한 첫날,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 그 애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해? 책 읽어? 너 진짜 멋있다. 거긴 어때? 좋아?
그 애는 그런 질문을 했고, 나는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그 애는 내가 보고 싶다고 했다. 늘 농담 따먹기만 하는 우리 사이에 보고 싶다는 말은 생소했다. 여행이 길어지니까 얘가 이런 말을 다 하네 싶었다.
크란스카고라에서 멋진 트레킹을 하고 돌아와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을 때도 전화가 왔다.
등산은 어땠어? 멋있었어? 좋아 보이네. 트레킹을 무슨 10시간이나 해.
여기 너무 좋아. 깨끗하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물가도 싸고.
나도 갈까? 일주일만이라도. 너랑 같이 귀국하면 되잖아.
야, 당장 티켓 끊어. 절대 후회 안 할걸.
…… 돈이 없네.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과 우루과이가 접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한 날, 류블랴나 스포츠 펍에서 라거 맥주를 마시며 경기를 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도.
예인아, 너는 행복이 뭐라고 생각해?
행복? 그게 무슨 질문이야. 행복은 그냥 행복이지.
내 올해 목표 기억나지. 행복하기. 근데 나는 행복이 뭔지 모르겠다.
그냥 막연하게 그 단어를 떠올려봐. 최근에 뭘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어?
음…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무사히 밥 먹고, 운동 갔다 와서 핫후라이드 치킨 시켜 먹는 거. 그게 그나마 행복했던 것 같아.
더 큰 행복을 노려봐. 진짜 전율이 돋을 만큼 행복한 것들 있잖아. 너는 그럴 자격이 있는데.
그만큼 행복할 수가 있나.
물론이지. 기왕 태어난 거 응당 누려야지.
류블랴나 백화점에서 엄마에게 줄 가죽 장갑 디자인 중 리본이 달린 게 좋을까 아니면 심플한 게 좋을까 고르고 있을 때도.
예인아. 인생이 뭘까?
얘가 또 왜 이래. 나도 몰라. 인생이 뭔지 아는 사람이 어딨어.
너는 알 것 같았는데.
몰라. 나 지금 바빠.
예인아. 나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 모르는 게 당연해. 우리는 어쩌면 몰라서 살고 있는 거 아닐까?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게 궁금해서라도.
내일이 궁금하지 않아, 나는. 그냥 살고 싶지 않아.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 애는 숨죽여 울었고, 나는 끝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 애를 보고 나약하다고 한 누군가에게 대신 화를 내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너는 왜 화를 내야 할 일에 울고 있냐고 타박하는 말을 덧붙여서.
내일모레 한국에 도착하면 네가 좋아하는 핫후라이드 치킨 사들고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 전화가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그 애는 그냥 그렇게 가버렸다.
칼바람이 불고 추운 날에 여름 재킷을 부랴부랴 입고 온 동네 친구 놈이 손을 벌벌 떨며 운구를 했다.
대절버스를 타고 식당에 들러 그 애 부모님이 사주시는 동태 찌개를 먹고 납골당에 갔다.
한 줌이 되어버린 그 애는 내 책장 한 칸보다 조금 더 작은 공간에 쏙 들어갔다. 그 애 바로 위층에는 그해 10월 29일 날 이태원에 갔다가 별이 된 동갑내기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한동안 사후세계를 건설하는 것에 골몰했다.
인생은 단 한 번 뿐이라는 두려움이 사후세계를 건설할 부품이 됐다.
내 마음속에는 그 애의 이름이 적힌 버튼이 하나 있다. 그 버튼을 누르면 머릿속에 문장이 뜬다.
‘그 애는 죽었어. 다시는 못 봐. 이 세상에 없어.’
그럼 마치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처럼 두 팔에 우수수 소름이 돋으며 사후세계를 건설할 부품이 튀어나왔다. 나는 숱한 후회를 한데 모아 녹였다. 그것은 차츰 단단하게 굳어 벽이 되었고, 여러 부품과 조합해 뼈대를 세웠다.
내가 세운 그 세계는 염라대왕이 심판하거나 천국과 지옥이 나눠져 있는 클리셰적인 세계는 아니다. 형이상학적인 표현으로 그 세계를 소개하자면,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은 꿈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죽은 자들이 그 세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아! 하루라도 더 빨리 죽을 걸!이라고 외치며 이마를 탁 치는 세계 정도면 설명이 될까.
아무튼 수시로 멍 때리며 그런 세계를 짓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애가 보고 싶어 질수록 그 세계는 더 세밀하고 다채로워졌다. 색을 칠하고 향을 입히고 멋진 건물도 지었다. 없는 것을 상상하는 건 그 애를 떠올리는 것이나 사후세계를 짓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 나는 후자를 택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신기했던 부분은 그 애의 죽음과 슬로베니아 여행이 뒤섞여 기묘한 기억 덩어리가 된 것이다. 그 덩어리는 정말 특이했다.
인생 가장 행복했던 기억과 가장 아픈 기억이 섞이면 그것만큼 난처한 게 없다. 이를테면 내가 사랑하는 류블랴나 거리를 걸을 때 그 애가 생일선물로 준 반스 체커보드 슬립온을 신고 있다. 나는 그 슬립온을 닳도록 신었고 류블랴나 호스텔 구석에 버리고 왔다. 처연하게 남겨진 그 신발을 떠올리면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아득해진다.
지금도 그 애와 슬로베니아가 뒤섞인 채 공존한다. 그래서 그 애를 떠올리면 슬로베니아가 떠오르고 슬로베니아를 떠올리면 그 애가 떠오른다. 같이 여행한 것도 아닌데.
한동안 그게 괴롭고 싫었지만 이젠 그저 신기하다. 흥미로운 눈으로 그 덩어리를 물끄러미 보곤 한다.
6개월쯤 지났을 무렵부터 나는 차츰 깨달았다. 나는 그 애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
부모님의 지지와 사랑을 받으며 마음껏 여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 내가 무슨 대답을 하든 그것은 틀렸다. 아무리 멋진 말을 해도 마음으로 가 닿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덜고 덜고 덜어도 남는 건 역시 죄책감이다.
그 애의 신호를 알아듣지 못한 나의 무지에 대한 죄책감. 가장 필요할 때 가장 멀리 있었던 것에 대한 죄책감. 그 애가 눈물을 흘린 곳이 어두운 자취방이 아니라 노을이 타오르는 류블랴나였다면 좀 더 빨리 마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애가 죽어서 또 다른 세계로 가던 길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내가 아니었을까. 이상한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그 애가 죽은 그 시간 나는 두바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 애를 배웅한 것이다.
나오지 마 나오지 마하며 손사래 치는 그 애.
아이, 됐어. 해발고도 11,000m까지만 갈게 라며 따라 올라가는 나.
오늘은 그 애의 첫 기일이다.
나는 독일 뮌헨의 한식당에서 한 병에 18,500원짜리 소주를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바텐더에게 잔을 두 개 달라고 하자 말없이 건네주었다. 내 얼굴에 자세히 묻지 말라고 쓰여있는지도 모르겠다. 눈 오는 거리를 뚫고 와 침울한 표정으로 바 테이블에 앉아 깡소주만 마시는 사람에게는 뭔가 사연이 있다고 추측할 법하다.
잔에 소주를 가득 채우고 혼자서 짠 하고 부딪쳤다.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 맛은 달고 쓰고 끝맛이 역했다. 그 애는 약을 먹기 시작한 뒤로 술을 끊었으니 나와는 처음으로 술을 마신다.
낮에 노이반슈타인 성에 다녀왔다. 오늘은 그 애와 함께 여행한다고 상상하며 계속 혼잣말을 했다.
눈이 많이 오네. 이따 못 돌아가는 거 아니야? 독일도 되게 춥다. 뭐 먹을래? 네가 좋아하는 핫후라이드 치킨은 없는데, 치킨 케밥이라도 먹을까. 여기 눈보라 정도는 하늘에서 네가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 거 아냐? 힘들어죽겠네. 정말 예쁘다. 너무너무 아름답다.
마치 내가 그 애의 발이 된 것처럼 열심히 걸었다.
그런 하루를 보내고 여기에서 소주를 마신다. 한 병을 금방 비웠다.
음.
이런 얘기를 털어놓은 게 처음이라 뭐라고 끝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지금 드는 생각인데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 뚫려서 그 애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꼭 물어보고 싶다.
너를 배웅해 준 건 정말 나였어? 그때 내가 그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을 때 우리가 정말 만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