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려본 사람만 안다
'유럽여행'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걱정이 있다.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소매치기'와 '배드버그'다. 나는 운 좋게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없어 배드버그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어떻게 보면 소매치기와 같은 맥락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뺏긴다는 행위는 같으니까. 가해자가 사람이 아니라 벌레고 뺏긴 게 돈이 아니라 피일뿐이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많-이도 물렸다.
마지막에 물렸을 때는 '또야? 지긋지긋하네'라는 한숨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내가 특별히 더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샤워 자주 합니다) 값싼 호스텔에 자주 가서 그렇다.
근데 또 호스텔 때문이라 단정 지을 순 없다.
똑같은 호스텔, 똑같은 방에 며칠 동안 지냈어도 나만 물린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늘 외로운 싸움을 했다. 물린 사람이 여럿이면 다 같이 몰려가서 환불해 달라고 따질 수 있었을 텐데, 나만 물렸으니 되려 내가 원인 같지 않은가.
서양인 피는 널렸으니까 희소가치가 있는 동양인 피를 마시자.
배드버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억울한 상황도 있었다.
자, 이렇게 서두를 던졌으니 심심한 과학자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배드버그가 동양인 피를 더 좋아하는지 실험으로 밝혀주시길 바란다.
A. 배드버그, 우리나라말로 빈대입니다.
아무래도 한국인들은 생소할 수밖에 없으니 이들에 대해 소개하자면(배드버그 대변인은 아닙니다), 습하고 어둡고 더러운 환경을 좋아합니다. 특히 침대 매트리스 밑이 주 서식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식은 동물이나 사람의 피를 먹고사는데, 성충은 체중의 최대 6배 이상의 혈액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봐야 얘들 몸무게가 얼마나 되겠나 싶겠지만, 문제는 피의 양이 아니니까요. 그냥 강력한 놈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밤에 활동합니다.
가끔가다 낮에도 보일 때가 있는데, 인간들도 밤낮이 바뀔 때가 있으니 그런 경우 아닐까 싶습니다.
이들이 특히나 무서운 점은 소리소문 없이 돌아다닌다는 점입니다!
매우 작고 조용해서 당신의 몸 위를 기어 다녀도 모를 지경입니다. 그런 면에서 모기는(고작 모기 따위와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아주 친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소리로 경고를 해주니까요. 예를 들어 고속도로에서 칼치기로 끼어들었지만 깜빡이는 켰다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가장 두드러지는 습성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간호사도 아닌 것이 혈관 찾기 전문가입니다. 물론 눈으로 보고 짚어보고 아 대혈관이 여기 있군 하며 찌르는 게 아니라 무식하게 소혈관을 다 찔러보며 찾는 유형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서 굉장히 화가 나는 부분이에요. 처먹을 거면 더럽게 뒤적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먹고 꺼지던가 내 몸이 뷔페냐? 이것저것 다 담아서 먹어보고 제일 맛있는 거 고르게?
당한 게 많아서.. 잠시 욱했네요. 죄송.
아무튼 요약하면 강력하고 조용하고 기술적인 밤의 킬러(?)입니다.
A. 좋은 질문입니다(자문자답입니다). 여기서도 일반 벌레와 다른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배드버그에게 물리면 '잠복기'를 거쳐야 합니다. 첫날에는 별 타격이 없습니다. 어? 여기가 좀 가렵네? 싶어서 거울로 보면 연한 핑크빛 자국이 나 있습니다. 그럼 좆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워딩 정말 죄송한데, 진짜 좆돼서 그렇습니다...
빠르면 2일 차, 늦으면 3일 차부터 지옥문이 열립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증상들이 동반됩니다.
5일 차부터 차츰 괜찮아집니다. 일주일이 지나면 고통이 끝납니다. 연한 자국만 가슴 아프게 남아있습니다.
A. 앞서 슬로베니아 편에서 말했듯이 가렵다는 표현은 너무 가볍습니다. 자고로 '가렵다'면 긁었을 때 어느 정도 해소 되어야 하겠죠? 이건 그 범주를 벗어난 고통입니다.
일단, 화끈거립니다.
손을 대보면 실제로 열이 올라서 물린 부위가 뜨겁습니다. 옷에 스치기만 해도 온도가 올라가는 듯합니다. 육안으로 봐도 이건 뭐 짬뽕 국물을 흘렸나 싶을 정도로 빨갛습니다.
머리로는 가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긁기 시작하면 아픕니다.
게다가 모기에 물렸을 때와 다르게 물린 부위가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십자가도 못 새깁니다.
악순환입니다. 긁으면 아프고 멈추면 뜨겁고 가렵고 긁으면 아프고 멈추면 뜨겁고 가렵고
아아, 잠은 다 잤다고 봐야 합니다.
A. 일단 약국에 가서 연고를 사세요. 바르면 조금 낫습니다.
만약 어디서 물렸는지 확실하다면 그 호스텔 데스크로 가서 물린 자국을 보여주며 환불을 요청하세요. 이건 정말 하셔야 합니다. 저는 초반에 혹시 내가 끌고 온 거라고 오해할까 봐 그냥 말 안 했는데요. 많이 겪고 난 뒤에는 직접 증거를 채취해서(배드버그를 잡았다는 뜻) 주인장에게 가져갔습니다. 사실 이렇게까지는 안 해도 됩니다. 물린 자국을 보여주세요.
그럼 환불해 줘요. 우리 조금이라도 덜 억울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당장 숙소를 옮겨야 합니다. 대신 그전에 꼭 하셔야 될 일이 있어요.
가진 짐을 모두 세탁하세요.
코인 빨래방에 가서 세탁한 뒤 *건조기*를 여러 번 돌리세요. 그리고 햇볕에다 말리면 더 좋습니다. 이 정도면 배드버그는 물론 무한 재생되는 플라나리아도 도륙이 되어 소멸했겠다 싶을 정도로 세탁하시면 됩니다.
A. 비싼 돈 주고 좋은 호텔에서 지내세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우리는 자유로운 배낭여행 자니까요. 그나마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숙소 예약 플랫폼에서 후기를 자세히 보세요. 배드버그에 물리면 이거 보통 억울한 게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후기를 작성합니다.
체크인할 때, 방을 잘 살핍니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지(밤에 체크인한다면 숙소 주인에게 물어보세요), 환기를 잘 시키는지, 침구를 자주 세탁하는지. 전반적인 위상 상태를 봐야 합니다. 특히 습도가 중요합니다. 벽을 잘 보고 곰팡이가 피어 있는지 확인하세요. 무슨 전셋집 구하는 것처럼 자세히 보기 좀 그렇다면 체크인 한 뒤에 살펴보고 방을 바꿔달라 요청해도 안 늦습니다.
한 방을 쓰는 투숙객도 살펴야 합니다.
보부상을 주의하세요. 짐을 무지막지하게 들고 다니며 빨래고 옷이고 여기저기 걸어두는 보부상이 있는 방에는 높은 확률로 배드버그가 있습니다. 이놈들은 어둡고 좁은 공간을 좋아하니 가방, 옷 이런 틈에 옮겨다닙니다.
그래도 배드버그가 너무나 두렵다!
그럼 배드버그 전용 살충제를 들고 다니세요. 자기 전에 침대, 침구류에 분사하고 마음 편히 주무시면 됩니다.
아무쪼록.....
물려본 적 없으신 여러분, 평생 이런 고통 모르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물려보신 분들.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