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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예인 Oct 10. 2024

마리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마음 부스러기가 바삭바삭 해져서 굴러다니는 26살 가을, 

 나는 세르비아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암. 33세 폴란드 국적 유대인 변호사다. 

 반곱슬 연갈색 머리를 한 갈래로 묶고 다닌다. 작은 키에 고도비만이다. 피부가 하얗고 얇아 마치 아기처럼 부드럽고 양볼에 늘 홍조가 띠어있다.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지 걸음걸이가 매우 특이하다. 슬리퍼를 끌며 걷기 때문에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쓰고 다닌다. 그래서 눈이 어항 속에 잠긴 것처럼 커다랗게 보인다. 잔무늬 패턴의 하늘색 홈드레스를 입고 잔다. 


 모든 게 다 특이한 그녀에게서 가장 특이한 점을 꼽자면 목소리다. 영화 몬스터 주식회사에 나오는 민달팽이 캐릭터 ‘로즈’와 똑같은 목소리다. 특히 극 중에서 “I’m watching you, Wazowski”라고 말하는 대목이 정말 소름 끼치게 똑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연필 한 자루만 쥐어주면 그녀의 초상화를 세세하게 그릴 수도 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내가 여행 중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마리암에 대한 이야기다. 











회색 도시 베오그라드











 나는 그녀를 베오그라드의 한 호스텔에서 만났다. 그 호스텔은 도시에서 가장 싼 호스텔이었다. 

 11월 중순 세르비아는 비가 많이 내려 늘 습했다. 나무 침대로 우거진 좁은 방에 누워있다 보면 와, 여기가 바로 배드버그 수용소 아닌가 싶어서 괜히 몸 어딘가가 가려워졌다(다행히 당하진 않았다). 나는 이곳에서 4일 간 숙박했다. 하루에 18,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 때문이었다.





 그녀의 첫인상 부분에 들어가기 앞서, 호스텔이라는 세계에 대해 말하고 싶다. 

 어쩌다 한 두 번 호스텔에서 자본 사람이라면 표면적인 장단점을 논거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스텔이라는 공간에는 더 깊고 넓고 독창적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화장실 바닥에 붙은 머리카락이나 친절한 호스트의 미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사람을 물에 비유해 보자면 호스텔은 물 웅덩이다

 여러 번 걸러져 깨끗한 1 급수만 모이는 곳이 있고, 물이 고여 썩는 바람에 악취가 나는 곳이 있다. 내리막 길에 있어서 물이 빠르게 흐르는 곳이 있는가 하면 이슬처럼 천천히 모였다가 때가 되면 증발해 버리는 곳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물길이 흘러 들어오는 곳에 당신이 발을 들였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 옆에 자고 있는 고인 물이 바닷물인지, 음용수인지, 알프스 산맥에서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인지, 올림픽을 위해 정화 작업을 한 센강의 물인지 당신은 모른다. 


 그러나 수질검사까지 할 필요는 없다. 물은 흐르니까, 그냥 흘러가게 두면 된다.


 그런 호스텔 생활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시시각각 변하며 흘러가는 인간에게 얽매여 있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싶기도 하다. 











축축한 가을 공기













 세르비아에 도착한 날, 8인용 여성 도미토리 방에 배정받았다.

 방문을 열자마자 인도 여자 두 명과 마주쳤다. 하이, 헬로 정도만 주고받은 뒤 방을 스캔했다. 


 호스텔 생활로 터득한 노하우를 공유하자면, 침대에 뭘 늘어놓는지만 봐도 어떤 유형의 투숙객인지 알 수 있다. 잡동사니가 많으면 장기 투숙객, 깔끔하게 배낭만 들고 왔다면 닷새 안에 떠나는 단기 투숙객이다. 써놓고 보니 너무 당연한 소리네. 


 이런 추측에는 늘 예외가 있는데 그건 인도인과 중국인이다. 

 그들은 단기 투숙객이면서 오만가지 짐을 침대에 주렁주렁 매달아 둔다. 그들이 1층을 점거하면 뽀시락 거리는 비닐봉지나 쇼핑백, 젖은 수건을 사다리에 걸어 놓는 통에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막히곤 한다. 


 이날 만난 인도여자들도 무슨 짐이 그렇게 많은지 발 뻗을 공간도 없을 정도로 늘어놓았다. 캐리어는 180cm가 넘는 성인 남성도 들어갈 기세로 컸다(자연스레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크기였다). 

 놀랍게도 다음 날 새벽 6시 깜깜한 와중에 그 짐을 다 싸서 떠났다. 그게 바로 인도인이다. 중국인들은 전날밤에 포장을 다 뜯어 쓰레기를 왕창 버리고 떠난다. 이 부분에서 갈린다고 볼 수 있다. 





 아, 이 글의 주인공을 잊고 있었다. 죄송. 

 내가 체크인 했을 때 마리암은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침대를 먼저 봤다. 


 그녀의 침대에는 많은 물건이 있었다. 

 빨간색 타탄체크 담요, 꽂아 둔 충전기 선, 소니 헤드셋, 양치컵에 꽂아 둔 칫솔과 치약, 바람막이 재킷, 반쯤 남은 1.5리터 생수병, 실내용 슬리퍼, 빨간 캐리어,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사각형 백팩, 안경 케이스, 마트에서 파는 블루베리 잼 케이크 등 오만가지 물건이 있었다. 

 묘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 같은데 흘긋 보면 지저분했다. 아무튼 3일 동안 누우면 보이는 각도에 있을 사람이라 조금은 신경 쓰였다. 









 나는 따뜻한 물을 맞을 목적으로 긴 샤워를 했다. 호스텔에 도착한 날, 꼭 샤워부터 하는 버릇이 있다. 마치 새로운 어항으로 이주한 열대어처럼 물맞댐을 잘 끝내야 마음이 놓인달까. 뜨거운 물이 콸콸 나와서 좋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세르비아는 어딘가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분명 비 예보는 없었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아직 해가 떠있는 것 같긴 한데 햇살이 느껴지지 않았다. 90년 대 유럽 대도시 거리에 애쉬그레이 톤 필터를 씌운 느낌이다. 


 건물이 크고 화려한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촌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게 또 한눈에 보이는 커다란 실수는 아니라서 감점 요소로 보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거리를 탁 터놓고 에바 참치 광고 배너를 쫙 깔아 둔 것이나 골목을 음미하며 걷기엔 빵빵 거리는 차가 너무 많다는 것, 광활한 광장에 있는 청동상이 떼놓고 보면 멋있는데 애매한 위치에 있어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드는 정도. 

 세르비아에 대한 감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다……?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니까 무시해도 된다. 



 밥을 먹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벌써 오후 9시였다. 방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문 오른쪽에 인도인 두 명, 창가 쪽에 아르헨티나인 한 명, 그리고 내 침대 2층에 한 명(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어 얼굴은 못 봤다), 그리고 마리암. 


 나는 그들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속삭이며 하이,라고 하자 마리암은 보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두고 약 2초 정도 내 얼굴을 응시하더니 하이톤의 쉰 목소리로 말했다. 


 Hi. 


 그때 잠시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의 오른쪽 눈이 심한 내사시였다. 순간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빤히 보다가 눈을 피했다. 


 침대에 눕자 자연스럽게 그녀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핸드폰을 보는 척하며 곁눈질로 그녀를 관찰했다. 그녀는 자꾸 건너편 1층 여자에게 눈길을 보내며 돌아다녔다. 그 모습이 마치 천적을 앞에 두고 말미잘 촉수 사이를 오가는 흰동가리 같았다. 


 마리암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침대 위에 있던 블루베리 잼 케이크를 들고 1층 여자에게로 갔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권하는 것 아닌가. 그 여자는 반쯤 누워있다가 몸을 일으켜 앉아 그 케이크를 받아 들었다. 


 마리암의 침대 위에는 늘 단 것이 놓여 있었다. 어떤 날엔 쿠키, 어떤 날엔 초콜릿.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그것을 건네며 말을 걸었다. 그녀가 친구를 만드는 방식은 아주 유치하면서도 정성스러웠다. 















그 호스텔 주방은 늘 끈적거렸다











 마리암은 1층 여자와 열과 성을 다해 대화했다. 

 1층 여자도 마리암에게 대답하며 블루베리 잼 케이크를 먹었다. 그들이 스페인어로 대화하는 통에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2시간이 지났다. 시계는 오후 11시를 가리켰다. 마리암은 끊임없이 말했다. 말의 빈도로 봤을 때 대부분 마리암이 말하고 1층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마디 씩 던졌다. 마리암은 그냥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크게 웃기도 했다. 그렇게 웃으면 1층 여자는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좁은 방 가운데를 차지하고 커다란 제스처와 함께 서성이며 여자의 침대 앞을 떠날 줄 모르는 마리암은 언뜻 보면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테러범에게 인질로 잡혀 말을 멈추면 폭탄이 터질 거라는 협박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3시간이 지나 자정을 넘긴 시각, 말 상대를 해주던 1층 여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재킷을 입었다. 밖으로 나갈 심산이었다. 나는 2시간째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었다. 드디어 마리암이 말을 멈추는구나 싶었다. 

 여기서 소름 돋았던 점은 마리암이 1층 여자를 졸졸 쫓아가며 말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문 앞에서 마리암에게 다시 붙잡혀 약 5분 동안 또 대화를 나눴다. 


 1층 여자는 결국 마리암에게 약간은 화내다시피 언성을 높이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알겠으니까 잠깐 나가도 될까? 담배가 너무 땡겨서 말이야. 대충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대화가 끊기고 1층 여자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역시나 참고 있던 인도 여자가 방 조명을 꺼버렸다. 어디선가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같은 방에 있던 투숙객들 전부 시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도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곳은 호스텔이니까. 

 말하자면 정당한 허가를 받고 집회를 하는 거라 일반 시민이 그것을 멈출 자격이 없다. 이런 말소리가 시끄러우면 돈을 더 들여 프라이빗 룸으로 옮기면 될 일이다. 그럴 돈이 없다면? 이 악물고 참는 수밖에. 이곳은 호스텔이니까(물론 늦은 시간에 긴 대화를 하려면 공용 공간으로 나가는 게 예의지만).




 마리암은 어둠 속에서 비적비적 자신의 침대로 가 누웠다. 핸드폰을 왼쪽 눈앞에다 바짝 갖다 대고 유튜브를 봤다. 옅은 블루라이트 빛에 돌아간 그녀의 눈동자가 보였다.

 얼마 후 1층 여자가 방으로 조용히 들어와 침대에 누웠고, 마리암은 그것도 모르고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저 사람은 잘 때도 시끄럽구나. 꽤 오랫동안 마리암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렸다. 동시에 그녀에 대한 미칠듯한 호기심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스르륵 잠에 들었다. 














베오그라드 광장











 다음 날 아침(이라기엔 조금 늦은 시각), 일어나 보니 마리암은 자리에 없었다. 

 방은 깨끗했다. 이미 체크아웃 시간이 지나서 여러 명이 이 호스텔을 떠난 뒤였다. 나는 이 시간을 썰물 때라 부른다. 연박할 때만 누릴 수 있는 이 평화로운 낮 시간… 오후 3시쯤 체크인 시간이 되면 새로운 밀물이 들어차기 때문에 또 정신없을 것이다. 


 잠에서 깨기 위해 샤워를 했다. 드라이기가 없어서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짜며 방으로 들어왔는데, 어제 마리암과 얘기하던 1층 여자가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색한 미소를 보내자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걸려있는 속옷 네 거야?”


 그녀가 창가에 있는 빨래 건조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팬티 넉 장과 양말 두 짝, 히트텍 하나가 걸려있었다. 어제 체크인을 하자마자 세면대에서 빨아 널어두었다


 “응.”

 “빨래를 저기에 걸어두면 하우스 키퍼가 엄청 뭐라 해. 돈 주고 빨래 서비스를 맡겨야 저길 쓸 수 있거든.”

 “정말? 몰랐어. 꽤나 빡빡하네.”

 “그렇지? 건조대 좀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나도 처음엔 몰랐어. 아까 키퍼가 누구 거냐 물어보길래 내 거라고 해뒀어.”

 “고마워. 조심해야겠네.”


 키퍼가 믿었을 리 없다. 이 방에서 스몰 사이즈 곰돌이 팬티를 입을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그녀가 베푼 친절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너, 아르헨티나에서 왔지?”

 “세상에. 어떻게 알았어?”

 “마테차를 마시고 있잖아.”


 1년 전에 슬로베니아 호스텔에서 만난 아르헨티나 언니들이 마테차를 끓여줬었다. 아르헨티나인들은 커피 대신 마테차를 마시는데,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찻잎이 걸러지는 특수 빨대와 호리호리한 컵으로 마시는 차라서 딱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찻잎을 찻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여러 번 우려먹는다. 첫맛은 정말이지 혀가 얼얼할 정도로 쓰다. 두 번 세 번 우리다 보면 쓴 기운이 가시고 향긋한 차를 마실 수 있다.


 “맞아, 아르헨티나 사람이야.”


 첫날부터 아르헨티나인이라고 추측만 하던 게 확실해지자 간지러운 구석을 긁은 듯 시원했다. 


 “너는 어디서 왔어?”

 “나는 한국인이야.”


 솔직한 말로 이 대목에서 어젯밤 마리암과 무슨 대화를 그렇게 오래 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 질문으로 인해 험담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나 추한 꼴이 되진 않을까 싶어 화제를 돌렸다. 잠시동안 나눈 대화로 그녀에 대해 조금 알게 됐다. 


 그녀의 이름은 멜라니. 29살이다. 투블럭 숏컷에 민소매티, 카고바지를 주로 입는데, 덩치가 크고 타투가 여러 개 있다. 

 만약 그녀가 전당포 주인이라면 그 누구도 제 값을 받지 못하고 물건을 순순히 넘길 것이다. 그녀가 별말 없이 물건을 살피다 저렴하게 후려친 가격을 툭 뱉으면 그 값이 터무니없더라도 수긍해야 할 듯하다. 그런 카리스마를 가졌다. 

 목소리가 허스키하고 말투가 담백한 게 특징이고 과하지 않은 유머로 상대방을 킥킥거리게 만드는 사람이다. 나는 멜라니가 마음에 들었다. 마리암이 왜 그녀에게 블루베리 잼 케이크를 줬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이 그림이 기억에 남았을까











 맥도날드로 아침을 때우고 번화가 거리를 구경하다가 세르비아 국립 박물관에 갔다. 규모가 크고 깔끔한 박물관이었다. 그런데 보는 내내 ‘세르비아는 이렇게나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용감무쌍하고 대단한 나라입니다’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느껴져 거북했다. 2주 전 사라예보 전쟁 박물관에 가서 세르비아 연합군의 만행을 보고 온 뒤라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박물관 견학을 끝내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작은 서점을 발견해 책을 보다가 해가 져서 골목에 있는 바에 들어가 로컬 맥주를 마시며 글을 썼다. 많이 걸었던 기억은 나는데 뭘 봤는지는 머릿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선명한 감각마저 빨아들인 건 아닌가 싶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마리암이 있었다. 나는 먼저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는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줬다. 방에는 나와 마리암 밖에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했다. 어젯밤 수다스러웠던 그 사람이 맞나 싶었다. 


 “어디 나라 사람이야?”


 나는 못 참고 먼저 말을 걸었다. 어젯밤 무슨 말을 그렇게 오래 했는지 나에게도 말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이 사람 자체가 궁금하기도 했고.


 “폴란드인이야. 너는 내가 맞춰볼게. 음, 일본인?”

 “아니, 한국인. 나는 예인이야. 반가워.”

 “반가워. 나는 마리암.”


 우리는 훈훈하게 인사했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그녀의 손은 마치 아기 피부처럼 얇고 부드럽고 통통했다. 


 “세르비아에는 무슨 일로 왔어?”

 “나는 여기 살고 있어. 직업이 변호사야. 원래 보스니아에서 일했는데, 내일부터 이 근처 사무실로 첫 출근해. 나참, 이직이라니. 생각도 못했는데. 하하.”

 “잠깐, 여기서 산다고?”


 장기 투숙객인 줄은 알았지만, 호스텔에서 살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응, 나는 집에 혼자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라 호스텔에 살면서 여러 친구도 사귀고 재밌는 얘기도 하고 그래. 알다시피 “변호사”라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는 게 도움이 될 때가 있거든. 청소를 해주는 것도 좋아. 혼자 살다 보면 그런 것 다 귀찮아지잖아?”


 그녀의 양볼이 달아올라 살짝 붉어졌고 말의 속도도 빨라졌다. 


 “그렇구나.”


 수긍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호스텔에서 사는 이유에 대해 밤새 늘어놓을 기세였다. 특히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변호사”라는 단어를 강조할 땐 강압적이라는 느낌까지 받았다. 


 “너는 여행 중이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니콜라 테슬라여서 온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응, 니콜라 때문은 아니고… 사실 보스니아에 갔다가 이 나라가 궁금해져서 왔어.”

 “오, 보스니아… 정말이지 좋은 나라야. 근데 나는 거기서 부당한 일을 당했어.”


 그녀는 반짝이는 것을 모으는 고블린처럼 내가 한 말 중 자신과 연관 지을 수 있는 단어들을 귀신 같이 잡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부당한 일이라니. 되묻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무슨 일인데?”

 “보스니아에서 일하던 변호사 사무실에서 갑자기 해고당했어. 이유가 뭔지 알아?”


 말이 많아서? 설마 그건 아니겠지.


 “뭔데?"

 “내가 유대인이라서!”

 “뭐…? 요즘 세상에 그게 말이 돼?”

 “정말이야. 갑자기 나한테 나가라고 내쫓았어. 그래서 세르비아로 온 거야.”


 당최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도저히 농담으로 삼을만한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녀를 위로해 주는 쪽으로 일단락 됐다. 









피 튀기듯 그린 벽화가 많았던 베오그라드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먼저 말을 걸었던 것을 후회했다. 마리암은 정말이지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녀의 수다스러움은 일반적인 범주를 넘어섰다. 대체로 내가 말할 기회는 없었다. 

 그녀가 했던 말들을 요약하면 이렇다. 





 -사촌 동생이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5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천재 소리를 들으며 15살 때 음악 학교를 조기 졸업했다(안 물어봄).


 -세르비아인들이 니콜라 테슬라를 매우 존경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마치 만물을 전부 발명한 신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다. 세르비아 화폐에 그려져 있는 사람도 니콜라 테슬라다(안 물어봄). 


 -여동생이 게임에 빠져서 그 계기로 애니메이터로 일하고 있는 중이다. K-POP(특히 블랙핑크) 팬이다. 나는 왜 좋아하는지 평생 이해할 수 없다(이것 또한 물어본 적 없음).


 -태국 여행을 간 적 있는데, 방콕이 너무 복잡하고 가짜 신분증을 파는 블랙마켓이 성행해서 살고 싶지는 않다


 -군대를 1년 동안 갔다 왔다(총 쏘는 자세도 보여줌). 


 -자신은 언어에 재능이 있어 영어, 폴란드어, 스페인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이건 내가 스페인어를 잘 한다고 칭찬했다). 







 초반 30분은 그녀의 이야기를 꽤나 흥미롭게 들었다. 그녀는 좋은 이야기꾼이었다. 살아있는 표정, 공감 능력을 요구하는 스토리 텔링, 긴장감을 늦출 수 없도록 적절한 타이밍에 질문하는 스킬까지… 그러나 30분이 넘어가자 지쳤다. 그녀의 이야기가 꺼지지 않게 리액션 장작을 넣는 역할만 하다 보니 지칠 수밖에. 


 그녀의 주둥아리가 제발 멈추길 바라면서도 묘하게 ‘어디까지 가나 보자’라는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잠자코 그녀의 대화 흐름을 따라갔다. 


 “한국은 너무 심각한 경향이 있어.”

 “왜?”

 “너희들은 일중독이잖아.”

 “맞아, 우리는 유럽인에 비해 워커홀릭인 것 같아.”

 “알코올홀릭도.”

 “그렇지, 일을 많이 하니까 술도 많이 마시는 거야.”

 “그리고 미친 이웃도 있지?”

 “마약 말하는 거야? 한국에는 마약이 별로 없어.”

 “아니, 김정은. 북한말이야.”


 그녀는 특유의 지적 허영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타국의 민감한 부분을 능숙하게 들쑤셨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외국인들은 말이야. 사실 중국을 통해서 북한에 갈 수 있거든? 군인과 동행하면서 여기서는 사진을 찍어도 되고 여기서는 안되고 이런 것들을 통제받으면서 여행할 수 있어.”

 “그럼 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마리암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인인 내게 북한에 대해 가르쳤다. ‘뭐, 이럴 거면 북한 대사관에서 일한 경험도 있다 하지?’라는 속마음을 씹어 삼켰다.


 “북한 사람들은 탈북하려다 죽임을 당하고 굶주리고 있어. 그리고 어떤 미국인은 북한에 여행 갔다가 어떤 포스터를 훔쳤는데…”

 “그 이야기는 알고 있어.”

 “그냥 포스터 하나였는데 말이야. 만약에 북한에 가서 초콜릿 하나를 주더라도 외부 음식을 반입했다는 이유로…

 “알고 있어.”

 “아주 작은 초콜릿 한 조각을…”

 “알고 있어.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거야. 잊었나 본데 나는 한국인이야.”


 마리암은 말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날이 선 내 말투를 인지한 듯했다. 순식간에 팽팽해진 공기와 함께 실낱같은 정적이 흘렀다. 나는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엄밀히 따지면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지만…”

 “두렵지 않아?”

 “두렵지는 않아. 외국인의 시선으로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안전하다고 느끼며 살아왔어.”

 “김정은 옆에 맨날 붙어 다니는 여자 말이야. 누가 여동생이라 하던데 김정은보다 훨씬 더 나쁘대. 둘 다 스위스 유학도 다녀왔으면서 자국민들은 움직이질 못하잖아. 나는 북한 사람들이 참 불쌍해. 죄 없는 사람들인데 지금 감옥에 사는 거나 마찬가지야. 폴란드인들은 북한에 여행 가거든? 폴리쉬들은 부자거든. 그래서 여행을 엄청 많이 해. 재밌는 점은 폴란드인들이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을 보면 항상 슬픈 장면들을 찍어. 그래서 그들이 찍은 북한 사진을 봐도 아무도 웃고 있지 않은데……”


 나는 자세를 삐딱하게 고쳐 앉았다가 들고 있던 물병을 툭툭 거리며 치다가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말았다.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 외국인이 북한 얘기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 형태다. 한국인인 내게 북한에 대해 가르치는 외국인은 살면서 처음 봤다. 

 이쪽 문제로는 자칫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에 깊게 파고들지 않겠다(그냥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입장처럼 으스대는 모습이 싫었다 정도로 마무리해도 될까).



 나는 굳은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DMZ가 얼마나 좋은 관광 상품인가에 대해 말했다. 

 담배를 다 말고 라이터를 챙겼다. 그 모습을 본 마리암은 화제를 돌려 담배가 몸에 얼마나 해로운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가는 동안에도 나를 쫓아왔다. 나는 조금은 언성을 높이고 알겠으니까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그제야 마리암의 말이 멈췄다. 











밤 거리는 조용했다









 테라스로 나갔다. 어둠 속 도시의 빛에 의해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멜라니였다. 


 “안녕, 여기서 뭐 해?”

 “오, 예인. 방 안은 좀 답답해서 말이야.”


 멜라니가 마리암을 피해 테라스에 있는 건가 싶었다.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멜라니 앞에만 서면 마리암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까 말까 고민이 됐다. 


 “오늘은 뭐 했어?”

 “박물관에 갔다 왔어. 볼만한데 그다지 인상 깊지는 않았어. 너는?”

 “음, 유명한 카페에 갔다가 번화가 구경했어. 베오그라드는 딱히 할 게 없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는 비슷한 템포로 말을 주고받았다. 자고로 대화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블랙홀에 휘말렸다가 정상 궤도에 도달한 것처럼 안도감이 들었다.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인생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밤에 테라스에 나가 담배를 태우다 보면 대화가 쉽게 깊어진다. 멜라니는 방금 아빠와 통화를 했다며 물꼬를 텄다. 


 “부모님은 항상 나를 너무 걱정하셔. 그래서 도망치듯 여행을 시작한 것도 같아. 내 일 특성상 어디서도 할 수 있잖아? 비록 수익은 불안정하지만.”


 멜라니는 칼럼을 쓰는 작가였다. 어엿한 직업도 있고 29살에 강인해 보이는 그녀도 아직 부모님의 잔소리에서 벗어나진 못한 듯했다. 나는 그 부분에 크게 공감하며 나 역시 부모님의 손길에서 벗어나 성장하기 위해 혼자 여행 중이라고 말했다. 


 “너 정말 용감한데.”

 “아니야. 이 와중에도 무슨 문제 생기면 바로 아빠한테 전화할걸.”

 “하하하, 나랑 똑같네. 사실 오늘 생활비가 부족해서 S.O.S 쳤거든.”


 즐거운 대화였다. 담배를 다 피웠을 때쯤, 멜라니는 함께 노비사드라는 도시에 가자고 제안했다. 둘이 있을 때 이런 약속을 하니까 왠지 은밀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방으로 돌아갔다. 










아 참, 군사 박물관에도 갔었다










 셋째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오전 10시였다. 

 어젯밤 우리는 자기 전 아침 8시에 출발하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내가 늦잠을 자버린 것이다. 마리암이 코를 고는 바람에 이어 플러그를 끼고 자서 알람소리를 못 들었다.


 멜라니는 이미 노비사드에 가고 없었다. 

 자고 있는 나를 깨우기 미안해 슬그머니 방을 나서는 멜라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찝찝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창밖으로 회색 비가 창문을 두드렸다. 눅눅한 이불에서 물 비린내가 났다. 이어 플러그가 아니라 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엔 늘 일어나기 힘들다. 


 샤워를 했다. 비 오는 날에는 샤워를 해도 도통 개운하지가 않다. 이놈의 샤워실에는 옷을 걸어두는 고리 하나가 없어서 샤워를 하고 나면 옷이 다 젖는다. 그게 싫으면 알몸이 노출되는 위기를 무릅쓰고 샤워 부스 밖에 있는 세탁기 위에 올려두는 수밖에 없다. 

 잔뜩 투덜거리며 나갈 채비를 마쳤다. 오늘은 내일 루마니아로 떠나기 위해 여행사에서 미니 버스를 예약해야 한다.










 세르비아 거리를 돌아다니면 어린아이들이 자꾸 쳐다봤다.  

 걸을 때는 스쳐 지나가면 그만이라 괜찮은데, 버스나 트램처럼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을 때는 집중력 훈련 타깃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이들이라 그런지 괜찮다. 

 저게 바로 말로만 듣던 동양인이라는 것인가?라는 속마음이 읽힐 정도로 놀란 아이와 마주쳤을 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어릴 때 외국인을 처음 봤던 날이 기억난다. 엄마 무릎에 앉아 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었는데, 옆에 금발 벽안 외국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그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엄마에게 “지우개가 영어로 뭐야?”라고 크게 물었다(버스에 있는 사람들 전부 다 들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는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라 내 손을 꽉 잡고 “집에 가서 말해줄게.” 라며 속삭였다. 아주 어릴 때임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래서 세르비아 아이들의 눈동자가 싫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날도 비 오는 거리를 걷다 어김없이 한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살짝 미소 짓자 그 아이도 새로운 경험의 미소를 지었다. 








집주인은 가만히 있었을까 아니, 집주인이 쓴 건가?











 버스를 타고 10분, 내려서 15분을 걸어 여행사에 들렸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루마니아로 가는 차가 내일은 없고 모레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절망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만 자면 그 호스텔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여행사에서 봉고차를 예약하는 것이 루마니아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라 하는 수 없이 하루 더 묵기로 했다. 






 다시 호스텔로 돌아왔다. 추가 숙박비를 결제하기 위해 리셉션으로 갔다. 좁은 곳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곳엔 마리암이 있었다. 


 남색 바람막이를 입고 검은색 긴치마에 검은색 레깅스, 운동화를 신은 채 백팩을 옆에 두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3인용 소파에 4명이 끼여 앉아 마리암은 두 어깨를 오므리고 있었다. 


 나는 못 본 척 데스크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마리암은 앞에서 열심히 떠들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말 많던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하고. 그 모습에 기시감이 들었다. 


 처음으로 호스텔에 갔던 21살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 나도 저랬다. 낄 자신은 없는데 혼자 외로울 자신은 더 없어서 애매하게 걸쳐 있었다. 

 하루치 숙박비를 추가 결제 하고 돌아서서 그곳을 나가는 길, 잠시 마리암 앞에 멈춰 섰지만 그녀는 끝까지 나를 보지 않았다. 












세르비아 레스토랑에는 고양이 도마가 있다











 밖에서 저녁을 먹고 오후 10시 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호스텔로 돌아갔다. 

 늘 땅이 젖어있어서 내 청바지 끝단은 마를 날이 없었다. 방문 앞에서부터 마리암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마리암은 새로 체크인 한 뉴페이스를 앉혀 놓고 열심히 떠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들과 짧은 인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웠다. 그러는 동안 마리암의 말을 엿들었다. 


 “오늘 두 번째 출근을 했는데 말이야. 고객들이 정말 미친 것 같아. 세르비아 사람들은 왜 그런지 몰라!”


 마리암은 변호사 사무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배정된 고객이 미친 사람 같다며 불평했다. 뭔가 이상했다. 오늘 내가 추가 결제를 하기 위해 리셉션에 가서 마리암을 봤을 때가 오후 3시경이었다. 잠깐 본 거라 몇 시까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도 이미 출근을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 아닌가. 


 “두 번째 출근을 했다고? 힘들었겠네.”


 나는 마리암에게 떠보듯이 물었다. 그러자 마리암은 잠시 나를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마리암은 아까 리셉션에서 나를 봤을까? 이미 시작된 의심은 겉잡을 수없이 커졌고 가지를 쭉쭉 뻗어나갔다. 


 출근 시간이 유동적이라 쳐도 아까 입고 있던 옷은 도저히 변호사 사무실에 출근하는 복장은 아니었는데. 그냥 사무직도 아니고 고객을 상대하는 변호사가 운동복에 백팩을 메고 간다고?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 마리암은 심한 내사시라 핸드폰을 볼 때도 눈앞에 바짝 두고 힘들게 보잖아. 변호사는 서류를 쌓아 놓고 하루종일 읽는 직업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일하는 걸까?


 순식간에 뻗어나간 의심의 가지가 우거졌다. 새로 온 사람은 자신이 변호사라고 어필하는 마리암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 마리암과 대화를 했을 때 나처럼. 


 “너는 어디 나라 사람이야?”


 나는 경쟁하듯 마리암과 대화하고 있던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만 그때는 나도 모르게 불쑥 그런 행동을 했다. 유치해. 


 “대만 사람이야. 너는?”

 “한국인이야. 여행 중이니?”

 “응.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내가 대만 여자와 대화하기 시작하자 마리암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자 묘하게 통쾌했다. 대만 여자 침대 위에 밀카 초콜릿이 있었는데, 마리암이 준 것일까 궁금했다. 


 “나는 독일인 남자친구랑 롱디 중인데, 마침 둘 다 휴가를 내서 세르비아에서 만나기로 했어.”


 대만 여자가 ‘독일’이라는 위험 단어를 꺼냈다. 마리암이라면 독일인 남자친구를 ‘만나기로’ 했다는 포인트가 아닌 독일이라는 키워드에 맞춰 자신과 연관된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나는 그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얼른 대답했다. 


 “롱디! 아주 힘든 길을 걷고 있네. 얼마나 만났어?”

 “이제 2년 됐어. 위기가 많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애틋하기도 해.”

 “이번에는 얼마 만에 보는 거야?”

 “아마 3개월인가?”


 나는 평소와 달리 ‘대화를 주도하는 포지션’을 꿰찼다. 

 대만 여자와 말이 잘 통한 것도 있었지만 내가 말하는 동안 마리암이 입을 꾹 다문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먹은 사르마가 짜서 급하게 들이 켰던 라거 맥주의 취기가 뒤늦게 올라오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내 말이! 대만은 미의 기준이 너무 높아. 그래서 외국에 있을 때가 마음이 더 편해.”

 “맞아. 확실히 동양이 타인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

 “그렇다니까. 나는 심지어 대만에 있을 때 버스정류장에 그냥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할머니가 오더니 살 좀 빼! 돼지 같은 게,라고 욕하고 갔어.”

 “와우… 그건 좀 심하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늘 풀메이크업을 해. 근데 유럽에서는 오히려 다들 안 하고 다니니까 나도 훨씬 편하게 다니게 되더라.”


 우리는 한참 떠들었다. 이 날 밤은 마리암이 헤드셋을 끼고 버티는 쪽이었다. 그녀의 또 다른 친구 멜라니는 새벽 1시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낮잠자는 고양이








 멜라니는 떠났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짐이 사라져 있었다. 노비사드에 당일치기로 간다고 들었는데, 어느새 돌아와 짐을 챙겨 다른 곳에 간 모양이었다. 이제 방에는 새로운 사람들과 마리암 밖에 없다. 대만 여자도 아침 일찍 짐을 싸서 독일인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어딘가 마음이 텅 비었다. 멜라니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늦잠을 자서 미안하다 말하고 싶었고 노비사드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묻고 싶었다. 이대로 헤어지는 줄 알았다면 인스타그램 아이디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싶다가도 맞팔로우만 해놓고 어디서 만난 누구인지 흐릿해져 가는 여행 친구들이 수두룩 한 게 떠올랐다. 


 그래, 여기는 호스텔이니까. 늘 헤어지는 곳이니까. 

 그렇게 단념해도 어디선가 마테차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노비사드에 가기로 했다. 멜라니가 세르비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했던 곳. 비록 그녀와 함께 가진 못했지만, 뜻밖의 하루를 뜻있게 보내고 싶었다. 









 준비를 하던 중 마리암과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더 오래 잔 듯했다. 

 아침에 그녀의 핸드폰에서 5분마다 알람이 울렸는데 미동도 없었다. 나는 주위에서 뭉그적거리는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 일하러 가?”

 “응, 사무실에서 고객을 만나기로 했어.”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늘 떠드는 것, 아침마다 반복되는 알람을 절대 끄지 않는 것, 때때로 무례하게 선을 넘는 것까지 전부 다. 


 “힘들겠다. 변호사는 하루종일 앉아서 많이 읽어야 하잖아.”


 약간의 복수심이 담아 말했다. 그러자 마리암은 숨 쉴 틈도 없이 대답했다. 


 “나는 일 할 때만 일해. 퇴근하면 절대 일하지 않아. 그래서 내 일거리를 들고 여기에 오지 않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쉴 수 없거든.”


 논점이 살짝 어긋난 대답이었다. 나는 여기서 좀 더 집요하게 굴어보기로 했다.


 “그래? 나는 사실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 많이 읽는 편이거든. 종일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건…”


 마리암이 내 말을 끊었다. 


 “나는 사무실에서만 일해. 그래야 일과 쉼의 경계가 무너지지 않거든.”


 그녀는 같은 말을 강조해서 반복했다. 나는 취조하듯 질문을 던졌다. 


 “사무실은 어디에 있는데?”

 “걸어서 10분이야. 11시까지 출근해야 해.”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20분이었다. 마리암은 여전히 남색 바람막이와 검은색 타이즈,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불안한 듯 몸을 좌우로 조금씩 흔들던 그녀가 침대 맡에 두었던 검은색 백팩을 챙겼다. 


 “노비사드에 간다고 했나? 재밌게 놀아. 나는 늦는 걸 안 좋아해서.”


 마리암은 처음으로 먼저 대화를 끝낸 뒤 밖으로 나갔다. 어안이 벙벙했다. 평소와 달리 굳은 표정과 딱딱한 말투가 낯설었다. 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챘을까. 그래서 불편했을까. 


 그녀가 나가고 습한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짜며 그녀의 침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녀의 침대에 간식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내게 단 것을 준 적은 한 번도 없다. 먼저 말을 건 쪽은 나였다. 













세르비아 서점에 이런 책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1시간쯤 달려 노비사드에 도착했다. 

 노비사드는 베오그라드와 같은 나라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건물 색이 알록달록 파스텔톤이라 메인광장도, 뒷골목도 어딜 가나 예뻤다. 

 만약 내가 또 여권을 잃어버려(상상조차 하기 싫다) 세르비아에서 한 달 동안 살아야 한다면 단연 노비사드를 고를 것이다. 세르비아 제2의 도시라 규모도 크고 산책하기 좋은 큰 공원도 있고, 언덕을 올라 요새에 가면 노을이 잘 보이는 곳에 야외 바도 있다. 나는 그 바에 앉아 잔디밭에서 깡충 거리는 검은 고양이 가족을 구경하며 라거 맥주를 마셨다. 실로 오랜만에 맞는 햇살이 반가워 평소보다 많이 걸었다. 




 노비사드 골목을 걷다가 멜라니를 떠올렸다. 멜라니는 마리암이 변호사라고 한 걸 믿었을까? 그녀의 성격상 ‘변호사면 어떻고 백수면 어때? 나와는 상관없는걸’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을지도. 


 호스텔적 관점으로 봤을 때 그게 맞다. 

 누군가가 자신을 프랑스 동부 알프스 산자락 에비앙이라고 칭한다면,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 된다. 그 물을 마실 필요는 없으니까. 설령 그 사람에게서 비린내가 나더라도 며칠 뒤 헤어지게 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나는 마리암에게 사무실이 어디냐고 물어볼 자격이 없었다. 

 공용 공간에서 떠들어달라고 얘기하거나 알람이 시끄러우니 꺼달라고 하거나 북한에 대한 건 민감한 주제이니 다른 말을 하자고 할 자격은 있었어도. 


 베오그라드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나는 터미널에서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려 마리암에게 줄 초코바 하나를 샀다. 













노비사드 요새에 사는 검은 고양이 가족













 돌아와 보니 사람들이 또 바뀌어 있었다. 이 정도로 사람이 자주 바뀌는 호스텔은 처음이다. 

 다들 싼 가격에 멋모르고 체크인했다가 위생 상태에 놀라 도망가는 모양이다.


 마리암은 없었다. 그녀가 없으니 새로 들어온 사람들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돌았다. 만약 마리암이 여기 있었다면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확실히 마리암이 떠드는 동안에는 외롭지 않았다. 모두 허물없이 대화하는 게 조금은 즐겁기도 했다. 주머니에 있는 초코바를 만지작 거리며 마리암을 기다렸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마리암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 낮에 내가 한 말 때문인가 싶었다. 혹시나 해서 물을 마실 겸 공용 공간에 갔는데 거기에도 마리암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잠에 들었다. 사방에서 색색 거리며 자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감기는 눈꺼풀을 치켜뜨고 문 쪽을 바라보다가 결국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었다. 






 아침 7시에 눈을 떴다. 가장 먼저 건너편 침대를 확인했다.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마리암이 웅크린 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안도감이 들었다. 돌아온 것을 못 보고 떠났다면 며칠은 찝찝했을 것이다. 


 마지막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겼다. 세상모르고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방을 나섰다. 루마니아로 가는 차가 8시에 이 호스텔 앞으로 오기로 했다. 

 베오그라드는 떠나는 날까지 비가 내렸다. 



 나는 빗방울 맺힌 창문 너머로 잿빛 도시가 멀어지는 것을 한참 보다가 주머니에 있던 초코바를 꺼냈다. 결국 전해주지 못한 초코바를 먹으며 마리암을 떠올렸다.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결국 그녀가 그리도 말이 많았던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다. 

 한 가지 가설을 내보자면, 마리암은 너무나 외로워서 말을 멈추면 찾아오는 잠깐의 정적도 싫었던 게 아닐까 싶다. 쉽게 가라앉는 배를 타고 있어서 쉼 없이 보수 작업을 하는 선장처럼. 


 고작 4일 만에 이렇게 깊은 인상을 남길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마리암만 한 사람이 없다. 아주 오래도록 ‘세르비아’하면 ‘마리암’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것 같다. 








 나는 여행을 할 때 늘 호스텔에 묵는다. 

 샤워하는 게 불편하고 아침엔 하우스 키퍼가 깨워대고 낯선 사람들과 한방에서 자야 하고 운이 나쁘면 배드버그한테 물리고 밤이 되면 코골이 중창단의 공격을 피할 수 없지만 어쩌다 독방을 쓰다 보면 다시 호스텔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그 세계엔 중독적인 뭔가가 있다. 


 때로는 나의 인생이 늙은 물결에 떠다니는 어린잎처럼 낯설어질 때가 온다. 물은 오래되어 이끼 냄새가 나는데 나의 행동과 마음은 늘 어린잎이다. 그럴 때 호스텔 세계에서 며칠, 길게는 몇 달씩 보내다 보면 어느새 신선하고 새로운 물결이 흐르고 있다. 그곳에서 순환하는 법을 배우나 보다.  













흑맥주와 만년필, 세르비아에 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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