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나는 병치레를 자주 하였다. 남들이 나에게서 인내심이라고 부르는 그러나 사실은 미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러한 성격은 아마도 이러한 어렸을 적의 잦은 병치레에서 연유할 것이다.
마치 병상에서 시간이 멀리서 한 발자국씩 점차 다가오듯이, 나는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일이 멀리서부터 나에게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기를 좋아하였다. 예를 들면 여행을 할 때에도 역에서 오랫동안 기차를 기다린다는 기대감 같은 것이 없으면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선물하는 것이 나에게 하나의 정열이 된 것도 이러한 사정에서 연유하는데, 왜냐하면 남을 깜짝 놀라게 할 선물을 하는 데에도 나는 선물을 줄 사람으로서 오랜 기간 동안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등 뒤에 베개를 펴고 병실에 들어서는 사람을 기다리는 환자처럼 누군가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자 하는 내면의 욕구는 훗날 나로 하여금 내가 어떤 여인을 오랫동안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그 여인이 더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 <벤야민의 문예이론>, '병과 인내심'
병이 가져다 준 기다림을 긍정하고 삶의 기쁨으로까지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 병이란 고난 같은 것들의 은유일 것이다. 실패도 여기에 포함되리라. 그런 종류의 것들을 많이 경험하다보니 인내심이 생겼다는 것. 그 인내심 때문에 기다리는 힘이 생겼고, 이제 기다리는 일은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
나는 좀 엉뚱한 생각을 해 봤다. 벤야민이 한국에 살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벤야민은 아파트에서 살았을 것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을 것이다. 벤야민에게 그것도 즐거운 일이었을까. 여행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일과 귀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마지막 대목은 인생 글귀로 정해도 좋을 만하다.
“어떤 여인을 오랫동안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그 여인이 더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위로하는 차원에서, 이 글을 오랫동안 무언가를 기다려온 사람들에게 건네주고 싶은 밤이다(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시각은 am 2:32이다). 하지만 이내 그 마음은 흔들린다. 기다리는 일의 아름다움, 그래, 좋은 말이지만 현실도 그런가? 그 말대로 기다리는 것이 아름답기만 한가?
요즘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는 나를 문득문득 발견한다. 나는 분명 '만약에',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리라. ‘만약에 오지 않는다면’이라고. 병실에서 베개를 베고 누워서 창밖을 보면서, '어느 누구도 병문안을 오지 않겠지'라고. 기다림이 즐거운 이유는 이제 곧 기차가 도착한다는 믿음 때문인데, 기다리는 것이, 기다리는 사람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면, 기다림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다면, 과연 그때도 기다리는 일이 즐겁고, 아름답게 느껴질까?
그래, 기다리는 일이 즐거운 것은 결국 믿음 때문이다. 믿음!!! 하지만 믿음이란 것이 믿는다고 믿어지는 게 아니다. 할 수 있어, 라고 수십 번 되뇌인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주 빈곤하게 가끔 일어나는 일일 뿐이지 않는가.
그래도, 그래도, 믿어야 한다. 어쩌겠는가 믿어야지.
"믿음의 절반은 의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의심의 절반도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조금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의심 속에서 지금도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물론 나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