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방어기제로서의 ‘억압’의 심연에 잠겨 있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 된다. 그 모든 걸 ‘나’도 모르게 실행하는 ‘나’로서. 이 실행 과정을 ‘화장법’이라 할 수 있을까. 화장법 = 페르소나persona
이 ‘나’(적)을 인식(믿음)한다는 것은 어쩌면 신을 믿는 것보다 중요할지도 모른다.(32) 종교인들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신에게 사죄를 하지만 그들의 일상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통념 속에 살아가면서 자신의 병든 삶을 살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모두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다.- 이성복 「그날」)
“머리 위에 군림하는 은혜로운 독재자 덕에 산다고 믿었지만, 실은 자신의 뱃속에 웅크린 적의에 찬 폭군의 힘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32
“나는 적을 믿습니다. 신의 존재에 관한 증거라 해봐야 허약하고 부질없기 일쑤이며, 그 권능에 대한 증거 역시 못지 않게 빈약하지요. 하지만 내부의 적의 존재를 뒷받침할 증거는 어마어마하고, 그 힘의 증거는 가히 압도적이지요. 내가 적의 존재를 믿는 것은, 밤낮할 것 없이, 내 삶의 길목마다 그것과 마주치기 때문입니다. 적이란 내부로부터 파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파괴해버리지요. 그는 각각의 현실 속에 내재하는 조락(凋落)의 기운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는 또 당신 자신과 당신 친구들의 천박스러움을 적나라하게 공개하지요. 그는 고통받을 훌륭한 이유가 당신한테 있다는 사실을 백일하에 폭로합니다. 그는 당신 자신을 스스로 혐오하게 만듭니다. 그는 처음 보는 여자의 천사 같은 얼굴을 당신이 언뜻 보았을 때조차 그 미모 속에 내재하는 죽음을 꿰뚫어보고야 말게 만들지요.” 33-34
→ 텍스토르의 이 대사가 어쩌면 소설의 핵심을 함축해 놓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소설의 핵심은 억압 속에 숨겨 놓은 그 ‘나’의 존재를 믿으라고(인식하라는, 끄집어내라는) 것이다. 필요에 의해서 치밀하게 만들어 놓지만 인식하지 못하기(부러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장을 하지만 화장을 했다고 인식하려 들지 않는 것처럼.
2. ‘나’와 ‘나’와의 대화는‘나’를 인식하는 방법론이다.
또한 ‘나’에게 ‘나’가 질문을 하는 과정이다. 그것도 제대로 된 질문을(130)
텍셀 –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면 나도 대답을 않겠네. 이렇게 물어야지. ‘내가 왜 내 아내를 죽였지요?’
앙귀스트 – 그런 질문은 가장치 않소이다.
텍셀 – 그럼 내가 아직도 자네라는 걸 못 믿겠다는 말인가?
앙귀스트 - 결코 그리 생각할 수는 없소!
텍셀 – 거 참, 자아라는 종교는 이상도 하구만. 나는 나입니다. 나일 뿐이고, 나 이외에 다른 아무도 아닙니다.... (130)
이를 통해, 좀처럼 ‘나’를 믿으려하지 않는 ‘나’를 확인할 수 있다.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나와의 대화도 없을 수밖에 없다. 결국 나는 나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아라는 종교에 빠져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많은 종교인들도 마찬가지...?! 그들이 종교를 믿는 것 같지만 실은 자아라는 종교의 신봉자들일 뿐. 이런 부분에서는 니체의 초인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를 의지적인 나로서 인식하라는...
나는 ‘나’일 뿐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나’가 아니다. 나는 타인이다. 글에서는 ‘랭보’라고 했지만, 실존주의 철학에서 제 일의 화두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타인으로부터 인식된다. 문틈으로 무언가를 훔쳐보고 있을 때, 나는 ‘나’가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저쪽 계단에서 타인의 발자국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을 때 나는 무언가를 훔쳐보고 나를 인식하게 된다. 나아가, 이 명제 안에는 나는 타인처럼 대상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또한 대상화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메타인지를 창작방법론으로 택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소설의 핵심인 듯하다.
‘나’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기
3. ‘나’와의 조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빈 시간’이다.
- 비행기 연착.(기약없이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140) 「어린 왕자」에서는 비행기의 불시착이란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더욱이 그곳은 사막이란 빈 공간이다. 프랑스인으로서 작가의 내면에는 「어린왕자」가 깊이 스며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 중 유치환의 「생명의 서」라는 작품이 있다.
나의 지식이 독한 삶의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 지지 못하여 /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이렇게 진짜 여유와 공백(140)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그것을 참지 못한다. 특히 빈 공간을 채울 것들이 즐비하는 21세기는 더욱 더.
예를 들면, 운전 중 신호에 멈춰 서 있을 때, 우리는 대개 그 시간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휴대전화를 손에 쥔다. 신호가 바뀌는 것을 번번히 놓치면서도. 누구나 이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고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자기도 그런다. "우리들은 빈틈을 가만두지 못하고, 무언가로 채우려 한다."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 소 카토
비어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자, 노력이다. (한병철-피로사회, 52) ‘나’와의 만나기 위한 노력.
4. 아쉬움
또 다른 자아를 드러내는 방법 - 대화가 아닌, 소모품이나 사인 등을 이용해 독자가 추리할 수 있게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함. 반전에 맛이 덜함. 아내를 죽일 때, 앙귀스트의 몸에 달린 넥타이핀을 부여쥐고 쓰러졌는데, 그것을 보여준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