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를 돌아보면 절대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멀쩡한 얼굴과 두 팔과 다리가 있다. 심각한 병을 앓고 있지도 않다. 내가 누군가를 위로해줄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대견하고 감사한 일이다.그렇게 생각해보면 사실 이해하지 못할 일도 없고, 내가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지키기 위한 최선은 주어진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그건 언제나 내가 지켜왔던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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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태도로 살아온 나는 상황과 상관없이 멀쩡하게 살아가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물론 문득 서러움이 올라올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정화 작용을 통해 살아온 내가 조금은 가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곧이어 이게 인생이지 하는 자기 위로 시스템이 가동되고 만다. 그렇게 나는 자신에게 슬퍼할 겨를도 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감정이 무뎌진다는 건 감정을 표현해도 받아줄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생기는 자연현상이다. 뛸 듯이 기뻐하는 것도, 목놓아 우는 것도, 미친 듯이 화를 내는 것도 생각해보니 꽤 오래전 일이 되었다. 최근 이런 나에게 붙은 별명은 보살(크리스천이지만...)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며 답답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야 한다며 설득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았다. 내 감정을 모두 쏟아내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슬픔에 빠져 한껏 울음을 쏟아내도, 분노에 휩싸여 격정적으로 화를 내 보아도 내가 원하는 상황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너무 오래전에 알아버렸다. 나는 감정에 허우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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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루나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나의 은신처가 생겼다. 루나는 나의 문제를 하나도 해결해주지는 못했지만 온기가 필요할 때마다 루나를 찾았다. 때때로 잠수를 타는 사람들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던 나였지만 루나 곁으로 숨어 들어가는 나를 보며 그들의 심경이 조금은 짐작이 되었다.
늘 밝음만 있는 사람으로 살아온 시간이 길었다. 명과 암중에 암은 나의 것이 아니라 생각했었다. 나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였다. 늘 괜찮다고 말했던 나를 돌아본다. 나는 뭐가 그리도 늘 괜찮았던 걸까.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고군분투했던 나를 돌아본다. 나는 왜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었다. 내 마음에 드는 내가 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가능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그만큼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었다.
내 글은 늘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 과거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그 속에서 깨달았던 삶의 지혜 혹은 격언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 했다. 그렇게 누구인지도 모를 누군가를 위해 쓰는 글은 그저 좋은 말들의 모음집 같았다. 누가 읽어도 좋을 만한 글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 글이 된다는 걸 당시에는 몰랐다.
내가 써놓았던 글을 바라보면서 왜인지 모를 공허감이 느껴졌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이런 거였나? 어떤 이의 글에서 이미 수백 번은 보았음 직한 좋은 말들이 너무 지루해서 하품이 났다.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찾다 보니 나는 진짜 나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좋은 글을 쓰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힘들어진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좋아 보이는글을 쓰기 전에 나부터 제대로 살펴보자.
고군분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말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나는 내가 하는 말을 지키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돌이켜보면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은 모두 ‘오늘은 이걸 해보자.’라는 아주 소소한 다짐들이었다. 그건 모두 내가 나에게 부탁하는 말들이 아닌가. 좋아 보이려는 노력을 내려놓고 그 다짐들만 지켜왔어도 내 삶은 얼마나 풍성해졌을까.
먼저 나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좀 더 따뜻한 눈길로 섬세하게 바라봐주기로 했다.
"괜찮니? 지금 기분이 어때? 네가 원하는 게 뭐니?"
"외로워도 함께 있어주니좋구나. 내가 원하는 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지금 이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