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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gsungg labnote Nov 14. 2024

이상적인 평범함, 평범한 이상형<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중 '전조등'


무럭무럭 자라날 아기를 고려해 더 큰 집을 구했다. (...) 새로운 집에서의 첫 번째 밤, 짐 정리가 덜 된 거실에서 조촐한 축하를 하기로 했다. (...) 촛불 하나가 밝히는 그녀, 그녀가 안고 있는 아기를 보았다. (...) 그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작고 예쁜 풍경 속으로 걸어가 그의 아내와 아기의 곁에 앉았다.


이 단편 소설은 평범한 남자가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평범한 회사에 취직해서, 평범하게 결혼하며,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는 이야기였다. 이름있는 기업에 입사하여, 부모님께 선물도 드리고, 오년간 몇 번의 연애를 해보고서,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한다. 이 남자의 인생은 대한민국 사회가 간주하는 이상적으로 평범한 삶같이 느껴졌다. 평균 올려치기같은 생각도 들지만, 나는 이런 금전적, 정서적 안정감을 가지며 살고 싶은 욕심이 한가득이다. 먹고 사는 데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벌이에 여유가 있는 삶을 살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사랑을 하고 싶다. 현재의 나는 이런 삶이 아니기 때문에 "하고 있다."가 아니라 "하고 싶다."라고 적어두었다. 지금의 나에게 소설 속 인물의 삶은 멀게만 느껴지고 꿈같은 이야기이다. 


이상적이지 않다고 지금의 삶이 별로라는 의미는 아니다. 본업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취미 겸 부업으로 글쓰는 SNS를 하고 있다. 본업은 겨우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의 급여를 받고 있다. 대신에 본업의 나는 폐관수련하며 기를 모으고 실력을 키우는 시간이라고 여기고 있다. 부업에서도 돈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출판사에서 신간 홍보를 위해 제공받은 도서 열 권 정도가 전부다. 대신에 취미로 책을 읽으며 글을 쓰는 일은 잡생각을 정리하고, 멘탈 케어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냥 글쓰는 일이 재미있다. 외로움은 사랑해줄거라는 기대를 하는 타인이 사랑해주지 않아서 생기는 감정이라고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 그래서 하루하루 자유롭게 살고 있는 중이다. 내 마음대로 즐기고 싶은 게임을 하고, 먹고 싶은 식당에 가고, 입고 싶은 옷을 산다.


분명히 과거의 어느 날들은 오늘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 그 과거에는 사람들의 환호라는 성취감도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감도 있었고, 통장에 꽂히는 많은 급여도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미래의 어느 날들은 오늘보다 훨씬 더 행복할 것이다. 언젠가 결혼을 해서 둘만의 소소한 일상을 보내기도 할테고, 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과 연구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상적이고 행복한 과거와 미래에 매몰되어서 오늘을 우울하게만 보낼 수는 없다. 


일요일 아침 아홉시에 출근했다가 세시에 퇴근하고. 여섯시까지 집에서 사이드프로젝트 코딩을 하는 오늘이었다. 한국사회에서는 이상적이지 않은 오늘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게 평범하다. 이 평범한 오늘에 실험 타이밍이 운 좋게 딱딱 맞아 떨어져서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었고, 코딩을 하다가 예외 경우에 대한 오류를 찾아서 수정할 수 있었고, 퇴근길에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들을 대출할 수 있었다. 이상적이지 않은 오늘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행복이 있다.




사람들이 이상형을 물으면 언젠가부터 그는 짧게 대답했다.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재밌고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죠." (...) '이상'이라는 단어는 너무 많은 것을 지시해서 거꾸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못하는 듯도 했다. 어느 날 그는 노란색 메모패드에 열두 문장을 정리할 수 있었다. 맨 윗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생물학적 여성이면서 스스로를 여성으로 규정하는 이성애자 사람." (...) "나와 모국어가 같은 사람." (...) 흰 바지를 입지 않는 사람.


주인공이 본인의 이상형에 대해서 적어보고 있길래, 나의 이상형은 어떻게 될까 한 번 곰곰히 생각해봤다. (프로미스나인이 제 이상형은 아닙니다.) 나도 한 문장씩 적다 보니까 생각보다 열두 문장은 많았다. 그리고 이상형 문장을 얼만큼 상세히 적어야할지도 고민이었다. 주인공의 두 문장을 베껴쓰기 시작하면서 어찌저찌 열두 문장을 채웠다.


생물학적 여성이면서 스스로를 여성으로 규정하는 이성애자 사람.

나와 모국어가 같은 사람.

이터널 선샤인의 대사같은 오케이를 말할 수 있는 사람.

쓸데 없는 이야기를 즐겁게 같이 하는 사람.

시간을 쏟는 일이나 취미가 있는 사람.

외적으로는 나보다 키가 작고, 얼굴은 귀여운 편인 사람.

본인의 생각을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

이성 문제로 상대를 힘들게 하지 않는 사람.

언젠가 결혼, 또는 그에 준하는 상태를 원하는 사람.

식당에서 나오면서 (간단히라도) 감사인사를 하는 사람.

1년에 1권 이상 책을 읽는 사람.

케이팝이나 인디 음악을 듣는 사람.


내가 닿고 싶은 이상향의 사람이 이상형이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나는 이터널 선샤인의 대사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사랑한다는 오케이를 외치고 싶고, 돈이 되지 않더라도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교양지식과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고, 서로에게 믿음을 주며 안정적이고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생활을 하고 싶고, 주위 사람들에게 여유로우며 친절하고 싶다. 그런 나의 평범한 이상향에 같이 발맞춰갈 이상형이면 좋겠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이상형 항목들은 내 기준으로 특이하지 않고 평범하다. 아이돌같은 엄청난 미모를 요구하지도 않고, 마이너한 취미를 공유하길 요구하지도 않는다. 나의 이상형에는 그런 게 딱히 필요하지 않다. 적당히 대중적인 취향을 공유하고, 인간관계에서 친절함을 지니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면 된다. 그런데 이 열두가지의 항목으로 사람을 제외하다보면 남는 사람이 얼마 없을 것 같다. 책을 너무 많이 읽느라고, 이터널 선샤인을 못 봤을 수도 있으며. 쓸데 없는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하니까, 남사친이 많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내 이상형은 평범한 특징들로 이뤄진 특별한 사람일 것이다.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재밌고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죠." 라는 소설의 문장이 애매하면서도, 가장 정확한 이상형인 것 같다. 나에게는 이 중에서 마지막 조건이 가장 중요하다. 인생을 살면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굉장히 소수일텐데, 그런 드문 사람은 꼭 잡아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평범할 수가 있을까. 나를 사랑한다는 그 특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평범치 않고 특별한 사람이다. 



나는 이상적이지 않은 평범한 오늘을 살아가고, 평범하지 않은 이상형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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