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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Aug 10. 2024

‘돈’이 불러온 자격지심

‘팔자 좋은 ’ 중년 아내 이야기

                                         ( 1 )

요즘 들어 딸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적어졌습니다. 딸 아이는 작년부터 자격증을 따고 무슨 스터디 모임에도들어갔다고 하더니 올해 3월부터 본격적으로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은 학교에 가고, 그 외 시간을 쪼개어 일하느라 많이 바쁜 모양입니다. 아직 졸업을 안 한 아이라 제대로 된 보수나 받으며 일하고 있는지 내심 걱정되었지만, 제가 평생 저 아이를 데리고 있을 게 아니면 밥벌이를 찾겠다고 동분서주인 딸 아이를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지요. 그런데 지난달 초쯤 딸이 통장 하나를 내밀더니 배시시 웃었습니다.

 

“이게 뭐야?”

“헤헤, 월급 통장.”

“어머, 이거 다 네가 번 거야?”

“엄마, 나 이거 적금 같은 거 넣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통장 맨 마지막 줄 오른쪽에 찍힌 액수에도 놀랐지만,

‘맡기신 금액’란에만 세로로 빼곡히 쓰인 숫자들에 더 눈길이 갔습니다. 몇 달간 돈 쓸 시간도 없이 일에만 열중한 것이 보였습니다. 최근에 몇 번 일하는 데서 칭찬받았다고 뿌듯해하길래 좋은 분들과 일하나보다 했는데, 인제 보니 이 아이가 제 몫을 충분히 해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남의 돈 버는 거 쉬운 일 아니야. 어딜 가나 항상 먼저 인사하고 말도 상냥하게 하고….”

“엄마, 나 생각보다 그런 거 잘해. 히히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서 늘 불안, 불안했는데 때가 되어 어느새 제 갈 길을 찾아가는 아이가 대견스럽고 안쓰러웠습니다. 딸바보 남편은입이 귀에 걸려서 벌써 주변 사람들에게 딸 자랑이 늘어졌습니다.

 

                                         ( 2 )

목요일과 금요일은 남편과 딸의 출근 시간이 비슷해서딸 아이가 남편 차를 타고 출근합니다. 남편은 잘 자란 딸이 자신의 출근 메이트가 된 요즘 일상에 신바람이 나서 딸과 함께 출근하는 날 아침이면 부쩍 말수가 많아졌습니다. 셋뿐인 식구가 입을 꾹 다물고 각자 할 일만 하는 고요한 아침보다 남편의 입담이 곁들어진 시끄러운 아침 일상이 더 행복하다는 감사가 차오를 즈음, 남편의 이런저런 수다 중에서 꼭 빠지지 않는 단골 멘트 하나가 자꾸만 제 복(福)을 걷어차게 만들었습니다.


“요즘 우리 집에서 엄마 팔자가 제일 좋은 거 같지 않니? 아빠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 딱 일주일만엄마랑 바꿔서 살아봤으면 좋겠어.”

“아빠, 나도! 히히히.”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죽이 잘 맞는 부녀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정말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듣기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지 목요일만 되면 빼놓지 않고 단골 멘트를 날리는 남편의 입이 얄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슴 속에서 몽글몽글 뭉쳐진작은 화 덩어리가 제 목을 타고 올라와 입 밖으로 터져나오려는 걸 몇 번이나 꾹 참았습니다.

 

‘아니, 딸이 이쁘면 그냥 칭찬해주면 될 것이지 ‘팔자 좋은 엄마’ 얘기까지 들먹이면서 저렇게 오버할 일인가? 시답잖은 대화에 한마디도 거들지 않은 내 모습이 안 보이나? 으이그, 눈치 좀 챙기지. 아냐, 잠깐만. 내가 기분 나쁠 걸 알면서도 저러는 거 아냐? 돈 좀 번다고 생색은….’

 

남편과 딸을 출근시켜 놓고 혼자 가만히 생각해보니 화딱지가 났습니다. 그런데 화가 나면 날수록 심정의기세가 끓어올라야 정상인데 왠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남편의 말대로 저는 얼른 청소기를 돌리고 나서 조용한 나만의 공간에서 ‘팔자 좋게’ 커피 한 잔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이따가 남편이 퇴근하면 오늘은 꼭! 이 문제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 3 )

딸이 집에 오고, 한 시간쯤 있다가 남편도 퇴근했습니다. 제가 종일 삐져있었다는 걸 알 길이 없는 남편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습니다. 막상 그런 얼굴을 마주하니 괜한 얘기 꺼냈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고, 구차하게 내 팔자도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다고 구구절절 자기합리화를 늘어놓고 싶지도 않아서 ‘꼭 짚고 넘어가려던 그 문제’는 일단 접어두기로 했습니다. 가족 간에 생긴 이견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헤집고 싶지 않은 제 신조가 그 순간 작동한 것 같습니다.

 

“엄마, 아빠가 나한테 요즘 바라는 게 없을 정도로 행복하대.”

“어?”

“내가 내 앞가림할 정도로 잘 커서 이제부터 아빠는 엄마만 챙기면 된대.”

“아빠가 그렇게 말했어?”

“어. 근데 나 아직 멀었는데… 아빠는 왜 계속 엄마만 챙겨? 그럼 나는?”

“너는 아빠같이 자상한 남편 만나면 되지.”

 

‘팔자 좋은’ 중년의 아내는 목요일마다 들었던 남편의 말이 복(福)인지도 모르고 혼자 심사가 뒤틀려 있었습니다. 남들 다 퇴직을 준비할 나이에 본인이 벌어오는 돈으로 처자식이 잘 먹고 근심 없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해서 한 말이었을 텐데… 정작 눈치가 없는 쪽은 저였던 겁니다. 하마터면 괜한 자격지심으로 남편에게 가시 돋친 말을 퍼부을 뻔했습니다.


남편이 또 저에게 단골 멘트를 날리면 몸이 배배 꼬일지라도 눈 딱 감고 이 말을 해줘야겠습니다. 그것도 아주 상냥하게.

 

“그래, 여보. 나 요즘 정말 팔자가 늘어졌어. 든든한 남편, 기특한 딸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우리 집에서 내가 제일 편한 거 맞는 거 같아. 이게 다 당신 덕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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