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는 아니지만...

-오늘도 행복하세요

by 하이움

일단 셰프 장갑을 끼자.

그러면 전투의 자세가 된다.

우선, 그 마음만 되어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덥고 너무 습하니까

자꾸만 해야 할 일들을 미루고 있는데

그것이 산처럼 쌓여있다.

최대한 빌려 본다고 했는데도

좀처럼 대출의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 책들을 사보느라

어느새 쌓여버린 책들

한동안은 읽지 않는 책들과 기부가 가능한 깨끗한 책들을

선별해서 보내줘야 하는데 그것도 밀려 있고

고개를 돌려보나 마나 세탁실에 채소가 가득할 것이다.


그건 엊그제 일이었다.

덥다는 핑계로 남편과 둘이서 국수 한 그릇씩 사 먹고

좀 걸어볼까 하던 차에

노상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할머니를 마주쳤다.

요즘은 단속을 해서인지

좀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어쩐 일일까..

흔히 시장사람들이 하듯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사보라고 권하는 말도 없이 마치 그런 건 소용없다는 듯

조용히 홀로 앉아 마늘을 까고 계셨는데

소쿠리마다 깻잎이며 가지, 노각, 파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법 어둑해질 즈음이었으니

접고 들어갈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많아 보이는 채소들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요즘은 좀처럼 길에서 사 먹는 사람이 없는 데다

날씨가 너무 덥다 보니 채소들이 그리 신선하게 보이지 않아서

올 때 그대로 줄어들지 않은 게 아닌가

그래서 날은 어둑해지는데 귀가하지 못하는 건 아닐지

자꾸만 괜한 마음이 쓰였다.


다른 건 몰라도

가지밥을 너무 좋아하니까

마트 말고 할머니 걸 사드리면 좋을 것 같았다.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도

할머니가 계속 계시면 사드리자라고 마음먹었지만

별소득이 없었던 하루에 실망하며

가져온 그대로 무거운 채소를 이고 들어가실까 봐

산책을 하는 둥 마는 둥 남편을 앞세워

할머니한테 갔더니 역시 그대로 계신다.


"할머니 지금 2만 원 밖에 없는데 가지랑 노각 좀 주세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노각요리는 해본 적이 없다.

다만 늘어놓은 것 중

가장 무거워 보이는 것을 사드리고 싶었고

행여 모르는 것은 우리에겐 유튜브 셰프들이 있지 않은가

문제없다. 보고 따라 하면 그만이니까.


마트보다도 엄청난 양으로 얻어와서

남편에게는 좀 미안했지만

할머니의 퇴근길이 조금이라도 가볍다면

그로서 된 거 아닐까 남편과 눈이 마주친다.

같은 마음이 분명하다.

고마운 남편~


할머니가 드디어 퇴근을 하고

슈퍼에 가 분홍색 소시지를 사서 아이들이랑

혹은 할아버지랑 둘이서 맛난 저녁을 먹는다

순전히 나만의 오만한 상상이지만

너무 정겨웠고 할머니 혼자만의 식사가 되었든

더 따듯한 저녁이 기다리고 있든 나는 모르겠지만

도와드려야 한다는 마음은 없었다.

애써 키운 채소들을 필요로 하는 나와 직거래한 것만으로

의미 있는 일 아닐까.

덤으로 나는 마음이 따뜻했고 정겨웠으므로

그날 저녁 밤산책은 참으로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기억의 실체가 세탁실에 고스란히 있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일어나서 통통하기도 하고 마른 제각각의 가지를 닦아서

가지밥을 짓고

아들 허벅지만 한 노각을 씻고 절여서

생애 처음으로 노각장아찌도 만들어 봐야지.


갑자기 손에 힘이 들어가고

팔뚝에 힘이 불끈 솟는 것 같다.

셰프 장갑만 끼면 나는 어쩐지 힘이 난다.

셰프도 아니면서.


지구환경에 좋을 게 없고

더더군다나 입에 들어가는 음식에는 쓰고 싶지 않으니 좀처럼 쓸 일이 없지만

독한 세제를 써야 하는 날

일부러 김치도 담그고

오늘같이 채소를 다듬기도 하는데

이것도 장비빨이라고

장갑을 끼는 순간 할만한 마음이 되고

외려 의욕이 넘치는 날이 있다.


그러다가 얼마못가 기가 죽기도 한다.

옳은 일은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리고 맨손의 감각을 싫어하지 않으니까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까슬한 오이들을 씻고

흙이 가득 묻은 감자도 씻고

역시 미루어 두었던 분갈이용 흙을 섞은 뒤

셰프장갑을 벗고

다시 맨손이 된 나는

가지와 노각을 정성스럽게 다듬고

유튜브를 보고 배운 대로 설탕과 소금을 이용해

노각의 수분을 빼고 있는 중이다.




오이를 따지 않고 오래 두면 된다는 노각

그래서 호박처럼 생겼지만 자를 때마다

향긋한 오이 비누 같은 냄새가 너무 좋더라고요.

그동안 얻어만 먹었지

요리는 이번이 처음이지 뭐예요^^;

오이를 절여 피클보다는 조금 덜 달게 만들어 놓으니

시원하고 아삭한 게 정말 맛있네요.

국수든 냉국이든 어디든 어울리고요.


그리고 고혈압과 항암효과가 있다는데

어딘지 익숙한 멘트.

웬만한 채소와 과일들은

하나같이 고혈압에 도움이 되고 항암효과

심지어 다이어트 효과가 있다는데 왜 그런가요 ^^


암튼 할머니 덕분에 요리 하나 배웠네요~

우리 할머니는 아니지만 정겨운 느낌 한가득이었고

브런치 글을 읽다 보면 할머니에 대한 추억 이야기가 많고

그중에서 여름이면 노각 요리가 빠지지 않던데

그런 추억을 가지신 분들 부럽습니다~


저는 내가 만들어놓고 할머니가 해주셨다 상상하면서

꺼내 먹으려고요^^


가지밥과 노각장아찌

올여름 단골메뉴가 될 것 같아요~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