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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히 Dec 13. 2024

나와 닮은 하루를 발견하다

02. 단 일 분이라도 내 스스로 의도할 수 있다면

퇴사 후 한두 달은 정말 즐거웠다.

그동안 놓쳤던 드라마를 정주행하고, 유행하는 예능을 보며 깔깔 웃다가 하루를 마무리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취미를 다시 꺼내 들고, 미뤄왔던 약속을 하나둘 정리했다. 가족과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아침 운동으로 상쾌한 하루를 시작했다.


마치 어릴 적 방학처럼 주어진 자유를 만끽했다. 직장에서 쳇바퀴처럼 반복되던 삶과는 달리, 이제는 하루를 내 마음대로 꾸밀 수 있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01.

하지만 드라마는 몇 편 만에 흥미를 잃었고, 예능은 점점 뻔하고 지루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시간도 어느덧 끝났다.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설렘이 무뎌지기 시작한 건 익숙함 때문이었다. 낯선 자유에 익숙해질수록 오히려 허전함이 커지고 무언가 비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 여덟 시 반쯤 운동을 나간다. 땀을 흘리고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나면 기분이 한결 개운하다. 샐러드를 먹으며 어제 봤던 드라마의 감상 포인트를 짚어보고, 영상 클립을 다시 찾아본다. 카페에 들러 책 한 권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거나, 동네를 한 바퀴 돌기도 한다. 그러다 마트에 들러 냉장고를 채울 재료를 사서 집에 돌아온다. 나름 부지런히 보낸 하루다.


그런데 시계를 보면 아직 오후 세 시. 아직 내 하루는 한참 남았지만 더는 해야 할 일이 없었다. 가장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고 있으면서도 허전함이 밀려온다.


무언가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그래서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낯선 단어와 문장들이 그 공허를 메울 수 있을지 기대하면서.



02.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지루함을 느끼는 이유를 새로움에 대한 뇌의 갈망으로 설명한다. 우리 뇌는 새로운 자극을 받을 때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한다. 도파민은 쾌감과 보상을 느끼게 하며, 우리는 그것을 반복적으로 원하게 된다.


그러나 똑같은 자극이 계속 반복되면, 뇌는 더 이상 그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 익숙해진 자극에는 더 적은 도파민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처음엔 즐거웠던 일조차 점점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게 된다.


회사에 다닐 때는 나만의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면서도, 안정감을 느끼곤 했다. 출퇴근이라는 반복된 일정이 있었고,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나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리듬이 흐트러진 순간, 나는 하루를 스스로 설계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하루는 단순히 '자유롭기만 한 하루'가 아니었다는 것을. 진짜로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나만의 리듬과 목적이었다. '하고 싶었던 일'은 한정적이고 일상은 반복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반복이 나를 위한 리듬으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내가 원하는 삶이 시작될 것이다.



03.

단순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불러줄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게 중요한 건 하루의 끝에서 무엇을 했는지 분명히 떠오르는 삶이다.


산책을 하고 커피를 내리는 사소한 일상을 흘려보내지 않는다. 산책 중에 떠오른 생각을 일기에 남기고, 커피를 내리며 오늘의 업무를 준비한다. 드라마를 보며 쉬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가벼운 뉴스레터를 읽으며 트렌드를 분석해 본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아히는 이를 의식의 질서 상태, 즉 플로우라고 명명했다. 오로지 목적을 위해 자유롭게 에너지를 사용되는 순간이 되면 우리는 스스로 설정한 목표 수행을 위해 집중하게 되며 더욱 강하고 자신감 있는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는 뜻이다.


단순한 경험을 넘어서 자아를 확장하고 성취감을 누릴 수 있는 상태가 필요했다. 모래알처럼 흔하다는 건 특별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래가 없다면 모래사장도 없다. 흔한 나날 속에서도 스스로의 특별함을 찾아가기로 했다.


매일이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

특별함은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변화가 아니라,

매일 조금씩 나를 채워 가는 순간들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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