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니히 Dec 06. 2024

진심으로 잘 살고 싶어서

01. 뭐라도 해 보려는 프리랜서의 이야기

출근하지 않는 아침이 찾아왔다.

처음으로 달력이 텅 비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백수가 되었다. 아니, 프리랜서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돈을 벌기 시작한 20대 중반부터 이곳저곳 방황했다. 한 회사에서 2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퇴사한 건 열정이 부족한 탓일까? 삶을 버티는 끈기가 모자랐던 탓일까? 내일 지구가, 혹은 회사가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흔하다던데. 모두가 다 비슷한 힘듦을 겪고 있지만 다 견디면서 사는 거라던데.


"다들 힘들어도 견디며 산다는데 너는 왜 퇴사했어?"


누군가 내게 물었다면, 아마 대답하지 못했을 거다. 답을 찾지 못해 백수가 되었으니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진심으로 잘 살고 싶어서, 뭐라도 해야 했다.



01. 

퇴사 후 경영, 마케팅, 에세이 등 자기 계발에 관련된 책 읽기 시작했다. 워낙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책을 만들고 싶어서 편집 디자이너가 되었음에도 에세이 분야에는 눈길조차 가지 않았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남의 불행을 굳이 돈을 주고 사서 읽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어차피 에세이야 "나 이렇게 힘들었지만 결국 이렇게 이겨냈어요" 하는 이야기 아닌가? 싶기도 했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몇백 년 전에 이미 진리를 깨달은 철학자의 말을 한 번이라도 더 읽고 싶었다. 다시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불행한데, 당신은 불행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굳이 알고 싶지 않아" 하는 못된 질투에 가까웠다. 


그래서 직장에 다닐 때는 에세이를 찾지 않았다. 대신 동료들과 밥을 먹고, 누군가 다녀온 주말 카페 이야기를 듣고, 최신 유행을 귀동냥하며 세상을 느꼈다. 하지만 백수가 되고 나니, 그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행히 가족과 함께 살기에 종일 말하지 않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생존 보고에 가까웠다.


혼자라는 것의 낯섦이 너무 커서, 결국 에세이를 검색했다. 모두가 인정하는 보편적인 불행 탈출법이 필요했다. 무엇이든 나의 삶에 길잡이가 되어주길 바랐다.


남들만큼만 잘 지내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살아남고 싶었다.



02.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는 '나'를 찾으라고 했다. N잡러는 물론이고 SNS 토대로 한 다양한 방식으로 페르소나가 자유롭게 태어나고 사라지는 세상이니 어지러운 이야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중심이 될 '나'를 찾으라고.


백수에게 남는 건 시간이고 열정이다. 그래서 첫날은 메모장을 켜고 나에 대해 적어 본다.


여성.

N년차 편집 디자이너.

백수 혹은 프리랜서.

문학과 과학에 관련된 책을 좋아함.

운동은 싫지만, 체력이 떨어졌음을 느끼기에 아침마다 운동을 함.

밥, 빵, 면을 좋아함.

낯선 대화는 힘들지만, 편한 사람과 익숙한 주제로 나누는 대화는 즐거움.

키링과 작은 아이템을 좋아해서 나만의 소품샵을 만들었음.


리스트를 채워나갈수록 점점 내 향기가 뚜렷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특별하지 않구나."


그게 싫지 않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사람이란 사실이. 모래사장의 작은 모래알처럼 나도 세상의 일부라는 뜻이니까. 그러니까, 그게 참 다행이었다. 흔하다는 사실이 태어나 처음으로 만족스러웠다. 세상의 모든 에세이를 전부 읽은 것도 아닐뿐더러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읽은 몇 권의 책이 전부였지만 완독 후에는 뜨뜻미지근한 위로가 생겼다.


나의 인생을 뒤바꿀 수 있는 강렬한 깨달음이나 당장 집 밖으로 나가서 뭐라도 해 보고자 하는 의지도 아닌 보통의 하루가 쌓여 나라는 인간을 만들게 된다는 그런 위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와닿지는 않을 그런 말들.


그제야 나는 '내가 백수가 되었을까?' 라는 질문 자체가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질문에 기저에는 '왜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게 되었느냐?'는 자책이 담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되물었다.

나는 왜 스스로가 궁금할까?

왜 자꾸만 스스로를 정의하고 싶을까?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걸까?



03.

그래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오늘의 나는 잘 살고 싶어서 뭐라도 해 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내일의 나는 쉬고 싶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더 열심히 살고 싶어서 거창한 일을 시작할 수도 있을 테니까.


작은 모래알이 파도에 휩쓸려 모래사장을 떠나지 않게. 이곳에 있음 그 자체로 나의 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게.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어서.


아직 목표가 없는 잔잔한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어디로 나아갈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이 잊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기억하기 위한 기록을 남기는 시간이 되기를.


내가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주기 위해.


그렇게 뭐라도 해 보자는 마음으로

잘 살기로 다짐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