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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히 Dec 20. 2024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란

03. 백수의 24시간은 제법 알차다.

이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겼다.

하고 싶다는 열정도 샘솟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여전히 막연했으며 '어떻게 잘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운동복을 입고 신발끈까지 동여맸는데, 정작 골인 지점이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잘 살고 싶다'는 목표는 너무 크고 추상적이다. 다시 한 번 메모장을 켠다. 이번에는 내가 아닌,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 적어 보기로 했다.


돈 많이 벌기

사업 차려서 번창하기

인플루언서가 되기

행복하기

다이어트


메모장에 적힌 목표는 어딘가 익숙한 것들로 가득했다. '다이어트'는 벌써 몇 년째 내 리스트를 차지하고 있었고, '행복'은 단순하지만 달성하기 어려운 숙제 같았다.


이번에는 단순히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목표마다 숫자를 붙여 보기로 했다. 벌고 싶은 금액, 목표로 하는 팔로워 수, 도달하고 싶은 몸무게까지. 이렇게 된다면 제법 성공한 인생일 것 같았다.


뿌듯한 마음으로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선 돈을 벌기 위해 프리랜서 지원용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인플루언서가 되려면 SNS 계정을 만들어 릴스를 찍어 올려야 했다. 마지막으로 다이어트를 위해 헬스장에 등록하고 닭가슴살도 구매하기로 했다.


호기롭게 시작한 계획은 어느덧 점점 길어졌다.
하지만 막상 실천에 옮긴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01.

한창 좋아하던 짤이 있었다. ‘천지창조 계획’이라 불리는 짤인데, 시간 배분에 번번이 실패하는 사람의 계획을 농담 섞어 풍자한 내용이었다.



왜 공감을 많이 받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호기롭게 지원한 프리랜서 아르바이트는 예상보다 빡빡했다. 일주일에 5~6건을 동시에 마감해야 했으며 낮밤을 가리지 않고 연락이 오는 바람에 하루에 1~2시간씩 나누어서 잠을 자야했다. 멋진 로고를 달고 고심해서 만든 SNS 계정의 게시물 업로드는 벌써 전의 일이 되었다. 다이어트는.......


특히 프리랜서 디자이너라는 일은 양날의 검이었다. 낮에도, 밤에도 끊임없이 연락과 응대가 이어졌다.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맞는 건지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던 날이 있었는데 몇 날 며칠은 무슨, 일주일에 합쳐 5시간도 못 자는 삶이 되었다.


게다가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분명 쳇바퀴 같은 삶을 피하기 위해 퇴사를 했는데 결국 돌고 돌아 집에서 근무를 하는 상황이 되자 불안과 우울까지 생겨 몸과 마음이 다 말썽이었다.


그렇게 번 작고 소중한 알바비는 병원비로 지출해야 했다. 잠을 못 자니 입병이 나고, 위장이 버텨 주지 못했다. 골골대며 만든 작업은 당연히 내 눈에도 차지 않았으며 마감 기한에 쫓겨 울며 겨자 먹기로 제출한 결과물은 포트폴리오에도 쓸 수 없는 처참한 시안이 되고 말았다.


열심히 계획을 세워도 결국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곤 했던 나날은 내가 계획한 '잘 사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02.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중립을 찾아야 했다.

이럴 때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가짜 노동의 저자 데니스 뇌르마르크와 아네르스 포그 엔센은 텅 빈 노동이라는 관점을 설명한다.


넘치는 여유 시간을 걱정하는 현대 사회 사람들은 언제나 끊임없이 무언가 하고 있어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린다. 그 결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거나, 억지로 시간을 늘리거나, 일을 꾸며내는 가짜 노동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노동을 특권으로 여기며 '잘 지내?'라는 인사에 요즘 할 일이 없다는 답변 대신 "일이 많아서 힘들지만 잘 지낸다"는 답변을 돌려 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것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현대인의 강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강박, 그리고 무엇보다 성공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은 사람들을 불필요한 업무와 텅 빈 삶으로 몰아넣는다. 남들에게 '좋아 보이려고 애쓰는' 과정에 몰두하느라 정작 중요한 목표는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그 구절을 읽고 나니, 이마를 빡빡 때리느라 손바닥이 아플 지경이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업무를 하느라 나의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고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이 내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짜 노동을 통해 '좋아 보이려고 애쓰는' 과정에만 몰두하니 정작 중요한 문제는 점점 뒷전이 된다는 구절에 다다를 즈음에는 이마를 빡빡 때리느라 손바닥이 아플 지경이었다.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일이나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일이 아닌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업무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나의 의지와 열정을 어떻게 소비해야 할지 가닥을 잡게 되었다. 나의 삶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다. 나는 장기 마라톤을 뛰는 선수이므로, 조금 더 신중하고 중요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03. 

예를 들어 내가 메모장에 적어 놓은 '다이어트'를 보자.

6개월 동안 10kg 감량이 목표라면 3개월에 5kg, 1개월에 1.6kg , 1주일에 0.4kg를 빼야 한다. 그렇다면 닭가슴살을 구매하는 대신 주 3회 이상 운동, 21시 이후 금식으로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다음으로 '돈 많이 벌기'도 명확 목표를 세워 본다.

생활비, 부모님 용돈, 저축을 포함한 기본 지출 비용에 플러스 알파를 더해  내가 월에 벌어야 할 돈과 벌고 싶은 돈을 계산해 본다. 그럼 나의 시급도 계산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프리랜서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하고, 어느 정도 수익을 올려야 할지 선택과 집중을 도울 수 있는 계획이 세워진다.


똑같이 프리랜서 생활을 하는데 달라진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목표가 생겼다'고 대답할 수 있다.


똑같이 밤을 새우고, 업무가 과중되어도 끝날 기약 없이 바쁘기만 한 상황과, 이번 목요일 오후 3시까지 모든 일을 끝내고 금요일은 자기 계발에 몰두하자는 마인드는 완전히 다르다.


목표가 생기면 결단력도 생긴다. 무리한 의뢰를 받지 않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하루의 우선 순위를 점검하고, 작은 성공을 쌓아 간다. 오늘 내가 해야 하는 작은 실천과 계획이 모여 나의 삶을 지탱하는 디딤돌이 된다.


그렇게 하루를 쌓아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목표에 더 가까워진 나를 발견할 것이다. 비로소 나의 '진짜 노동'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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