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가 자주 눈에 띄지 않은 지도 오래됐지만 아기가 있는 유모차를 보는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 됐다. 요즘은 유모차에 아기 대신 강아지가 타고 있는 장면을 훨씬 흔하게 볼 수 있다.
7-8년 정도 됐을까, 자전거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의인화된 한국의 강아지를 목격했다. 어느 쾌청한 주말 오후 친구와 함께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였다. 덕소 근처를 지날 무렵 멀리서 오는 자전거에 어린아이를 싣는 보조 수레가 연결돼 있는 것을 보았다. 보조 수레는 자전거를 일상적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는 유럽의 소도시에서 종종 본 적이 있었다. 출퇴근하는 엄마 아빠가 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데려 올 때 주로 이용한다.
한국에서는 그때까지 본 적이 없어서 잠시 공간 조정이 필요했다.
보통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한국에서, ‘더구나 자전거 길에서..’, 흔치 않은 경우라는 생각을 잠깐 했던 것 같다. 아니면 ‘자전거를 무지무지 좋아하는 사람이 아기를 싣고 나왔나 보다.’ 했다.
첫눈에는 수레가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쪽은 오고 나는 가고 있으니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가까워졌다. 자전거의 앞에 연결한 수레는 나무로 만든 것인데 제법 크고 견고해 보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가까이 오는 수레에서 아기가 보이지 않았다.
‘빈 수레인가?'
'왜 달고 나왔지?’
‘탈착이 번거로우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기가 누워서 보이지 않나?'
'덜컹거리는 자전거 길에서 아기가 그렇게 있을 수가 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수레의 테두리가 제법 높기는 했다. 아무리 그래도 외출할만한 아기가 애써 숨기 전에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었다.
생각이 길을 잃고 잠깐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그 자전거와 나는 마주칠 만큼 가까워졌다. 나의 자전거 안장이 상대적으로 높아 나는 다가오는 수레의 상황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서로 마주치기 직전에 나는 비로소 수레의 쓰임새를 알게 됐다. 그리고 이 혼동의 전모를 단번에 파악했다. 거기에는 수레의 테두리에 충분히 가려지는 작은 강아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마치 아기인양 꾸민 채 보조 수레에 실려 있는 것은 반지르르 하얀 털을 가진 강아지였다.
한 번은 전철에서 유모차를 끌고 탄 젊은 부부를 보게 됐다. 전철에서 유모차를 보는 경우가 많지 않아 눈에 띄었지만 그들이 서 있는 자리와 내가 앉은자리는 제법 떨어져 있었다. 붐비지 않는 시간이라 해도 유모차를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여느 승객들처럼 책을 읽으며 잠깐씩 앞을 져다 보는 정도의 무심한 태도로 얼마동안을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 유모차의 부인이 불룩하게 무엇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제법 넓은 천을 삼각건 감듯 목에 걸고 보퉁이를 만들었는데 그 안쪽으로 무엇이 담겨 있었다. ‘아기를 희한하게 안았다.’고 잠깐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에게 안긴 아기는 거의 움직임이 없었지만 간혹 조금씩 꼼지락거리는 것 같았다. 그럴 때 아기를 바라보고 어르는 젊은 엄마의 눈길과 손길이 그렇게 정성스럽고 지극할 수가 없었다.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흔히 볼 수 없는 포근한 장면이었다.
그러기를 얼마였을까, 전철이 약간 급제동을 하면서 사람들이 자세를 고쳐 잡게 됐다. 젊은 엄마 역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그 찰나, 보퉁이가 빼꼼히 열렸다.
‘아이코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움찔했지만 그가 눈치챌까 봐 행동은 꽉 잡았다. 그것은 아기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덮은 천의 색깔과 비슷한 털을 가진 작은 강아지가 들어있었다. 행동은 물론 마음도 들키지 않으려 나는 예민하게 신경을 썼지만 사실 그럴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도, 전철 안의 누구도, 나의 행동을, 더구나 내 마음의 미동을 주시하지는 않았다. 감동했던 마음에 심지어 배반감 비슷한 감정이 일었지만 ‘나 혼자 헛물켜고 무슨 삿대질인가.’ 싶어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깨어 있는 강아지가 어쩌면 그렇게 잠자는 아기처럼 조용하게 안겨 있을까.’ 궁금했다.
몇 정거장을 더 지난 후 나는 내리기 위해 일어섰다. 그 젊은 부부가 서 있는 곳이 마침 출입문 앞이어서 비로소 가까이 가서 강아지를 보게 됐다. 여전히 강아지는 그냥 지나치면 알기 어려울 만큼 천보퉁이 속에 폭 담겨 있었다. 다른 승객들이 강아지를 싫어할 수도 있어 조심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강아지가 그 상황을 이해하는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눈치껏 강아지를 보느라 젊은 아빠가 잡고 있는 유모차에는 눈길을 줄 시간이 없었다. 전철이 속도를 늦추고 정거장에 설 무렵, 내릴 준비 삼아 곁눈질하던 시선을 차창으로 옮길 때였다. 시야에 얼핏 잡힌 유모차 속에 약간의 움직임이 있었다. 뚜껑으로 가려져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 아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 역시 남편이 극진한 태도로 가리고 있어서 유심히 볼 수는 없었다. 내려야 하기 때문에 그럴 시간도 없었다.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내리면서 고개를 돌려 뒷눈으로 유모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강아지 두 마리가 어쩌면 그렇게 사이좋게, 그리고 조용하게 엉켜있는지 다시 한번 놀랐다.
이제 유모차는 강아지용 외출 장비가 됐다. 강아지가 아기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전철 안의 유모차는 여전히 드물지만 강아지를 유모차에 싣고 뚜껑을 열어 놓는다고 눈치를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유모차에 탄 강아지는 옷도 입고 날씨가 쌀쌀하면 포대기도 덮고 다닌다. 한국에서 애완견은 의인화된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된 것 같다.
익숙한 장면이 깨지는 순간 우리는 흠칫 놀라게 된다. 종종 방문하게 되는 영국의 케임브리지에서 나는 또 한 번 공간 조정을 해야 하는 일을 겪었다.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케임브리지는 자연과 도시가 뒤섞여 있는 작고 조용한 지역이다. 대학 도시가 대체로 그렇듯이 몇몇 관광 명소에는 사람들이 몰리지만, 대체로 적절한 규모의 인구가 번잡하지 않게 사는 곳이다.
어느 날 오전 주택가 골목을 걷고 있는데 젊은 여성이 맞은편에서 유모차를 밀며 오고 있었다. 그곳의 분위기에 맞춰 마주 오는 젊은이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가까이 오는 유모차를 보았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어, 여기는 유모차에 아기가 있네.’
생경한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이미 낯설어진 장면이었다.
유모차에는, 불과 몇 개월이나 됐을까, 그러나 나름대로 윤곽은 뚜렷하게 잡힌 진짜 아기가 있었다. 성별을 알 수 없는 그 아기는 옴찔대며 세상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 후 케임브리지에는 유모차가 많다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됐다. 두 명, 심지어 세 명까지 큰 유모차에 싣고 지나가는 힘차고 씩씩한 엄마 아빠를 보기도 했다. 가까이 지나게 되면 잠깐이나마 아기를 바라본다, 다양한 표정의 아기들이 예쁘고 참 우습다. 유모차는 아기들과 외출하기 위한 부모들의 필수 장비라는 사실도 다시금 상기하게 됐다.
강아지가 유모차를 타고 의인화된 대접을 받는 것이 꼭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나름대로 사회적 효용이 있어서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강아지가 아기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염려스러운 일이다. 이 걱정거리가 우리 주변에서는 종종 책임 공방으로 비화되곤 한다. 이른바 세대 간의 갈등 양상으로 치닫기도 한다. 굳이 책임을 따진다면 그러한 선택이 일반화되는 사회를 만드는데 더 기여한 기성세대를 먼저 탓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이러한 상황을 목적으로 두고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
개개인들은 열심히 고민하고 합리적 선택을 했다고 한 결과가 집합적 사회 현상으로는 그 반대의 길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금도 궁금증이 많아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는 역사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그러한 일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해결책이 보여도 실행은 쉽지 않고 가능해도 보통 오래 걸린다.
한국은 인구가 줄고 있다. 이미 추세를 탄 것 같다. 앞으로 우리는 또 어떤 낯선 장면에 익숙해지게 될까? 이미 깊어져 새로울 것도 없는 걱정이 케임브리지에서 아기가 탄 유모차를 보며 생뚱맞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