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 :
1. 이치에 맞지 않거나 도리에 어긋남. 또는 그런 일
2. 부정행위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
어느 날, 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는 왜 엄마가 없어?”
나는 잠깐 대답을 주저했다. 당시 아이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세상 그 누구도 모체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법. 그럼에도 나는 엄마가 없으니 이 부조리를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하기에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슬쩍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냥... 그냥 없어.”
결국 아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돌아서 다시 손에 쥐고 있던 로봇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고, 그 뒤로 다시는 내게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엄마.
그래, 나는 엄마가 없다.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없다. 굳이 사람들에게 엄마가 없다고 떠벌리지는 않지만 입 밖에 ’엄마‘라는 단어를 결코 올리지 않는 나를 보며 지인들이라면 내게 엄마가 부재한단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으리라.
물론 나도 누군가의 자궁에서 태어난 것은 맞다. 그래서 나도 어릴 적 나를 태어나게 해 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곤 했다.
떠올리면 참 아픈 기억이다. 슬프게도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더 그녀를 사랑했으니- 언제나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인 법이니까.
나는 아직 생리도 시작하지 않은 초등학생에 불과했던 나를 매몰차게 버리고 떠난 그녀를 기억한다. 그녀에게 나를 제발 데리고 가달라고 공중전화로 애원하자 유선 전화기의 코드를 뽑아버렸는지 끝내 연결되지 않았을 때의 애타는 심정도 기억한다. 아빠가 보다 못해 양육비를 줄 테니 좀 키워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자, 그럴 바에는 고아원에 버리겠다고 내 면전에서 내뱉던 목소리도 기억한다.
집보다 고아원이 차라리 더 편할 거라던 궤변-
나는 그날 이후 그녀와 다시 함께 살 수 있으리라는 꿈을 버렸다. 휴지조각처럼 꾸깃꾸깃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럼에도 내 삶에서 그녀를 지우는 데에는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본디 사랑을 받지 못한 자가 더 사랑받으려 노력하는 게 세상의 이치인지라 나 역시 함께 살 수 없다는 사실은 겨우 인정했음에도 사랑받는 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며 끈질긴 거머리처럼 그녀에게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버려진 아이가 온전한 사랑을 받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자주 버려졌다. 말을 곱게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엄마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때로는 재혼을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수개월씩 연락을 차단당하길 일쑤였다. 그러다 다시 제풀에 꺾여서 오는 연락을 받아 ‘엄마,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길 몇 년이나 반복하다가 결국 모질게 끊어내고 만 것이다.
계기는 느닷없는 열반처럼 찾아왔다. 늘 되풀이되는 사랑 구걸에 지치지도 않던 나였건만- 그날은 아무 이유 없이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그녀의 자궁에서 태어났음에도 엄마가 없는 부조리한 탄생의 부산물이 되었다.
재작년이던가, 어느 군의 면사무소 사회복지과 주무관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의 곤란한 생계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내용이었다. 주무관은 법적으로 친자인 내게 모친을 부양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지만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절대 그럴 의사는 없노라고. 주무관은 이런 케이스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닌 듯 우편으로 무슨 서류를 발송할 테니 작성하여 등기로 발송해 달라고 하였고, 나는 그 서류를 받자마자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후 속시원히 당일에 빠른 등기로 송부하였다. 그 뒤로 나는 이제 법적으로도 엄마가 없는 셈이 된 거나 마찬가지다.
나는 엄마가 없다:
만약 이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는 정말 좋은 엄마가 있었을 거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