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잘 부르고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목청도 유전이라면 유전인데 나는 부모님을 닮지 않았던 모양이다.
60세에 시작한 해금
기억 속에 아련한 노랫소리가 있다. 부엌에서 칼질 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미역을 따오리까아~ 소라를 딸까~” 하는 엄마의 작은 흥얼거림. 엄마의 콧노래가 들리는 날의 밥상은 엄마의 노래처럼 맛깔났던 것 같다.
늦은 밤 골목어귀를 울리던 술 취한 아버지의 노랫가락도 잊을 수 없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리면 엄마는 얼른 골목으로 우리들을 내보내셨다.
풀어헤친 넥타이와 빠져나온 와이셔츠. 마중 나온 아들 딸을 보고 반가워하시던 아버지 손에는 어김없이 달콤한 태극당 도너츠나 종로 영양센터의 전기구이 통닭이 들려져 있었다. (나는 종로구 관철동에 살았다. 태극당, 종로복떡방, 종로서적과 같은 블록의 골목이다.)
중국 우전 수항마을에 얼후고수
음악에 대한 열망은 있었는지 대학시절 한 때 영어회화를 배운다고 학원비를 타서 기타 학원에 등록을 한 적도 있다. 사악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손이 작아서 코드 잡기도 쉽지 않았고 기타 줄을 누르려니 손톱 밑이 너무 아파서 그만두었다. 노래를 못하면 악기라도 하나 폼나게 연주하고 싶었는데 흔한 기타를 배우는 것도 나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노래나 악기연주는 내 인생에 없는가 보다 포기를 하고 60년을 살았는데 어느 날 유튜브에서 멋진 해금 연주를 듣고 그만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개량한복을 입은 여학생이 외국의 어느 거리에 앉아 해금으로 아리랑을 연주하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슬프고도 아련한지 한동안 그 가락과 음색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 이거야. 해금을 내 인생의 악기로 결정했어. 죽기 전에 한 번 해보는 거야.’
홀린 듯 해금을 구입하고 레슨을 신청했다.
그러나 몸이 마음 같지 않아서 처음엔 활로 현을 긁는 것조차 어려웠다. 아니 활을 손에 잡는 것도 힘들었다. 한국 전통악기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예쁜 소리는커녕 쉰소리, 쇳소리, 유리창 긁는 소리, 까마귀 소리에 발정 난 고양이소리까지 음도 가락도 아닌 괴이한 소음들을 만들어 냈다. 누가 들을까 무서워 울림통에 양말을 넣고 최대한 조심조심 소리를 냈다.
코로나도 막지 못한 해금 사랑
그렇게 몇 달. 더듬더듬 ‘고향의 봄’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대면 수업이 금지되니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유튜브로 강의를 들을 수 있었지만 초급인 나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둘째 손주 육아를 위해 세종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코로나가 길어지며 해금을 당근에 팔아야 하나 역시 내 인생에 악기는 없는 것인가 고민을 시작할 때 비대면 수업 해지 소식이 들려왔다.
더 늦기 전에 해금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지금 배우지 못하면 영영 악기를 배울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에게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남은 날들이 얼마나 될까. 하루하루 눈도 침침해지고 머리도 손도 둔해지기만 하는데 하루라도 더 똑똑할 때(?)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돌아가신 아버지도 칠순이 넘어서 아코디언을 구입하셨다. 평소에는 음악을 딴따라라고 하며 무시하셨고 자녀들이 혹시라도 딴따라가 된다고 할까 봐 그쪽으로는 아예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셨던 아버지가 칠순이 넘어서 아코디언을 배우신다고 했을 때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가난 때문에 혹은 주위의 시선 때문에 음악에 대한 갈망을 감추고 사시다가 칠순이 넘어서야 커밍아웃을 하신 샘이니 그 용기에 박수를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아코디언은 처음 배우시던 ‘아리랑’도 한 소절 못 들려주고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아코디언을 등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시며 지하철을 타고 학원에 다니시던 아버지가 몇 번 배우지도 못하고 치매라는 나쁜 병에 걸리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요양원에 들어가셨고 아버지의 등에 자랑스럽게 매달려 다니던 아코디언은 값싸게 고물상에 팔려나가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당신이 좋아하신던 노래 ‘황성옛터’나 ‘눈물 젖은 두만강’을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당신의 모습을 꿈꾸며 행복하셨겠지만 치매는 아버지의 꿈도 아코디언도 그 모든 기억들 조차 빼앗아가고 말았다.
내 노년의 동반자가 되어 줄 해금
60세 되던 해 해금을 구입하며 아버지를 떠 올렸다. 평소에 성격이며 외모며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자부하는 큰 딸이 아버지와 똑같은 행동을 한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많이 외로우셨던 것 같다. 외로운 시간에, 적적한 시간에 쓸쓸한 시간에 홀로 아코디언을 켜고 싶으셨을 텐데 아쉽게도 아버지의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 치매가 온 후로 아버지는 아코디언을 잊으셨다.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젊어서 용기를 내셨다면 당신의 꿈을 조금은 이루지 않으셨을까.
해금을 시작한 지 햇 수로 4년이지만 코로나 때문에 실제 수업을 받은 날 수는 2년 남짓 되는 것 같다. 나의 노년을 함께 할 친구로 삼기 위해 사부작사부작 배워가는데 아직도 좋은 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 좀 더 젊어서 배웠더라면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악기라는 것이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노력의 대가는 반드시 있는 법.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는 만큼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기는 하다.
유튜브에서 나를 감동시킨 그 여학생처럼 나도 외국의 어느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꿈을 꾼다. 이번에 두 달간 미국 여행을 가면서도 기세 좋게 해금을 지고 갈 예정이다. 기회가 되면 외국인들 앞에서 한국의 전통악기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물론 아직 자랑할 만한 실력은 절대 아니고 70세까지 연습을 쉬지 않는다면 만족할 만한 버스킹 실력이 될지 모르겠다.
미숙하면 또 어떠랴. 나의 노래가 남들이 뭐라든 나를 기쁘게 하면 그만이듯 해금 역시 내 인생을 즐겁게 하면 그만인 것을. 흰머리 휘날리며 아리랑을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그날까지 할머니의 해금 사랑은 쉬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