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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TK Oct 05. 2024

가족, 그리고 가장이란 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 잔인한 이야기

 5가족그리고 가장이란 .


막상 길을 나서려고 하니 목적지를 정하기가 어려웠다. 어디부터 가야할 지 정하기가 쉽지 않다. 숙주의 기억을 동기화를 통해 중요사건들을 리뷰하면서 이미 그의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져 살아온지가 몇년이 되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누구를 먼저 만나러 가야하는가는 가족이라는 지구의 개념이 확실하지 않은 외계인에게는 더더욱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무작정 정처없이 걸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외계인은 걸음을 멈추고 시스템 수호천사에게 물었다.


“수호천사, 내가 보았던 숙주의 단편적인 기억만으로는 목적지를 어디로 해야하는지 판단이 어렵다. 네가 다시 분석해서 목적지를 정하는 선택 매트릭스를 만들어줘.”


"네, 주인님. 숙주의 가족 관계를 다시 분석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스템 수호천사는 잠시 신호음을 내며 데이터를 정리했다.

"첫 번째로 만 14세 첫째딸의 상황이 가장 심각해 보입니다. 중2병이라는 특수한 사춘기 증상과 함께, 7년 전 아버지와의 이별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어 깊은 원망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사춘기와 맞물려 그 감정이 증폭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외계인은 숙주의 기억 속에서 첫째딸이 울면서 '다시는 아빠랑 살기 싫어!'라고 외치던 모습을 떠올렸다.

"둘째딸은 현재 만 10세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깊습니다. 3살 때의 흐릿한 기억 속에 아버지와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남아있어, 종종 '아빠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막내아들은... 아버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군."

"네, 주인님. 태어날 무렵 가족이 흩어졌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 학교에 입학하면서 친구들의 가정생활을 보며 아버지의 존재를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아빠와 함께하는 참여수업' 같은 학교 행사들이 있을 때마다 큰 상실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외계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내는... 지금 어떤 상황이지?"

"만 44세의 아내는 현재 친척들 집을 돌며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습니다. 경력단절 여성이라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특히 세 아이를 혼자 키우느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먼저 만나는 것이 좋을까?"

시스템 수호천사는 잠시 분석을 한 후 대답했다. "주인님, 첫째딸의 상황이 가장 위험해 보입니다. 사춘기와 중2병이 겹친 데다 아버지에 대한 깊은 원망이 있어, 이대로 두면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은 역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막내아들부터 시작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나아 보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선입견이 없고, 순수하게 아버지의 존재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님, 막내아들을 먼저 접촉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외계인은 잠시 숙주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헤어져 살았으니 당연했다.

"수호천사, 막내아들은... 나를, 아니 숙주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건가?"

"네, 주인님. 정확히는 태어난 직후 몇 번 본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죠. 현재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은 '아빠'라는 존재를 오직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와 사진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외계인은 갑자기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이것이 숙주의 감정인지 자신의 감정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기억도 없는 아들부터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시스템 수호천사가 차분히 설명했다. "첫째, 아들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이 없습니다. 오히려 순수한 그리움만 있죠. 둘째, 초등학교 1학년이라는 시기는 아버지의 존재가 매우 중요한 때입니다. 특히 학교에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날' 같은 행사들이 있을 때마다 큰 상실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하지만... 첫째가 더 위험해 보이지 않나? 방금 전까지도 그렇게 말했잖아."

"네, 첫째딸의 상황이 더 위급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인님, 지금 첫째딸에게 다가가면 거절당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라는 예민한 시기에, 7년간의 원망이 쌓여있는 상태에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외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막내아들은 어디서 만날 수 있지?"

"현재 막내아들은 서울 은평구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하교 시간은 오후 2시 30분입니다. 특이한 점은, 다음 주 금요일이 '아빠와 함께하는 진로체험의 날'이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외계인의 의식이 흔들렸다. "진로체험의 날?"

"네. 아버지들이 학교에 와서 자신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이들과 함께 간단한 체험활동을 하는 행사입니다. 막내아들은... 이번에도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고 합니다."

갑자기 숙주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외계인은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가슴 한켠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니면... 숙주의 아내를 먼저 만나야하지 않을까? 아이들보다. 물론 숙주의 기억에서 본것 처럼 그렇게 달가와 하지는 않을 것도 같지만. 숙주의 아내도 원망같은 것때문에 숙주와의 만남을 피할수도 있을까?"

외계인은 시스템 수호천사에게 묻는 것인지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 스스로도 혼란 스러워하며 질문을 이어 갔다.


"주인님..." 시스템 수호천사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숙주의 아내는... 복잡한 상황입니다."

시스템 수호천사는 숙주의 기억을 더 깊이 탐색하며 설명했다.

"아내는 숙주를 원망하면서도, 동시에 걱정하고 있습니다. 7년 전, 모든 것을 잃고 흩어져 살게 됐을 때도, 그녀는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고, 주기적으로 숙주의 소식을 수소문해왔습니다. 특히 작년에는 숙주의 어머니 제사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갔다가... 역시나 숙주는 나타나지 않았죠."

외계인은 숙주의 기억 속에서 아내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날, 경매로 집을 빼앗기고 짐을 싸던 그녀의 눈빛에는 분노보다 깊은 상실감이 있었다.

"그녀는 지금도 친정어머니 댁 근처의 여러 친척 집들을 돌며 가사도우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세 아이를 혼자 키우느라 하루도 쉬지 못하는 상황이죠. 하지만..."

"하지만?"

"매달 25일, 숙주가 실종되기 전 함께 가던 동네 순대국밥집을 찾는다고 합니다. 혹시나 숙주가 그곳에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7년째 한 번도 빠짐없이요."

외계인은 갑자기 숙주의 감정이 강하게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움, 미안함, 후회...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켰다.

"수호천사, 오늘이 며칠이지?"

"오늘은 2월 23일입니다, 주인님. 이틀 뒤면..."

"그 순대국밥집이 어디 있지?"

"은평구 응암동에 있습니다. 숙주의 기억에 따르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주 가던 곳이라 첫째딸도 그곳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인아주머니가 항상 숙주 가족에게 서비스로 주던 계란말이..."

외계인은 숙주의 기억 속에서 순대국밥집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낡은 간판, 좁은 골목, 늘 웃음으로 맞아주던 주인아주머니...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노란 계란말이.

"25일... 그날 그곳에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겠군."

"네, 주인님. 하지만 갑작스러운 등장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접근하실 건가요?"

"만나면 무슨말을 해야하지? 그냥 관찰만 하고 와야하나?"

외계인은 막상 숙주의 가족들을 만나려고 하니 만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가 막막했다. 처음에는 숙주가 불쌍해서 숙주의 무의식이라도 가족들을 만나게 하고 싶어서 였다. 하지만 막상 만나러 가려고 하니 모든게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다. 그러면서 지구의 가족이란 개념과 일반적인 상황들은 어떤지 먼저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님, 그 고민이 당연합니다." 시스템 수호천사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지구의 가족 관계, 특히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섬세한 문제입니다."

시스템 수호천사는 잠시 분석을 한 후 계속 말을 이었다.

"우선, 일반적인 지구의 가족 관계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가족은 지구인들에게 있어 단순한 혈연관계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죠. 가장인 아버지의 역할은 단순히 경제적 부양자를 넘어서, 정서적 지지자이자 가족의 구심점 역할을 합니다."

외계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호천사는 계속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의 부재는... 매우 긴 시간입니다. 특히 성장기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죠. 첫째딸의 경우, 아버지가 사라졌을 때 7살이었습니다. 충분히 상황을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는 나이였죠. 그래서 그 상처가 더 깊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관찰만 하는 게 좋을까?"

"네, 주인님. 25일 순대국밥집에서 우선 관찰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숙주의 아내가 어떤 상태인지, 어떤 표정으로 그곳에 오는지, 혹시 아이들과 함께 오지는 않는지... 이런 것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외계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호천사, 지구의 가족들은 보통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지? 다시 만나서 화해하고 복구하는 경우도 있나?"

"네,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점진적인 과정을 거칩니다. 갑작스러운 등장과 사과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아무리 진심 어린 사과도 거부될 수 있죠."

"그렇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우선 숙주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 숙주는 안정적인 수입이나 거처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가족과의 재회를 시도하면, 그들에게 또 다른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호천사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인님께서 숙주의 가족들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숙주의 파편적인 기억이 아닌, 그들 각자의 삶과 아픔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만남이 가능할 것입니다."

지구라는 것이 여러나라들과 여러문화권으로 나눠져 있다는 것은 이미 이해했어. 그럼 그 나라나 문화마다 가족의 형태나 개념, 가치도 다 다르지 않을까?


"예리한 관찰입니다, 주인님." 시스템 수호천사가 감탄하듯 대답했다. "실제로 지구의 가족 문화는 지역과 문화권에 따라 매우 다양합니다."

시스템 수호천사는 잠시 데이터를 정리하는 듯한 신호음을 내며 설명을 이어갔다.

"예를 들어, 현재 숙주가 살고 있는 한국의 경우,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가족 간의 위계질서와 효도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특히 아버지의 역할과 책임이 매우 큰 편이죠. 그래서 숙주의 부재가 가족들에게 더욱 큰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반면," 수호천사가 계속했다. "북유럽의 경우는 매우 다릅니다. 개인의 독립성을 중시하며,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더 수평적입니다. 심지어 성인이 되면 부모와 완전히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외계인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또 다른 예는?"

"중동 문화권에서는 대가족 제도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삼촌, 사촌들까지 모두 한 가족으로 여기죠. 아프리카의 여러 부족들은 '내 아이'와 '네 아이'의 구분 없이 마을 전체가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문화를 가지고 있고요."

"흥미롭군... 그렇다면 한국의 가족 문화에서 '이혼'이나 '별거'는 어떻게 받아들여지지?"

시스템 수호천사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이혼이나 별거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특히 자녀가 있는 가정의 경우 더욱 그랬죠. 하지만 최근에는 많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전히?"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이 사회적 편견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학교에서요. 숙주의 첫째딸이 겪고 있는 중2병과 원망이 더 깊어진 이유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이혼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상적인 가정도 아닌... 이런 애매한 상황이 아이들에게는 더 힘들 수 있거든요."

외계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숙주의 가족들도 이러한 사회적 시선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건가?"

"네, 주인님.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정상 가족'이라는 개념이 매우 강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사는 가정을 이상적인 형태로 보는 거죠. 이런 사회적 압박이 숙주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또 다른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가 지금 당장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주인님," 시스템 수호천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았고,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왔을 테니까요. 갑작스러운 변화보다는 천천히, 그들의 페이스에 맞춰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외계인은 이 설명을 들으면서, 가족구성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가족은 어떻게 구성되지?”

"주인님, 지구의 가족 구성 방식도 매우 다양합니다." 시스템 수호천사가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핵가족입니다.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형태죠. 숙주의 가족도 본래 이런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형태는 아닙니다."

외계인이 궁금함을 보이자 시스템 수호천사는 더 자세히 설명했다.

"예를 들어볼까요?   

확대가족: 조부모, 부모, 자녀가 함께 사는 형태입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가족 형태였죠.

한부모 가족: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한 쪽과 자녀들로 구성된 가족입니다. 현재 숙주의 가족이 이런 형태라고 할 수 있죠.

다문화 가족: 서로 다른 문화권 출신의 부모로 구성된 가족입니다.

재구성 가족: 재혼 등으로 새롭게 구성된 가족입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시스템 수호천사가 말을 이었다. "최근에는 '가족'의 정의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의미지?"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정서적 유대와 돌봄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가족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입양 가족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는 1인 가구

함께 살진 않지만 깊은 정서적 유대를 가진 친구들의 공동체

동성 커플과 그들이 양육하는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


이처럼 '가족'이라는 개념은 점점 더 유연해지고 있습니다."

외계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가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무엇이지?"

"주인님,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핵심 요소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정서적 유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

책임과 의무: 서로를 돌보고 지원하는 책임

지속성: 일시적이 아닌 지속적인 관계로서의 의미”


"그런데..." 외계인이 망설이며 물었다. "숙주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저버린 셈이군."

시스템 수호천사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네,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숙주의 기억을 보면, 그가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자신이 가족들에게 더 큰 짐이 될까 봐 멀어진 것이죠. 물론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이 세 가지를 회복할 수 있을까?"

"가능합니다, 주인님. 하지만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성입니다. 단순히 미안하다는 말이나 일시적인 도움이 아닌, 지속적인 노력과 진심어린 변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숙주의 기억에 크게 자리잡은 자책이나 죄의식이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인듯 한데, 왜 그런거지?


"아,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 지점이군요, 주인님." 시스템 수호천사가 신중하게 말을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이라는 역할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단순히 돈을 버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의 생존과 번영에 대한 전적인 책임자로 여겨지죠. 이는 유교 문화와 현대 산업사회의 가치관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입니다."

시스템 수호천사는 잠시 숙주의 기억을 더 깊이 탐색하며 계속했다.

"숙주의 경우, 특히 세 가지 측면에서 깊은 자책감을 보입니다:

첫째, 경제적 실패. 한국 사회에서 남성, 특히 아버지의 경제적 실패는 단순한 실패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곧 '무능한 아버지'라는 낙인으로 이어지죠. 숙주의 기억 속에는 아이들의 학원비를 내지 못해 귀가가 늦어진 날들, 아내가 몰래 친정에서 돈을 빌려온 것을 알았을 때의 수치심이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둘째, 보호자 역할의 실패. 가장은 가족을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숙주는 오히려 자신의 실패로 인해 가족을 위험에 노출시켰죠. 채권자들의 방문, 아이들이 학교에서 겪는 차별, 아내가 겪는 수모..."

외계인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떠나는 것이 가족을 보호하는 길이라 생각했나?"

"정확합니다, 주인님. 하지만 이것이 세 번째 자책의 원인이 됩니다. 바로 '도망자'라는 죄책감이죠. 한국 사회에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가족과 함께 견디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가장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곧 '책임 회피'로 인식되죠."

"흠..." 외계인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어떤 선택을 하든 죄책감을 피할 수 없었다는 건가?"

"네, 주인님. 이것이 바로 한국의 중년 남성들이 흔히 겪는 이중구속(double bind) 상황입니다. 가족과 함께 있으면 그들에게 짐이 된다는 죄책감, 떠나면 책임을 회피했다는 죄책감. 이 딜레마는 종종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하죠. 숙주가 자살을 시도했던 것처럼요."

"그렇다면..." 외계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가장의 역할, 꼭 이렇게 무거워야만 하나?"

시스템 수호천사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주인님. 실제로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전통적인 가장의 역할에 대한 재고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경제활동을 하고, 자녀 양육도 공동으로 책임지는 형태가 늘어나고 있죠. 하지만..."

"하지만?"

"숙주 세대는 아직 이런 변화의 과도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가치관은 이해하지만, 몸에 배인 전통적 책임감은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거죠. 이런 내적 갈등이 숙주의 자책감을 더 깊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숙주의 선택은 옳았던 것일까? 결과론적으로는 틀린것일까? 재기하지 못했고 실패했고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했으니... 틀린 결정이었다고 봐야할까?”


외계인이 물었다.


"주인님, 옳고 틀림으로 단순히 재단하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시스템 수호천사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숙주의 선택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그의 의도였던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 수호천사는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부재가 가족들에게 더 큰 상처가 되었죠.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했고, 거기에 '아버지의 부재'라는 정서적 상처가 더해졌으니까요. 특히 자녀들의 성장기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외계인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이 많지 않았잖아?"

"네, 맞습니다. 하지만 '떠나는 것'과 '완전히 연락을 끊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기적으로 연락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것

작은 금액이라도 생활비를 보낼 수 있었을 것

아이들의 중요한 순간에라도 나타날 수 있었을 것"


"그건...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부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더 깊은 원인이 있습니다. 숙주의 기억을 보면, 그는 '무능한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보이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이는 한국 사회의 남성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깊이 연관됩니다."

"어떤 의미죠?"

"한국 사회에서 남성, 특히 아버지는 '성공한 모습'으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압박이 있습니다. '실패한 아버지'보다는 '부재한 아버지'가 낫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이는 큰 오해입니다."

시스템 수호천사의 목소리가 더욱 진지해졌다.

"실제로 아이들에게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곁에 있는 아버지'가 더 중요합니다. 실패를 인정하고, 그래도 다시 일어서려 노력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중요한 교육이 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렇군요..." 외계인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럼 지금이라도..."

"네, 주인님.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선택이 옳았는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완전한 해결책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시도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바로잡으려 하기보다는,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수 없는 상황에 있던 숙주의 기억들이 순간 너무나 슬프게 느껴졌다. 

"실패한 아버지보다 부재한 아버지가 낫다고 생각하는것 웬지 이해될 것 같다. 그편이 아이들에게 희망이라도 가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거니 말이야.”

"하지만 아이들이 커가면서 스스로 느꼈겠지. 가난이나 자신이 처한 형편. 명확하지는 않아도 부모들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까지도... 그게 상처가 깊었을까?"


"네, 주인님..." 시스템 수호천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아챕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들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죠."

시스템 수호천사는 잠시 숙주의 자녀들에 대한 기억들을 탐색하며 말을 이었다.

"특히 첫째딸의 경우... 7살이라는 나이는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어리지만, 감정을 깊이 기억하기에는 충분한 나이였습니다. 친구들이 아빠와 함께 놀이공원에 가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혼자 급식실 구석에서 밥을 먹었다고 하네요. 선생님이 물어보면 '아빠는 바빠서 괜찮아요'라고 말했지만..."

외계인의 의식이 흔들렸다.

"둘째딸은 더 어렸지만, 오히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냈어요. '우리 아빠는 슈퍼히어로라서 세상을 구하러 갔어'라고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환상은 깨어졌고..."

"막내아들은?"

"막내는...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상상으로만 그립니다. 친구들의 아버지를 보면서 '우리 아빠라면 어땠을까'하고 상상하는 일기를 쓴다고 해요. 특히 아버지가 참석하는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아프다고 하고 결석한다고 합니다."

외계인은 숙주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느꼈다.

"주인님," 시스템 수호천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숙주의 선택이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보호하려 했던 거죠. '실패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차라리 기억 속에 '있었던 아버지'로 남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네, 또 다른 상처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완벽하지 않은 아버지'라도 곁에 있어주는 것이 더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숙주는 그걸 몰랐던 거죠.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던 걸까요..."

시스템 수호천사의 목소리가 잠시 멎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주인님, 인간의 선택이란 게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때로는 최선이라 생각한 선택이 최악이 되기도 하고, 실수라고 생각한 것이 전환점이 되기도 하죠.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아이들은 그럭저럭 잘 적응하며 살고 있는데, 아직 숙주의 실패한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그들을 찾아가는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갑자기 난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외계인이 말했다.


"주인님의 고민이 매우 깊어 보입니다." 시스템 수호천사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아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현재의 삶에 적응했을 것입니다. 7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으니까요. 첫째딸은 이제 사춘기의 한가운데 있고, 둘째딸은 초등학교에서 자신만의 일상을 만들었으며, 막내아들도 학교생활에 적응해가고 있겠죠."

시스템 수호천사는 잠시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주인님, 한 가지 제안을 드려도 될까요?"

"그래, 말해봐."

"굳이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숙주의 상황을 개선하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가 이제 숙주의 몸을 빌려 쓰게 된 이상, 그의 상황을 조금씩 나아지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 의미지?"

"예를 들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고, 작은 방이라도 마련하고,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한 상태를 만드는 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 천천히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어떨까요?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모습으로요."

외계인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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