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3월 25일, 뉴욕의 오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맨해튼 중심부, 워싱턴 스퀘어 이스트 북쪽 모퉁이에 위치한 트라이앵글 의류공장에서는 평소처럼 바느질 기계가 끊임없이 돌아갔고, 노동자들의 손길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14살에서 23살 사이의 여성들이었고,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유럽에서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이었다. 희망을 품고 건너온 이 땅에서 그들이 마주한 것은 과도한 노동 시간과 비위생적인 환경, 그리고 숨 막히는 억압이었다.
"아직 20분이나 더 일해야 돼!"
한 소녀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오늘도 힘들게 하루를 버티며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꿈꿨던 희망은 그날 오후 4시 40분, 공장의 한 구석에서부터 깨어지기 시작했다.
“불이야!” 누군가의 외침이 공장의 천장을 뚫고 퍼졌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 짧은 외침이 전해진 순간, 불길은 이미 8층의 재단 기계 아래 쌓인 천 조각들을 집어삼키며 거대한 화염으로 변했다. 9층에 있던 소녀와 그녀의 동료들은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불길은 급속도로 번져나갔고, 몇 분 만에 건물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앞다퉈 도망치려 했지만, 출구는 모두 잠겨 있었다. 문을 열 열쇠를 쥔 감독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트라이앵글 공장의 주인들은 노동자들이 자재를 훔쳐간다고 의심하며 근무 시간 동안 문을 잠가버린 것이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해?”
소녀는 숨이 턱에 닿는 듯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비상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린 것은 붕괴된 계단과 바깥으로 떨어져버린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불길은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했다. 주위는 공포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녀는 무엇이든 해야 했다. 도망치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여기야!”
친구가 화물 엘리베이터 앞에서 외쳤다. 엘리베이터는 몇 번의 왕복을 하며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가 더는 올라오지 않게 되었다. 철로가 불길에 휘감겨 휘어졌기 때문이다. 살아남을 길이 없었다.
옥상으로 도망친 몇몇은 건너편 빌딩에서 달려온 이들에게 구조되었다. 그러나 9층과 10층에 갇힌 사람들은 점점 뜨거워지는 공장 안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뜨거운 공기, 불길,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창문으로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거리로 떨어지는 그들의 몸은 마치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허공을 가르며 추락했다. 소방차는 이미 도착했지만, 6층까지만 닿을 수 있는 사다리로는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사고가 끝난 후, 거리는 피와 눈물로 뒤덮였다. 소녀와 같은 많은 이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왜 문이 잠겨 있었는지 의문을 품었다.
트라이앵글 의류공장의 주인 맥스 블랑크와 아이작 해리스는 그날 가장 먼저 옥상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그들은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불타는 공장에서 탈출하지 못한 노동자들의 피는 허공에 맴돌았지만, 그들의 죽음은 법의 심판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 가지 변화를 이끌어냈다. 대중은 노동자의 권리와 안전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는 뉴욕 주 의회의 문을 열었고, 1913년 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제는 두 개 이상의 비상계단과 안전시설이 법으로 의무화되었고, 사람들은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의 불길에서 죽어간 이들의 영혼은 여전히 뉴욕의 하늘을 맴돌고 있다. 그들은 잊히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희생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안전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이 사회가 지켜야 할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