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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감시.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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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준 Sep 13. 2024

1장: 감시자.

사람을 단속하거나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일정한 곳을 지켜보는 사람.

칠흑같이 짙은 밤하늘은 무거운 장막처럼 내려앉아, 빗방울이 창문을 마치 도망칠 수 없는 방을 감시하는 감시자처럼 두드렸다. 폴은 빗물이 유리 위를 미끄러지며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그것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뇌를 갉아먹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뉴욕, 브루클린. 이 날 밤. 폴은 본격적으로 감시자가 될 기회를 얻었다. 지나가면서 봤던 한 젊은 여인의 집. 그 집의 문이 살짝 열려있어, 침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폴은 망설임 없이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그 집에 로즈가 도착했다는 사실은 빗속에서 점점 커지는 구두 소리에 의해 알려졌다. 폴은 자신의 몸을 억지로 장롱 속에 구겨 넣으며, 한줄기 희미한 틈 사이로 그녀의 모습을 엿보았다. 검은 블라우스와 재킷을 걸친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금발의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고, 푸른 눈은 바다보다 더 깊이 그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새하얀 피부는 분명히 폴에겐 로즈가 처녀의 순수함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로즈는 마치 오랜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느릿하게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렸다. 차가운 금속성이 방 안에 은밀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천천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고, 로즈가 담배에 불을 붙이자 희미한 연기가 거실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연기는 마치 폴을 찾아내려는 무형의 손처럼 장롱으로 스며들었다. 폴은 점점 진해지는 연기 속에서 필사적으로 기침을 삼키며, 그림자처럼 진해지는 연기가 폴을 해칠까 두려움에 떨었다. 로즈는 무심하게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윈스턴 씨, 잠깐 시간 되나요?” 로즈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담담함이 폴에겐 더 큰 불안을 자아냈다. “윈스턴? 그건 어떤 남자지?” 폴은 마치 자신의 무언가가 빼앗겼다는 듯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로 작은 속삭임을 내뱉었다. 그 말이 공중에 퍼져나가면 로즈에게 들킬까 두려워 가슴이 순간 조여왔다. 다행히도 그녀는 들은 기색 없이 통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네, 윈스턴 씨? 내일 혹시 개인적으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고, 그 떨림이 방 안을 진동시켜 폴의 귀에 다시 울려 퍼졌다. 재떨이에 담배를 털어내는 그녀의 손길은 초조함을 담고 있었으나,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내일 저희 집 앞으로 와요.” 그녀는 대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놓았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로즈가 주방으로 가자, 폴은 마침내 좁은 장롱에서 벗어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 좁은 공간을 빠져나왔을 때도, 그를 억누르던 무언가는 사라지지 않았다. 로즈는 주방에서 맥주병을 들어 올리고, 고독하게 그 액체를 들이켰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는 더욱 거세게 울리며, 그 소리는 폴의 귓속을 침범해 왔다. 폴은 로즈의 집에 있는 모든 가구와 사물을 두 눈에 담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것은 마치 그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가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려 하는 순간, 그는 오히려 자신이 그 공간에 속하지 않음을 절감했다. 바닥에 깔린 러그조차 그에게는 이질적이었다. 그의 발아래에서 무언가 천상의 영역에 도전하는 미약한 인간의 발걸음을 비웃는 듯했다. 러그는 구름 위 신전의 일부처럼 느껴졌고, 그 신성함 속에서 폴은 긴장하며 오히려 자신이 신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그 착각은 로즈의 발소리와 함께 무너졌다. 폴은 순간적인 두려움에 창문을 가리는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램프가 만들어낸 좁은 공간은 그를 겨우 숨겨줄 만큼만 여유가 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동안, 그는 창밖으로 빗속을 가르는 노란 택시와 쏟아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는 신의 영역에서 추락한 한낱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빗방울은 그 추락을 증명하듯, 그의 시야를 메우며 끝없는 패배감을 덧씌웠다. 폴은 커튼을 살짝 젖히고 로즈를 바라보았다. 텔레비전은 희미한 흑백 화면 속에서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를 문 채, 손에 들린 커피 머그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다. 그가 읊조리는 뉴스는 단지 소음일 뿐이었지만, 폴은 그 안에 깃든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지하철 파업이 임박했습니다... 협상 교착 상태...” 기계음 같은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폴의 귀에 맴돌았다. 그것은 단지 단어가 아니라, 그의 머릿속을 갉아먹는 벌레 같았다. 뉴욕의 혼란, 파업의 위협, 그리고 어딘가에서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케네디 대통령의 평화봉사단 연설. 그는 그 모든 것이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그러나 동시에 자신을 겨냥한 메시지라고 느꼈다. 로즈는 그저 담배를 피우며 그 무의미한 전언들을 무심하게 흡수하고 있었다. 폴은 텔레비전 화면 속 남성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 차가운 흑백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었으나, 그가 폴을 향해 거짓말쟁이, 사기꾼, 정신병자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 말들이 실제로 들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폴은 텔레비전을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것이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폴에겐 그 글자들이 자신을 모욕하는 언급들로 가득 차서 텔레비전 화면에 뜨는 것만 같았다. 화면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뉴스와 무관하게, 거짓말쟁이, 사기꾼, 정신병자. 그 모욕과 욕설들은 그의 눈앞에서 계속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곳에 서서 영겁의 시간을 보낸 후, 마침내 폴은 커튼 뒤에서 나올 수 있었다. 로즈는 소파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텔레비전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 머리가 그려진 테스트 패턴만이 보이고 있었다. 소파 옆에는 그녀가 마시다 남긴 식은 커피와 타들어가는 담배는 소파 옆에 무심하게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그 순간, 폴은 마치 자신이 이 집과 로즈에게 속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가 로즈의 머그잔을 들고 입에 대자, 찬 커피가 그의 혀 끝에 스며들었다. 순간, 그는 자신이 그녀와 연결된 듯한 이상한 감각에 휩싸였다. 로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햇빛에 그을린 듯한 주근깨 가득한 얼굴, 그리고 타오르는 태양을 연상케 하는 붉은 머리카락. 그 모습은 폴에게 장미 한 송이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불완전함이었다.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진정한 완벽함이라는 깨달음이 그에게 찾아왔다. 폴은 숨을 멈추고 잠든 그녀의 얼굴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 순간, 그는 이 집에, 그리고 그녀에게 완전히 흡수된 것만 같았다. 방 안에 가득 찬 침묵은 오히려 모든 소리를 삼키고, 폴은 그 안에서 처음으로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듯 느꼈다. 폴은 이 기회를 낭비하지 않았다. 그는 로즈와 자신이, 타액 한 방울이라도 뒤섞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바벨탑을 쌓아 신의 영역에 도전했듯, 금지된 영역으로의 탐욕이었다. 그는 주방으로 향했고, 로즈가 미처 설거지하지 않은 식기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기 하나하나가 신비롭고 성스러운 물건처럼 보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로즈가 사용한 포크와 나이프를 입에 넣었다. 그녀가 손을 대고, 입을 댔을 물건들이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면서 폴은 전율했다. 그가 접시를 핥았을 때, 그 차가운 표면이 혀에 닿는 순간, 그는 자신이 로즈와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고 믿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황홀했다. 그 황홀감은 마치 천국에 도착한 것처럼 그를 감쌌고, 그는 이제 이 공간과 완전히 뒤섞였다고 느꼈다. 로즈의 집, 로즈의 흔적,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을 그는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러나 그 황홀은 끝나지 않았다. 폴은 갑자기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체크무늬 바닥 타일, 낡은 변기,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평범했지만, 폴의 눈에 그것들은 신성한 물건처럼 빛났다. 그는 망설임 없이 변기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차가운 도자기 표면이 그의 뺨에 닿는 순간, 그는 이 공간과 뒤섞이고자 하는 욕망이 더욱 강해졌다. 그는 오직 이 공간과 하나가 되는 것만을 원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이뤄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폴은 창고에 들어가 잡동사니들을 치우고, 그곳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로즈의 집 한 구석에 자신만의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이 보금자리는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로즈와 자신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증거였다. 그는 그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이제 자신을 로즈로부터 떼어낼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그 안에서 그는 완벽한 소속감을 느꼈다. 그때, 창고 밖에서 자명종의 날카로운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폴은 숨을 죽이고 창고 문틈을 통해 로즈가 깨어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그의 눈앞에서 느리게 움직였다. 로즈가 눈을 뜨는 순간, 폴은 자신이 그 장면을 지켜보는 것이 마치 금기를 어기는 것처럼 느꼈지만, 그럴수록 더욱 깊이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그날 아침, 로즈의 드레드록스 머리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 서로 얽히고설킨 것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그녀의 매력적인 검은 피부는 마치 햇빛을 머금은 듯 은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고, 폴의 눈에는 마치 신성한 조각상처럼 보였다. 그녀의 먹물 같은 검은 눈동자 속에서 폴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흑인들만이 가진 독특한 바이브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 바이브는 폴을 매혹하고, 동시에 그를 더욱 그녀에게 가까워지게 했다. 로즈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화장실로 향했고, 곧 샤워 소리가 들려왔다. 폴은 창고 틈새로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체로 샤워하는 모습을 엿보았다. 그녀의 피부에 물방울이 닿을 때마다 그것이 빛을 내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은 로즈의 아름다움을 탐욕스럽게 삼켰다. 그녀의 곡선, 그녀의 엉덩이, 그리고 그녀의 목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줄기 하나하나가 폴을 흥분과 황홀감으로 휘감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은 떨림으로 가득 찼다. 온몸이 발작하듯 경련했지만, 그것은 순수한 기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샤워가 끝난 후, 로즈는 평소처럼 양복을 입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천천히 흘러나오는 동안 폴은 다시 한번 그녀와 자신이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폴의 심장도 함께 뛰는 것처럼. 폴은 문득 초인종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누구시죠?" 로즈가 물었다. "어제저녁에 전화로 대화했던 윈스턴입니다." 사내가 답했다. 그 목소리에서 폴은 알 수 없는 위협을 느꼈다. "집 안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의 물음에 로즈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안 될 것 없죠. 들어와요." 그 순간, 폴의 가슴속에 증오가 타올랐다. 윈스턴, 저 사내. 저 사내는 무엇을 위해 이 집에 들어왔단 말인가? 무슨 자격으로 로즈와 그의 신성한 공간을 침범한단 말인가? 저 사내의 존재 자체가 폴에게는 치명적인 모욕이자 도전이었다. 윈스턴이 집에 들어서자, 폴은 창고에 몸을 숨기고 이를 악물었다. 주방으로 떠나는 로즈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손을 쥐어 피가 날 정도로 분노를 억눌렀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불쾌한 상상이 꿈틀거렸다. 윈스턴이란 사내는 중절모를 쓴, 나이가 든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입은 볼품없는 양복이 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양복과 그 남자의 존재는 이 공간을 더럽히고 있었다. 로즈가 커피를 준비하며 무심코 말한 "윈스턴 씨, 항상 고마워요."라는 한마디는 폴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저것이 정녕 사랑의 말이란 말인가? 폴은 견딜 수 없어 창고의 문을 닫아버렸다. 로즈의 배신에 굴복한 자신을 경멸하며, 지금 윈스턴과 대화를 나누는 로즈를 인정할 수 없어 눈물을 흘렸다. “안녕하세요, 로즈 양. 저는 폴입니다.” 폴은 세련된 양복을 입고 로즈에게 다가가 신사처럼 인사했다. 로즈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오, 신사분. 만나서 반가워요." 그들은 거실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러그는 그저 장식일 뿐이었고, 커튼은 단순히 햇빛을 차단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텔레비전 속 흑백 남성도 더 이상 폴을 모욕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일상의 날씨를 전해주는 평범한 텔레비전 속 목소리일 뿐이었다. 로즈는 검은 머리칼이 얼굴을 부드럽게 덮고 있었고, 그녀의 검은 양복 차림과 차분한 아시아계의 황색 피부는 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그 순간, 폴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다. "로즈, 창고 안에는 뭐가 있죠?" 폴은 숨죽이며 물었다. 로즈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사분, 저희 집에는 창고가 없어요.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의심이 묻어났다. 폴은 자신의 질문이 그녀의 경제력에 대한 모욕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에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로즈. 맹세코 당신을 모욕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폴의 목소리는 다급하게 변했다. 로즈는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알아요." 그녀는 부드럽게 답했다. 그러나 그 미소 뒤에는 무언가 묘한 쓸쓸함이 감돌았다. 그녀의 집은 허름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빛만이 그녀의 가난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이 집에는 화장실조차 없었고, 주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집. 창밖으로는 붉은색 이층 버스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고, 멀리 버킹엄 궁전이 보였다. 이곳이 런던이라는 사실이 그의 의식을 깨웠다. "런던에서 사시는 건 불편하지 않나요?" 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즈는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나 불편하죠, 뭐. 안 그런가요?" 그녀의 농담에도 폴은 웃지 못했다. 로즈의 낡은 가죽 재킷은 그녀의 생활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 흔한 블라우스조차 입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닥 위에 러그 하나 없이, 그녀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방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라디오만이 그녀가 외부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이것이 로즈의 삶이었다. 폴은 로제에게 말했다. "그래요, 로제. 당신은 저를 살아있게 합니다. 그렇지요?" 그 말은 마치 무한한 공간 속에서 메아리쳤고, 로제는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요, 그렇죠. 신사분." 그들의 대화는 균일한 리듬으로 반복되었다. 폴은 다시 묻는다. "그래요, 로제. 당신은 저를 실존하게 합니다. 그렇지요?" 로제의 대답은 변함없이 돌아온다. "그래요, 그렇죠. 신사분." 그들이 서로를 응시하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질문과 대답은 무한히 반복되었고, 그 끝없는 반복 속에서 폴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소설 속에 갇힌 존재임을, 글자 속에서 존재하는 한 사람임을. 폴은 허공에 떠다니는 글자들을 보았다. 글자들은 자신의 모든 생각을 서술하고 있었다. "저 글자들이... 나에 대한 글을 쓰고 있잖아?"라고 그는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폴은 자신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로제는 그의 곁에서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무한한 지식과 무한한 무지 사이에 있는, 기묘한 중간 지점에 놓여 있었다. 폴은 자신의 손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길 상상했다. 그 순간 그의 손에서 불이 타올랐다. 그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다고 상상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곳에 서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희미해진 그곳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너무나 즐겁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폴은 문득 깨달았다. 그의 존재의 의미가 새롭게 정의되는 그 순간, 더 이상 로제에게서 그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그러나, 아니... 그것은 틀렸다. 그는 여전히 이 소설 속에 있었고, 이 소설을 계속 이어나가려면, 로제를 감시해야만 한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필요로 했다. 그 필요는 절대적이었다. 마치, 로제가 사라지면 자신도 사라질 것처럼. 그는 감시해야만 했다. 폴은 로즈를 본다. 로즈의 집을 본다. 로즈는 출근을 한다. 로즈는 점심을 먹는다. 로즈는 퇴근을 한다. 로즈는 저녁을 먹는다. 로즈는 텔레비전을 본다. 로즈는 담배를 피운다. 로즈는 감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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