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갓졸업하고 입사한 첫회사에서의 일이다. 그때 최종 두 곳에 합격한 상태에서, 사촌매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 고집을 부리며 들어간 회사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다른 회사에 입사하라던 말을 안 들었던 그때가, 내 인생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던 포인트 같기도 하다.
선택이란 게 그렇듯 뒷일을 알 수 없다. 핑크빛 미래만 꿈꾸게 되지 않는가. 내가 입사를 포기했던 회사는 그때도 컸지만, 지금 엄청난 성장을 이뤄내고 지금도 잘 나가고 있다. 선택은 내 몫이다.
정기 공채를 통해 입사했고, 수많은 경쟁을 뚫고 입사한 회사였으며, 나름 두 개의 회사 중에서 선택하여 간 회사여서 애착이 컸다. 알바만 하다가 들어간 첫 정식 회사생활이라 더욱 기대가 컸다. 의기양양했고, 조직 안에서 잘 어울리며 회사를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입사 후 OJT기간에는 입사동기 중에 그냥 재밌는 친구라고 생각한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부서가 정해지고 이 동기는 기획팀으로, 나는 관리팀으로 배치가 되었다.
그 동기는 슬슬 본색을 드러냈다. 자신이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종종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있던 나를 은근슬쩍, 나중에는 대놓고 나를 폄하하며 무시하기도 했다.
그 동기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퇴근 후 밤늦게 장례식장까지 갔던 게 무척 후회되는 일이다. 그 동기는 나중에 나를 따돌리기도 했다.
그 동기는 다른 사람들과 있는 자리에서 나에게 장난을 거는데, 그게 어느 순간부터 나를 골려먹으려 하는 것이라는 걸 느꼈지만, 그래도 내가 형인데 설마 아니겠지 하고 애써 넘겼다. 그 동기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남을 까내리면서, 자기를 추켜세우는 캐릭터라는걸 나중에 알았다.
그런데 우리 팀 상사 중 한 명도 그런 캐릭터였다. 직급은 대리였다. 본인이 느끼는 학력에 대한 자격지심도 상당히 컸으며, 남에게 흠을 내어, 본인의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은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지만, 같은 팀 상사였기 때문에 피하기 어려웠다.
'너는 4년제 나온 놈이 왜 이것도 모르냐', '정규 대학과정을 마친 녀석이 이걸 왜 이렇게 하냐', '좋은 대학교를 못 나와서 그러냐'는 식의 말을 자주 했으며, 일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며, 자기 방식을 강요했다.
또 회의랍시고 자기 밑에 팀원들을 회의실에 모아놓고, 엉뚱한 설교를 하는 날도 많았다.
한 번은 국제회계기준(IFRS)이 변경되었는데 다 모여보라면서, 회계업무와 관련 없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기가 공부한 내용을 한참 연설하기도 했다. 이 사람이 남의 업무시간 다 뺐고 있는데도, 다들 아무 말을 못 하고 듣고 있었다.
팀장도 남을 까 내리면서,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어필하려는 캐릭터였다. 이 팀장은 출신학교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인격모독을 했는데, 대리까지 합세해서 같이 나를 비하하기도 했다. 나도 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그 대리는 사실 나를 비하할 입장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점은 다 수도권 변두리 고만고만한 사립대 출신들이나 정규 대학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그랬다는 점이다. 인서울이든 명문대 출신이든 공부 잘한 사람이 그런다 해도 안될 말과 행동으로 나를 비하했다.
'역시 출신 대학이 중요하다', '너 안 좋은 대학 나온 거 맞잖아?', '인사팀은 왜 이런 지잡대 나온 애를 우리 팀으로 보냈는지 모르겠다'
동기의 말도 가관이었는데, 걔가 한창 사내정치에 물들어갈 무렵이기도 했다. 자신은 나보다 이름 있는 대학 나왔다고, 그래서 기획팀에서 인정받으며 일 잘하고 있지 않느냐며, 나에게
'당연히 우리 학교하고 비교 자체가 안 되지 않나?'라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그 팀 대리와 쌍으로 자기들은 좋은 학교를 나왔다고, 내가 안 좋은 대학 나와서 수준 떨어지는 일을 하고 있다면서, 그 동기에게 '네가 우리 팀에 오게 되어서 다행이야'라는 말을 들으라고 던지고 가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얘도 걔도 쟤도, 그냥 수도권 변두리에 위치한 학교 나왔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가는 학교 출신은 아니었다. 학교 폄하나 줄 세우기 의도는 없음을 밝힌다.
줄 세우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굳이 출신학교 순으로 줄을 세우면, 정작 '나 학창 시절 공부 좀 했다'라고 어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성실하게 조용히 자기 맡은 일 잘하고 있었다.
한 번은 내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하니, 그 친구의 회사에서는 출신학교 얘기도 잘 안 할뿐더러 그런 인격모독 자체가 없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그 회사가 정글이었던 건지, 내가 약해 보였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내가 약해 보이는 약자였던 것 같다.
나는 미움받는 것도 두려웠고, 외톨이가 되는 것도 두려웠다. 그런데 착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돌아오는 것은 미움받고 외톨이가 되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으니까, 재밌어서 계속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 같으면 맞받아치면서 몇 마디 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무조건 윗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살았었다.
업무에 관한 이야기다. 대리도, 또 다른 두 명의 대리도, 팀장도 무능했다. 기안을 수차례 반려시켰다가, 결재판에 사인했으면 임원 사인을 받아와야 할 것 아닌가.
한 번은 임원 한분이 새로 온 후에 진행했던 기안이 있었다.
세명의 대리도, 팀장도 계속 반려 후에, 본인이 사인해서 가지고 임원한테 가서 또 반려, 수십 회 반복했던 것 같다. 매일 야근에 회식에, 결재는 못 받은 상태에서 또 집에 못 가고 사우나에서 눈 붙이고 출근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지쳐만가고 답도 없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다 제끼고, 말단인 나와 임원분 둘이서 업무를 마무리 지었고, 끝이 났다.
아무리 인격모독을 하든, 무시하고 따돌리든, 뭐라고 하든 그냥 버티고 다녔다. 어쩌면 내가 입사포기했던 다른 회사에 다녔다면, 지금과 다른 상황이었을까?라고 수없이 생각해 봤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1년이 지나니 총무부로 변경되었고, 팀원들도 여기저기 이동이 있었다. 팀장은 나에게
'좋은 데로 가서 좋겠다, 너 백 있는 거 아니냐?'라고 웃으며 말했었는데, 사실 본인이 나를 방출했고 총무부서에서 나를 데려간 것이었는데 두 번 상처 주는 짓을 했다.
회식에 워크숍, 체육대회, 송년의 밤에 각종 개별 모임과 행사들이 많은 회사였다. 공식적인 모임과 행사 외에 비공식적인 것들 말이다.
내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인지, 사내정치를 잘 못했던 것인지, 너무 소심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미움받는 게 싫었고 두려웠다. 그런데 딱 그렇게 되었다.
입사한 지 3년 차 어느 날 워크숍 때였던 것 같다. 주류를 이뤘던 또래들끼리는 말을 텄고, 나는 거기에 끼지 못했다. 용기 내서 동갑이었던 여자 대리에게 말을 놓자고 했었다가 '싫은데? 내가 왜 너랑 말을 놔야 해?'라는 답변을 들었다. 본인이 먼저 말을 놓지 않았나?
그때나 지금이나 불안과 강박증은 심한 상태였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퇴사하던 날까지 매일 같이 연극을 했다.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되고 싶다. 그러면 미움받지 않겠지. 그런데 착하고 좋게 대하면 대할수록, 돌아오는 건 따돌림이었다. 더 바뀔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따돌림당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더 초라해지고, 더 외면당했다. 그리고 불안은 더 심해져만 갔다. 커져만 가는 불안을 감추기가 너무 버거웠다.
불안이라는 커다란 뱀의 먹이가 되었다. 삼켜진 채로 갇혀 숨 막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