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일상
퇴사 후 내 세계는 심플하고 조용하고 평범하다.
내 세계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있는 호수다.
어쩌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홧김에 돌멩이를
던졌을 때나 작은 일렁임이 있을 뿐인 고요한 호수다.
반대로 내 마음은 거친 비바람으로 높은 파도가
치는 바다이다.
요즘 논다며? 라는 말을 들으면 천둥과 번개가 치고
오늘 집에서 뭐 한 거야? 라는 말을 들으면 비바람이
세차게 내리꽂는다.
퇴사 후 몇 달 동안은 동네가 너무 낯설었다.
평일에는 집은 잠시 들리는 곳이었고 주말에는
밀린 가사노동으로 꼼짝 없이 집안에만 있었기
때문에 동네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꽤 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있음에도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다. 다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 나오는 마을처럼 마법에 걸려 잠들어 있는 걸까.
이 동네도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동네를 산책하다가 고양이가 자주출몰하는 곳도 찾고(고양이는 거의 못 봤다. 캣 맘들이 가져다 놓은 잠자리와 사료로 추정할 뿐)
나만의 카페도 찾아내는 단순한 시간이 계속됐다.
전 동료들이 들으면 너무나 부러워할 일상이겠지만
항상 사람 속에서 시끌벅적하게 있었던 나는,
나와 둘만 있는 시간이 참으로 밋밋하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친해지는 내가
아이친구 엄마를 어쩌다 마주칠 때 입만 웃고
마음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처럼 버석거리고
어색하다.
도대체 이 공백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홀몸이라면 영화처럼 나를 찾는 여행이라도 떠나볼 텐데 나는 9살, 6살 아이의 엄마다. 더군다나 엄청난
모성과 희생을 강요,강조하는 대한민국의 엄마다.
아이는 엄마손에 커야 한다는 말로 수많은 여성들을 경력단절자로 내몰다가 아이가 조금이라도 크면
남편이 힘들게 일한 돈으로 카페에서 수다나 떠는
몰염치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워킹맘도 해보고 현재 전업맘인 나는 이 상황이 매우 부당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를 알아가려고 더 버둥거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완벽하고 싶지만 완벽하지 못했던 나에 대해서, 자기연민에 취해 문제를 해결할 의욕이 없었던 나에 대해서좋고 싫음을 표현하지 못했던 나에 대해서, 얇은 유리처럼 나약한 나에 대해서, 그 결과 나를 사랑할 수 없었던 나에 대해서 말이다.
좋아하는 것을 나열해 보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리스트를 작성한다. 나는 타의에 의해 경력이 단절되지않았고 몰염치한 사람도 아니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내 안의 충만함으로 왕자의 키스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 복잡하고 소란스런 세상에서 더욱 굳건하게 서서 아이들과 나를 지키리라고.
나는 질풍노도 속 사춘기 소녀에서 한 뼘 만큼은 성장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