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 라는 단어처럼 많은 감정을 품고 있는 말이 있을까. 나는 엄마를 떠올리면 애틋하고 답답하다가 다시 애틋해진다. 세상의 많은 딸들이 ’난 엄마처럼 살지 않겠어‘ 를 외치지만 실제는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엄마는 종종 나와 당신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 등신이라고..
엄마는 20대 초반에 잠깐 직장 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아빠를 만나 결혼했다. 아빠는 공장장(長)이었는데 삼각관계에 있던 남자를 떼어내기 위해 엄마의 퇴사를 종용하셨단다. 직장을 그만 둘 정도로 깊은 감정이었냐는 질문에, 그건 아니었지만 경제력이 있고 가정을 잘 지켜줄 것 이란 믿음으로 결혼을 선택했다 하셨다. 사실 엄마가 마음을 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이별하던 순간이 바로 얼마전 일인 것처럼 가슴 아프게 얘기해주셔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떻게 헤어지고 아빠를 선택한거야 란 물음에 ”내 자식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 것 같아서.. 엄마는 후회하지 않아“ 라고 또 한번 그 이유를 분명히 했다. 당신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도 아니고 태어나지도 않은 훗날의 자식을 위한 것이었다니 같은 여자 입장에서 짜증날 정도로 바보 같다는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선택한 결혼생활은 시집살이까지 더해져 고달펐다. 밤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면서 이대로 도망칠까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고 했다. 나는 여러 번 그 장면을 상상한다. 지금의 나보다도 20년은 더 어린, 앳된얼굴의 엄마가 쓰레기를 손에 들고 대문 밖 밤하늘을 본다. 쓰레기를 내려놓고도 쉬이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가로등이 고운 엄마의 얼굴을 어스름하게 비추고 결국은 포기한 듯 무거운 어깨를 하고는 대문 안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가엾고 가엾다. 안쓰럽고도 안쓰럽다. 가로등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시 들어온 이유는 나와 동생들 때문일 테니까.
고된 시간이 지난 만큼 나와 동생이 어느 정도 크면서 엄마도 주변 엄마들과 어울리기 시작하셨다. 그때 유행했던 것이 ‘계’‘라고 친한 사람들끼리 매월 일정 금액의 돈을 내고 돌아가면서 원금과 이자를 받아가는 시스템으로 당시 은행이자보다 높아서 아줌마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다. 문제는 N번째의 계에서 계주가 모인 돈을 싹챙겨 종적을 감췄다. 당시 어려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 돈을 엄마가 보상해줘야 했고 액수는 오천에 달했다. 부모님은 별거를 선택하셨고 나는 엄마와, 두 동생은 아빠와 지내게 됐다. 나는 그날의 아침을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 학교를 가기 전 엄마에게 작은 목소리로 재차 물어봤다. 약간 울먹거렸던 것도 같다. “엄마 나 학교 끝나면 외할머니네로 가면 되는거 맞지”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도 뭔가 비통했다.
외할머니네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방 한칸에서 옹기종기 다 같이 잤다. 전기밥솥에 문신처럼 박혀있던 까만 파리똥이 내 머리에도 박제되어 있다.(할머니 왈, 전기밥솥이 따뜻하니 파리가 붙어있다가 똥을 싸는 거라고 하셨다.) 외할머니집은, 주인이 살면서 남는 방에 세를 놓아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같이 사는 구조였다. 내 기억에는 방 외에 다른 공간이 없었다. 당시 초등학교 교과과정 중에 리코더 시험이 있었는데 연습할 공간이 없어서 방 밖에서 불 때면 밤에 부는 기집애의 피리 소리는 재수 없다고 혼나기 일쑤였다. 사는 환경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의 생활도 달라졌다. 엄마는 소위 치맛바람이 있는 어머니회 소속이었다. 1학년 때와 내 생활이 달라진 것을 알리 없는 선생님은 2학년첫 수업때 나를 포함한 몇몇을 호명하며 일어세우고는 잘 부탁한다고 했다. 촌지가 자연스러웠던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뻔뻔하기 그지없는 선생님이지만 그때는 어린 마음에 뿌듯하면서도 이를 어쩌지 했다. 선생님이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계주가 등처먹은 오천을 갚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액수를 기억하고 있는 건 나중에 친할머니가 엄마를 흉보는 말을 하면서 "니네 엄마가 빚이 얼마인지 아냐. 오천이야 오천" 심술궂게 일그러진 얼굴로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서 눈앞에 드밀었기 때문이다. 축쳐진 심부볼에 증오가 더덕더덕 붙어있는 할머니의 모습은 엄마가 얼마나 고된 시집살이를 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그렇지만 나는 짐짓 놀라는 척을 하면서 할머니의 비위를 맞췄다. 이 기억이 자라는 내내 엄마에게 미안했다. 딸앞에서 엄마 흉을 보는 할머니에게 뭐라고 하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눈치를 보던 모습은 커서도 죄책감을 가지게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형편이 좋지 못한 외할머니네서 비싼 학교 준비물을, 예를 들어 실로폰,멜로디온 같은 것은 아빠에게 부탁해야 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아빠집에 갔다. 버스로 2정거장이어서 걸어서 갈 수 있었다. 부탁의 목적을 가지고, 날 썩 반기지않는 곳에 간다는 것은 어린 나로서도 매우 유쾌하지 않았다. 가야 하지만 가기 싫은 두 마음 사이에 애꿏은 길바닥만 힘주어 밟을 뿐이었다. 서먹서먹해서 눈만 껌뻑이고 있는 동생들에게도 어색한 몸짓으로 어울렸다. 어린 나이라 뭔지는 몰랐지만 그건 분명한 굴욕의 감정이었다.
외할머니와 관련된 일화가 몇 가지가 있다. 예전에는 급식이 없어서 도시락을 싸갔다. 나의 도시락은 까만 콩장과 달걀말이였다. 엄마는 돈 벌러 가서 주말에만 봤기 때문에 도시락을 싸주고 나를 돌봐주던 사람은 외할머니였다. 나는 햄이나 소세지도 없고 무엇보다 매일 똑같은 반찬만 있었던 그 도시락이 부끄러웠다. 외할머니는 나름대로 신경써주셨던 것이 김을 깔고 달걀을 말아서 시각적으로 예쁜 달걀말이였다.(가끔 나도 김을 깔고 만들 때면 외할머니가 꼭 생각난다. 할머니 죄송해요. 나이들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 많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다가 나중에는 도시락을 꺼내놓지 않았다. 배는 고프고 똑같은 반찬을 보이기는 싫고, 친구들이 얘기하고 있을 때 눈치를 보면서 책상 밑에 있는 달걀말이를 손으로 집어서 재빨리 입에 넣었다. 지금 생각하면 옆에 앉아있는 친구들이 뻔히 보고 있었을 텐데 모르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이 어이가 없다. 모른척해 준 친구들도 고맙다.
두 번째는 호떡이다. 엄마는 인천 쪽에 있던 일자리를 그만두고 외할머니네서 같이 지내며 포장마차를 했다. 사회경험도 없고 기껏해서 30대 중후반의 여자가 밤장사를 하려니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을까. 다시 한번 엄마가 안쓰러워지는 대목이다. 일주일에 두 어번 할머니와 나는 포장마차에 갔다. 엄마는 바쁘지 않을 때 한 번씩 대합탕이나 볶음을 해주셨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대합은 비싼 메뉴 중에 하나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매번 호떡을 사서 돌아왔다. 밤하늘에 달을 보면서 외할머니와 먹는 호떡은 나에게 입과 마음이 즐거운 간식이었다.
외할머니네서 1년 넘게 살았을까. 부모님은 별거를 마치고 다시 합쳤다. 나에겐 10년처럼 느껴지던 1년이었고 엄마와 나는 어딘지 모르게 많이 변했다. 자식 때문에 다시 합친 부모님에게는 얼마나 많은 트러블이 있었을까. 결코 쉽지 않는 일임을 결혼생활을 해보니 알겠다. 아마 젊은 시절 대문 밖에서 머뭇거렸던 것보다 더 많은 머뭇거림과 남모를 눈물이 있었을 것이다. 부엌 한 켠에서 웅크리고 울고 있을 그 시절의 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다정한 토닥임을 해주고 싶다.
엄마는 옷이 젖으면 찝찝함에 자리에 앉지도 않고, 어른이라도 따박 따박 대들던 안하무인 꼬맹이가 그 시절이 있어서 남 눈치도 볼 줄 알게 됐다고 말하지만 나는 안다. 엄마가 그 얘기를 할 때 얼마나 가슴 아픈 표정으로 입만 웃으면서 말하는 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