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날씨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게 화창하다. 좋은 일이 일어나기에 안성맞춤인 날씨이지만,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는다.
어제는 간신히 끝마친 편지를 주저하며 부쳤다. 특급으로 편지를 부치고 우체국을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은혜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아틀리에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하자는 초대를 해왔고, 그곳의 사람들을 모리 없이 만나는 것이 껄끄럽기도 했지만 불쑥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 초대에 응했다.
어젯밤 이불속에서 머릿속으로 정해놓은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이 시폰 소재의 페일그린색 반팔원피스는 여름에 내가 자주 꺼내 입는 옷이다. 무릎 선까지 오는 기장에 걸을 때마다 나풀거리고, 촉감은 까칠하지만 그 질감으로 인해 여름에도 청량한 느낌을 준다.
다시 한번 옷장 안을 살핀다. 나에 대한 인상이 인형 옷을 좋아하는 로맨틱한 소녀로 비약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되었지만 한편으론 그런 소녀로 판단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모리가 사준 검정 구두를 신고 거울을 보니 발을 감싼 에나멜 신발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다.
집에서 복도로 나와 문을 얌전히 닫는다. 문을 등지고 계단을 향해 걸으니 삐비빅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나 자신이 저녁 초대를 받은 것은 처음이다. 저녁 약속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저녁 초대는 특별하게 느껴진다. 나는 계단을 리듬감 있게 폴짝폴짝 내려간다. 타닥타닥 5층을 다 내려와 주택 입구에서 나의 집 창문을 한번 올려다본 뒤 길로 나아간다.
토끼처럼 한발 한발 점프하듯 뛰어 내려가며 보는 언덕 마을의 풍경은 정신없이 아래위로 흔들려 초현실주의자의 시계 그림처럼 점차 녹아내리는 듯하다. 큰길에 다다라서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를 말한다.
퇴근 시간이라 도로는 차들로 빼곡하고 창밖으로 느리게 지나가는 거리엔 한 여름의 활력이 넘쳐흐른다. 이 여름의 한가운데를 모리와 함께 정확히 지나가고 싶지만, 나 혼자로선 여름의 가장자리를 돌아 수동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러시아워 시간의 정체된 도로는 느림이 주는 안정감이 아니라 반대로 초조함을 느끼게 한다. 시간대를 감안해서 일찍 출발했지만, 그것이 무색하게도 약속 시간에 조금 늦었다. 나는 옷과 색깔을 맞춰 연두색 멜론 한통을 오른손에 들고, 아틀리에의 무거운 철제문 앞에서 잠시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남은 왼손으로 문의 손잡이를 잡고 상체로 무게중심을 이동해 밀고 들어간다.
첫 번째 방문에서와 같이 오늘도 잠겨있지 않다. 이 문은 대체로 개방 상태인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안쪽의 문도 활짝 열려있다. 문의 안쪽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온다. 저 사람들은 모리가 없이도 즐거워하는구나, 하고 나는 안도한다.
‘모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나뿐이야.’
사람들은 직사각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웃고 떠들며 역동적인 식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에 끼어들기가 쑥스러워 걸음의 속도를 줄인다. 외려 뒷걸음질 쳐 돌아가고 싶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활발한 기류에 반하는 나의 움직임은 도리어 역효과를 낳아 시선을 집중시키고 말았다.
돌연 나에게 초점 맞춘 열두 개의 눈동자는 인간을 가장한 외계인의 것처럼 이질적이다. 어두운 밤에 결국 인간에게 모습을 들킨 도둑고양이처럼 한자리에 발붙이고 멈춰 선 나는, 과연 그들의 식탁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
이제 빈 의자는 두 개뿐. 하나가 내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의 것일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 숙인다.
“아니야. 우리야 말로 십 분을 못 기다리고 먼저 시작했어. 미안.” 은혜가 의자를 밀고 일어나 나에게로 걸어온다.
그녀는 나에게 몸을 밀착시켜 나의 왼쪽 어깨를 감싸고 나를 테이블로 이끈다. 나는 내 왼쪽 가슴에서 울리는 두근거림을 감지하며 사람들 가까이로 나아갔다.
“여러분이 한껏 기대했던 선물이 드디어 도착했네요. 이 분은 모리씨 애인 안나양이랍니다. 하원아, 안타깝게도 이제 막내자리를 내주어야겠구나. 모두들 궁금한 게 많겠지만 귀한 손님이 너무 부담 갖게 만들진 않도록 해요.”
그녀의 요란스러운 소개가 끝나자, 무안하게도 박수가 쏟아져 나온다. 무리지은 사람들 앞에 선 일은 오랜만이어서인지 양 볼에 열이 올라 붉어짐이 느껴진다. 사람들이 나의 인사말을 기다리며 눈에 핀 조명을 켜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모리의 동료 분들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컸는데, 모리 없이 저 혼자 이런 기회를 갖게 될 줄은 몰랐네요. 이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집에서 나올 때 내가 참석해서 괜한 피해가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어요. 하지만 모리가 그랬던 것처럼 저도 여러분과 친해지고 싶어요.”
모리를 언급하자 한순간 사람들에게 그늘이 하나씩 생긴다. 어두운 그늘이 눈가에, 입가에, 누구는 땅을 바라보고 다른 누구는 딴청을 피운다. 이 사람들에게 모리는 이미 달갑지 않은 존재가 되어 한쪽으로 밀어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여기에 앉아요.”
선영이 앉은 채로 옆 자리의 의자를 빼주며 생긋 웃는다.
“아! 이거.” 나는 선영에게 멜론을 건넨다.
“어머. 멜론이네. 와인 안주로 그만이겠다. 안나씨, 센스 있구나.” 그녀는 은혜를 닮은 연극적인 과장된 말투로 말하고 얼굴엔 연신 미소를 띤 채 멜론을 받아 든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옆의 다른 문 안으로 들고 사라진다.
난 사라지는 선영의 뒷모습을 보고 서 있다가 나로 인해 모임의 즐거운 흐름이 중지되었음을 깨닫고 서둘러 착석한다. 자리 잡은 나의 맞은편엔 모르는 사람투성이어서 순간 숨이 턱 막힌다. 그들은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다.
테이블 상석자리에 앉았던 은혜는 부산스럽게 다시 일어나 사람들 소개를 한다. 바가지 머리에 도톰한 입술로 귀엽게 웃는 남자아이가 하원, 나보다 한 살 많지만 중학생으로도 보일 수 있는 얼굴을 갖고 있다. 하원과 나란히 앉은 하얗고 예쁘장한 얼굴에 붉은 볼을 갖고 있는 여자는 영수, 이 둘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보일 만큼 분위기가 비슷하다.
영수 옆에는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훤칠한 외국인이 앉아있다. 아일랜드에서 온 로난은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외국인 특유의 악센트로 ‘안녕하세요.’를 발음한다. 은혜의 반대편의 또 다른 상석에 앉은 성민은 장발의 머리를 부스스하게 풀고 담배를 태우고 있었는데, 고집 있고 깐깐한 예술인 같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예의 바르고 호의적인 태도로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옆자리 하나가 비워져 있다. 그릇과 물 컵, 술잔, 모두 준비가 되어있지만, 자리의 주인은 어디에 있는지 부자연스럽게 사람만 없고 그저 빈 채로 있다.